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 + 전원일기 + 퀴어 러브스토리!

 

"신의 나라" 영화 포스터 이미지

1. 농촌 혹은 귀농에 대한 ‘환상’


현대사회는 고도로 도시화되어 있다. 도시에 인구가 집중됨은 물론 사회 인프라와 행정체계가 모두 도시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비도시 지역에 거주하더라도 도시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 대도시에서 고도의 효율 중심 자본주의 제도 하에 짓눌려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대안적 유토피아로 전원생활과 귀농을 꿈꾼다. ‘슬로 라이프’가 예찬되는 묘사에는 농업과 시골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요즘 시들해졌다고 말이 많지만, 한때 대도시 거주자들의 제주도 이주 열풍도 이런 흐름의 변형된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귀농에 실패하거나 환멸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상상 속의 시골과 농사는 실제 농촌의 현실과는 꽤나 다른 것이었다는 게 공통된 반응이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갖고 안정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전원주택을 장만하고, 소일거리 삼아 텃밭을 가꾸는 이들이 아니라면 도시-자본주의의 영향에서 농촌 생활 또한 자유로울 수 없어진 지 오래다.

자급자족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농촌의 농업 생산 활동 또한 자본주의 상품시장에 속할 수밖에 없다. 도시와 전혀 다른 자연 풍경이지만 현대 농업을 유지하는 체계는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다. 그 많은 댐과 저수지, 그리고 전력은 농촌 주민들의 생활에도 필요하지만, 고도로 체계화된 농업활동을 위함이다. 현대사회의 농업은 잘 갖춰진 인프라와 과학적 투자에 의해 가동되는 ‘공장’에 가까워진지 오래다. 금융기관으로 변질된 농협은 비료나 종자의 원활한 공급과 농산물 수매 및 공판장을 통한 생필품 수급 등 본래 농업 지원을 위한 협동조합으로 탄생했다. 왜 농협이 우체국과 함께 전국 조직을 갖추고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는지 되짚어볼 일이다.

조선 후기부터 상품농이 성장했다는 언급과, 일본제국주의가 식민통치를 위해 주요하게 악용했던 ‘동양척식회사’의 주 활동이 무엇이었는지, 해방 후 8년간의 전쟁을 포함한 격동의 시기에 체제경쟁 때문에 남북 모두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이 왜 중요했는지 참고해야 할 지점은 차고 넘친다.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통칭되는 경제성장의 주역국들과 그 반열에 같이 서지 못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농촌의 토지 소유구조 때문이라는 지적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농업은 개별 국가의 도시 주민 식량과 세계적 규모의 농산물 시장을 위한 상품을 공급하는 구조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에 버금가는 투자가로 손꼽히는 짐 로저스는 농산물 시장 상품 거래를 주 전공으로 그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만 봐도 우리가 상상하는 농업과 실제로 현실에서 운영되는 그것은 매우 다르다.

‘카길’이나 ‘돌’, ‘몬산토’ 같은 초국적기업은 물론이거니와, 근래의 유기농 붐 또한 대형 마트와 도시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상정한다. 이런 자본주의 시장 종속 구조를 그대로 둔 채라면, 농업은 비용 절감을 위한 대량생산과 단일 품종 재배를 통한 저가 시장 VS 중산층 이상을 타깃으로 하는 브랜드-유기농 시장으로 양극화를 벗어날 수 없다.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 농장은 결국 산업화를 거스를 수 없고 노동력과 기술 유입이 절실해진다.

우리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떠올릴 때마다 도시의 공장지대를 연상하지만 실제로 가장 그 노동자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은 농어촌 지역이다. 갈수록 고령화되어가는 시골이 ‘소멸’하지 않고 미래지향적 변화를 향하려면 청년층 인구 유입은 필수적이다. 일본은 빈집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정착 지원금을 뿌려서라도 이주를 장려하는 중이고, 한국 또한 그에 준하는 유인책을 구사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지역의 공동화 현상은 심화 일로를 걷고 있다. 일자리도 없고 대중교통이나 교육, 의료, 문화생활 전반에서 사회간접자본의 격차가 도시를 따라가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럽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의 나라>를 보면 정말 그렇다.


