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호트 격리 11일째 되던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여기는 감옥이었다.

 

 

3월 9일 코호트 격리 시작

‘감염병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사회로부터 격리를 당했다. 집단 감염의 우려가 높다는 이유였다. 직원들은 “우리의 인권은 없냐”, “이렇게 강제적으로 하라면 해야 하느냐”, “가족들은 어떻게 하느냐”라며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 원의 경우에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2주간 코호트 격리에 참여할 것인지, 가정에 격리되어 있을 것인지.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3명의 교사가 코호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저녁 잠자리에 누우니, 거주인 000 씨가 입소할 때가 생각났다. 갑자기 격리된 그는 울부짖었다. 창살에 목을 끼우고 탈출을 시도했다. 생활관 문의 잠금장치를 흔들며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다. 몇 날 며칠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조금씩 잠잠해졌다. 우리는 그것을 적응이라 여겼다.

과연 그에게는 어떤 선택권이 있었던 것일까? 적응이 아니라 체념이 아니었을까?


3월 12일 코호트 격리 4일째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가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생각에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반찬과 국이 나왔다.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먹지 않으면 한 끼를 굶어야 하는데......

정해진 시간에 주어지는 밥과 반찬만 먹어야 하는 거주인들 생각이 났다. 아침 6시가 되면 “일어나세요”하고 깨우고, 좀 더 자고 싶어 하시면 그래도 늦어도 아침식사 30분 전까지는 깨워야만 했다. 한겨울에는 아직 깜깜한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지 않으면 밥도 반찬도 없다. 이미 잔반통으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싶다”고 우리 거주인분들도 생각하고 계셨을 거다. 그런데 나는 왜 그동안 그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3월 15일 코호트 격리 7일째

서서히 답답해져 오기 시작한다. 바깥공기가 그립다. 가족도 그립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다. 외식도 하고 싶고, 공원으로 산책도 나가고 싶고, 보고 싶은 이들도 보고 싶고, 쇼핑도 하고 싶다.

바깥에서는 ‘스르르륵’ 소리가 난다. 거주인분들이 식사를 하시고 생활관으로 들어가시는가 보다.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다. 식사하시고 생활관으로 거주인분들이 들어가시면 들려오는 저 소리를 평소에는 왜 아무 생각 없이 들었을까.

지금 나는 1층에서 3층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래도 답답하다.

그런데 우리 거주인분들은 생활관에 들어오면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다. 물론 그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업무를 보는 사이 거주인분 중 누군가가 탈출(?)을 시도했다. 이른바 ‘실종’되었다. 직원들이 밤늦은 시간에 불려 나와 몇 시간을 찾아 헤맨 후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몇 차례 겪다보니 잠금장치를 하게 되었다. 그 거주인은 늘 현관문 손잡이를 쥐고 흔들었다.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도 그 문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지금 나의 방문을 그렇게 잠가 놓는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잠긴 문 안에서, 거주인들 사이에서는 잦은 분쟁이 일어난다. 사회복지사들은 “문제행동”이라는 안건으로 사례회의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분쟁은 당연한 것인 것 같다. 그 거주인이 문제행동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좁은 공간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갇혀버린 그들의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견디고 있는 게 놀라울 정도다.


3월 19일 코호트 격리 11일째

나는 2019년 7월에 해고를 당했다. 시설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과 비리를 공익제보했더니, 내부고발자라는 이유로 온갖 오명을 씌워 나를 해고했다. 그러나 싸워 이겨내고 다시 복직했다.

해고 기간 동안 나는 ‘탈시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피켓시위를 할 때마다 탈시설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창살을 들고 나오셨다. ‘감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솔직히 나는 ‘저건 좀 심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감옥은 아닌데, 우리는 저들을 케어해주고 있는데......

그런데 코호트 격리 11일째 되는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여기는 감옥이었다.

이제 코호트 격리 14일 중 11일이 지나고, 남은 기간이 한 자릿수로 접어들면서 직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한자릿수로 줄어들었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선생님은 나가시면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저는 갈비찜이 먹고 싶어요”, “나는 막창이 먹고 싶어요”, “나는 강가를 걷고 싶어요”, “나는 산에 가고 싶어요” 우리 직원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며칠만 더 견디어내면 나가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거주인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

그렇게 창살에 목을 끼우고 나가려고 발버둥치던, 생활관 문의 잠금장치를 흔들고 문을 두들기며 밖으로 나가고자 했던, 그들에게는 지금 어떤 희망이 있을까?

어떤 직원이 출소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현을 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팀장이 그 직원에게 다가가 험악한 말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출소라고 했어요? 여기가 교도소인가요? 퇴소라고 하세요. 퇴소”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한 대 치고 싶었다. 아니, 다가가 한마디 하고 싶었다. 여기가 감옥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여기서 나가는 것은 출소가 당연한 것일 것이다.


3월 21일 코호트 격리 13일째

생활관에 있으면서, 여기보다 집이 좋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거주인분을 보았다. 자식들 사는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그 근처에 방을 얻어 생활하고 싶다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의 바깥 생활에 대한 욕구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내일이면 우리는 이곳에서 출소한다. 직원들은 짐을 싸며 모두들 한결같이 내일을 기다리고, 내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일 오후 6시면 나간다. 5시 20분부터 정말 시간이 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다. 나 혼자 탈출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본인이 만든 수제비누를 몇 개월째 옷장 서랍에 넣어두고 면회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에게 나는 내일 우리 아들을 보러, 우리 집에 간다는 말을 못 하겠다.

처음 코호트 격리가 결정되었을 때 직원들이 한 말.

“우리는 인권도 없나.”

나는 지금 생각한다. ‘우리 거주인분들에게는 인권도 없나’, ‘누구를 위한 케어인가’, ‘우리는 케어라는 이유로 이들을 가두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우리는 분명 케어라는 명목으로 우리는 이들을 가두어 두고 있다’.

 

다음 피켓시위 때에는 나는 당당히 창살을 들고 “탈시설”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을 것 같다.
코호트 격리가 나처럼 탈시설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많은 사회복지사들에게 탈시설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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