소율이에게

 

코로나19.

무슨 외계행성처럼 낯선 단어가 공포를 몰고 다닌다.
소율이도 개학이 늦어져 아직 집에 있지?
어린이집도 폐쇄돼 삼촌도 육아 격리 중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봄날을 즐기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지겨운 생활에 아득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기억이 안 나던 것도 기억이 나구나.

턱에 총상 자국이 선명하고 이북 사투리가 심한 옆집 ‘기도원’ 원장 할아버지 눈은 회색빛이었어.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피해 내려왔다는데, 모든 재산을 다 두고 왔다며 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지. 눈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 떨어져서 봐도 딱 회색빛이었어. 그러다 언제 한번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지.

유년 시절 고향 산골은 기도원과 건넛집, 우리 집이 다였어. 하루는 하도 심심해서 기도원 한중간을 가로지르는 샛길로 방아깨비를 잡으러 갔지. 거기 가면 말과 행동은 어눌하지만 내가 잡아간 방아깨비를 맛나게 구워주시는 ‘김 씨’ 아저씨가 계셨지.

손바닥만 한 모닥불에 풀줄기로 꽁지를 낀 방아깨비를 요리조리 돌려 구웠어. 찌지직 소리와 함께 노릿한 냄새를 풍기며 얇은 날개가 솜사탕 녹듯 타들어 가면서 발그레하게 익어. 반들반들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방아깨비는 볶은 새우 맛처럼 고소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거웠던 것 같아. 얼마나 지났을까, 주머니 가득 잡은 방아깨비도 바닥나고, 제법 시간도 되고 해서 집에 가려고 샛길을 나와 집 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저 멀리 기도원 끝자락 골방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

“아가야 가르쳐 줄게, 이리 와 봐!”

사람이 귀한 산속 골짜기라 낯선 목소리에 나는 곧 흥미를 느끼고 냉큼 달려갔지. 개밥그릇같이 작은, 창살에 방충망을 댄 구멍에서 나는 소리였어.

기도원은 어린 내가 보기엔 무척 신기하고 괴상한 곳이었어. 거긴 건물이 세 채 있었는데 원장이 부인과 함께 사는 건물,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 큰 자물쇠가 채워진 여섯 개의 방으로 된 건물, 그리고 아무도 예배를 보러 오지 않는 큰 십자가가 솟은 예배당 건물이 있었지.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가 그 큰 자물쇠가 채워진 여섯 개의 방에 대한 궁금증이 얼마나 컸겠니. 그런데 그 방들은 시커먼 큰 개가 지키는 것도 아닌데 늘 겁이 났어. 어떤 금기의 공간처럼 공포스러웠어. 그리고 늘 그 원장 할아버지가 있었지.

작은 키로는 닿을 수 없는 높은 창살 구멍에서 껌 종이를 말아 놓은 것처럼 앏은 종이 대롱이 쏙 나왔어. 그걸 잡으려고 깡충깡충 뛰었는데, 작은 키에 어림도 없었지. 한창 낑낑대고 있으니, 그 목소리가 종이를 쑥 던져주었어.

“뭘 가르쳐 준다는 거지…?”

불현듯 누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는데, 무슨 비밀 결사가 적혀있거나, 구해달라는 등의 오싹한 말들이 나오면 어쩌나 하며, 돌돌 말린 그 종이를 한참이나 펴 보았어.

“A B C D E…”

별것 없는 알파벳이었어. 알파벳 스물여섯 자가 적혀있었지. 뭔가 모를 허탈감이 느껴지다가 이내 안도감이 들었어.

“여기서 뭐 하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깜짝 놀라 돌아봤더니 그 원장 할아버지였어. 그때 보았지. 내 귓가에 대고 말하고 있는 원장 할아버지 눈의 누르스름한 회색 핏줄들.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불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꺼죽한 손바닥을 보이며 뭔가를 달라는 눈치였어. 아무 잘못이 없으니, 난 그저 던져주는 종이를 받았을 뿐이고, 그 종이에는 어떤 비밀의 단어도 없었고 그저 알파벳이 적힌 게 다였으니. 뭔지 모를 겁이 났지만 바로 종이를 건네주었지.

“이게 다네?”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걸어갔어. 왜 그렇게 서럽게 눈물이 나던지. 삼십오 년이 넘은 이 기억이 아직도 이토록 선명한 건, 내 생 최초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와 수치심때문일까?

 

충북 음성군 금왕면 제국군인후원회비납부 통지서(1937).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문서
충북 음성군 금왕면 제국군인 후원회비 납부 통지서(1937).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문서

요즘 들어 일제강점기 공문서를 구해서 해석하고 있어. 이유는 당시 총독부를 정점으로 한 일제의 수탈 행정을 잘 알 수 있어서야. 또 하급 기관인 면사무소 공문은 이러한 행정이 실제 식민지 조선인의 실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신문이나 서적처럼 활자를 찍어서 만든 게 아니라 손으로 써 만들었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필체가 달라서 해석하는 데 고생을 좀 하고 있어.