2. 요크셔의 광막한 대지에 펼쳐진 ‘신의 나라’

영화 제목인 ‘신의 나라’는 영국을 이루는 4개의 지역 중 잉글랜드 북동부인 요크셔 지역을 이르는 별칭이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포지션에 있는 딱 그런 동네다. 조니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 할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고 어머니는 부재한 농장에서 조니는 가축을 돌보지만 가족들도 본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신뢰를 받지 못하는 조니 때문에 아버지는 루마니아에서 농업노동자로 게오르게를 데려온다. 그리고 인생이 바뀐다.


2-1. 첫 번째 키워드 : 농장

게오르게는 구소련 붕괴 후 사회와 경제가 혼란해진 동유럽의 고향 루마니아에서 계절 농업노동자로 흘러 흘러 영국 시골에 이르렀다. 한국의 도시남녀가 제주도에 가서 귤 수확 아르바이트를 하듯 게오르게는 요크셔에 도착했다. 하지만 뭐든 불만인 조니는 그런 게오르게를 ‘집시’라느니 시비 걸며 티격태격한다. 조니의 농장은 가족노동에 의지하는 과거형으로 운영된다. 이미 대도시 수요를 위해 공장 방식 축산이 주류이고, 고급 가공으로 활로를 여는 것도 아닌 농장은 점점 경쟁에서 뒤처지고 경험 있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현상 유지도 어렵다. 조니가 신용을 얻지 못하다 보니 가족은 농업노동자를 저임금으로 데려와 그 간극을 메우려 한다. 

 

전주 mbc 뉴스 캡쳐 이미지
전주 mbc 뉴스 캡쳐 이미지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한국의 이주노동자 수요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 어선과 양식장, 비닐하우스에서 수많은 게오르게들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극한 직업>이라는 케이블 채널 방송 프로에서 먹방 편집 영상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극한직업 종사자들이 일을 마치고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풍경에서 특별한 대사 없이 먹방의 배경으로 잡히는 이들 중 왜 그리도 외국인의 비율이 높은지 신기할 정도였다. 허영만의 <식객>에서 순대 공장 일화로 묘사되듯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는 당면순대를 먹기 힘든 단계에 어느새 도달한 것이다.

요크셔의 농장 또한 그러하다. 외부인 보기가 어려운 이 동네에 시골 주민들은 어디에 붙었는지 잘 알지도 못할 루마니아인 게오르게가 유입되는 상황은 농장 운영이 저임금 인력 없이는 불가항력의 차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니는 다른 삶의 방식을 실험해볼 기회도 없이 그저 아버지 대신에 우울한 표정으로 되는대로 농장 일을 할 뿐이고, 도시의 대학에 진학한 어릴 적 고향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도 어울리지 못한다. 자연과 더불어 일하는 육체노동의 긍정적 느낌과는 다른 처지의 조니에게, 전원생활을 애정하지만 혼란한 나라 사정으로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지 못하고 외국을 떠도는 게오르게는 이해 불가한 대상이다. 