원문을 해제하고 직역해 보자.

 

金第 號

昭和 12年 9月 12日
金旺面長
ㅇㅇ殿

帝國軍人後援會費納入의 件

首題에 關하야는 旣히 入會甲? 하신지 日久하고 面職員이 屢次 出張 仰復 한바 이와 枚別 配慮中 이심으로는 思料하으나 目下 非常時局에 直面한 本會로는 使命 發揮의 決이오니 此旨率 充分 照亮하시와 此書 惠覽 卽是 納入하심으 千萬로 俟하나이다.


금제 호

소화 12년 9월 12일
금왕면장
ㅇㅇ앞

제국 군인 후원회비 납입의 건

앞의 제목에 관해 이미 회원으로 가입하신지 오래되었고, 면 직원이 누차 출장 가서 정중히 거듭 되풀이한 바, 매별 배려 중인 것으로 사료되지만, 눈앞에 비상시국에 직면한 본회로는 맡겨진 임무를 발휘할 결정이오니, 이 뜻에 따라 충분히 조량하셔서 이 문서를 헤아려 보아, 즉시 납부하실 것을 아주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1937년 7월 7일부터 시작된 *중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시작한 침략전쟁이야.

1937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를 총동원체제기(總動員体制期)라고 하는데, 일제는 이 상황을 두고 비상시국(非常時局)이라 설정하고 식민지 조선을 병참 기지화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에 총동원시켜.
 

■ 당시 제국군인후원회 영주군위원부의 영주군사후원회연맹 가맹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영주】목하 시국의 중대성에 감한 경북 영주군에서는 지난 3일 오전 9시 영주군 회의실에서 관민 다수가 모이어서 영주군사후원회연맹을 김군수 사회하에 조직하였는바 가맹단체와 임원 성명은 다음과 같다 한다.

가맹단체

제국군인후원회 영주군위원부, 일본적십자 영주위원부, 애국부인회 영주분회, 제국재향군인회 영주분회, 국방부인회 영주분회, 영주군 교화단체연합회, 영주군교육회, 영남명덕회 영주지부, 영주의생회, 영주소방조, 영주명신청년단.

임원 성명

회장 : 군수 김규년, 부회장 : 경찰서장 스즈키 미에, 도의원 박승우, 평의원 스즈키 킨사부로 외 20인, 간사장 : 내무주임 오카자키 켄이치, 간사 : 권대일 외 3인, 고문 : 전하경 외 2인.

- 동아일보(1937. 8. 7)

 

중일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는 천황의 황군을 돕고 후방을 지원하는 ‘조선군사후원연맹’이라는 친일단체가 조직되는데, 여기 문서에 나오는 제국군인후원회도 여러 단체와 함께 이곳에 가입하여 활동했어.

그 후 각 지방에서도 행정, 사법 기관의 수장들과 지역 유지 등으로 구성된 지역 군사후원연맹이 생겨났지. 제국군인후원회 역시 지역위원부를 여기에 같이 참여시켜 황군 지원에 동참했어.

사진 속 문서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쯤 지난 소화 12년(1937년) 9월 12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장의 이름으로 발행된 공문서인데, 많은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국군인후원회에 가입한 지 오래되었고 회비를 안 내고 있으니 빨리 회비 납부를 하라고 종용하는 통지문이야.

제국군인후원회는 1906년 일제 본국의 군인과 그 가족, 유족을 돕고 후원사업을 위해 설립된 단체인데, 한일병합이 되면서 조선본부를 두고 시군별로는 위원부를 두고 운영되었어. 그 조선본부에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친일파의 대명사인 **이완용이 평의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지.

이러한 친일단체의 회원가입과 회비 납부까지도 비상시국이라는 이름으로 면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종용한 사실에 놀랍기도 하면서, 참 집요하게 수탈했다는 생각을 해 봐. 아마 총독부를 정점으로 전국의 면사무소를 통해 저렇게 일률적으로 움직였겠지.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 체계적으로 관리했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사태에 지쳐간다. 이러한 진짜 비상시국에서는 노인과 장애인 등 약자가 피해를 가장 많이 본다는데, 하루하루 그것을 실감하고 있어. 하루빨리 종식되길 바라.

노인, 장애인, 노동자, 여성 등 모든 약자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날을 그리며, 근본적 사회변혁을 바라본다.


힘내고 웃으며 보자!

 

 

* 중일전쟁: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사건이 일어나자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 내의 전쟁확대파는 소련의 참전을 경계하는 비확대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을 통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중국 국민정부는 광둥·우한이 함락되자 왕자오밍이 충칭을 탈출하여 난징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1940년 9월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 동맹이 체결되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전력이 쇠퇴한 일본군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전쟁은 종결되었다. (다음백과 발췌 요약)

** 이완용: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 등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파 인물로 을사오적 중 한 명. 본관은 우봉, 자는 경덕, 호는 일당으로 1905년 학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1910년에는 스스로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각종 단체에서 많은 명예직을 겸하며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에 이름이 올라 있다. (다음백과 발췌·요약)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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