하지만 전통적 방식의 경험과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농장은 한계에 봉착할 터. 둘 간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농장과 주변 풍경은 생기를 얻기 시작한다. 요크셔의 황량한 전원이 점점 제목에 근접하기 시작한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폐가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 본위의 사고이긴 하겠으나 농장 또한 그곳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이 택하는 삶의 방식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영화 후반 게오르게를 찾으러 모험을 떠난 조니가 그와 재회하는 현장, 기업화된 대규모 농장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외부인인 게오르게 같은 사람들, 조니의 동네 친구들이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비싸고 품질 좋은 유럽의 고급 농산물 가공품에 경탄하는 경우가 많다. 와인이건 치즈건 이베리코 햄이건 나름대로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과 기술이 투입되고 오랜 시행착오 속에서 살아남은 ‘브랜드’들이다. (자급자족 농촌 공동체는 포기된 지 오래인) 요크셔의 가족 농장들은 운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구사해야 한다. 젊은 세대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인위적인 지역 안배 지원책으로는 깨진 독에 물 붓기처럼 될 뿐이고, 조니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2-2. 두 번째 키워드 : 이주노동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고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나라별 극우주의자들이 철석같이 확신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근거가 불확실한 퇴행적 ‘신화’, 다른 대안적 사고를 포기한 이들이 ‘이 모든 건 다 이민자 때문이야!’라고 벽을 보고 외치는 행위에 가깝다. 

20세기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 역사에서 ‘추축국’으로 기록된 국가들의 공통점이 지정학적 생존권이었는데,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스파치오 비탈레’, 그리고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이 그 실 예다. 하지만 정작 영역으로는 달성에 가까웠지만 그 광대한 영토에 채울 인력이 모자라는 상황에 처한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서 식민지를 빼앗거나 ‘해방’시키겠다는 주장은 더욱 잔혹한 식민 착취로 끝났다. 그리고 전후 경제성장으로 부흥한 독일은 국토가 반 토막이 났음에도 인력이 모자라 터키나 동유럽에서 엄청난 이민노동자를 받아야 했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지금도 카르푸 등 유럽의 대형 마트에서 공급되는 중저가 농산물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이하 농업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신의 나라" 영화 스틸 이미지
<신의 나라> 영화 스틸 이미지

<신의 나라>에서 게오르게가 조니와 만나게 되는 시작도 그렇다. 아버지의 눈에 조니는 일 처리가 건성이고 미덥지 못하다. 부친의 건강은 악화 일로다. 조니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눈높이는 있어도 이제 그 노동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럼 농장을 처분하거나 일을 바꿔야 하는데 그렇게 도전할 여유나 의지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가족의 해결책은 저임금 노동자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2-3. 세 번째 키워드 : 사랑

낡은 캠핑 트레일러에 기거하며 조니의 멸시는 물론 마을 주민들의 천대에 상처받지만 게오르게의 일솜씨는 뛰어나고 농장에 대한 애착도 있다. 양떼에게 풀을 뜯게 하기 위한 초지 이동 과정은 두 주인공 간의 관계에서 전환점이다. 영화는 게오르게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닌, 떠도는 품팔이 노동자일지언정 농장과 가축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인물임을 섬세한 연출로 보여준다. 영화 종반에 조니와 사이가 틀어진 그가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결국 ‘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과정은 게오르게가 고향에서 꿈꾸던 농장을 일구는 소박한 삶에 대한 의지가 드러난다.

영화 초반에 ‘신의 나라’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반어법으로 보인다. 조니는 탈출도 꿈꾸지 않은 채 만족하지 않는 무의미한 나날을 보낸다. 게오르게는 생존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 생전 와 볼일 없었던 요크셔 시골 농장에 느닷없이 떨어진 존재나 다를 바 없다. 

조니는 동성애자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초반의 면모는 정서적 교감으로 이뤄지는 관계가 아니라 마음 붙일 곳 없는 조니가 하루 일을 마치고 들르곤 하는 마을의 술집에서 폭음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존재가 없는 권태로운 시골의 삶은 조니에게는 마치 처벌처럼 내려진 유배 같았을 테다. 인간관계에 대한 노력이나 좋은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외형적으론 크게 비뚤어지거나 폭력적이지 않음에도 조니는 친절이나 배려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건성건성 대충대충 시간을 흘려보내려 한다. 그렇기에 새롭게 그의 영역에 들어선 게오르게에 대해서도 경계를 던지고, 그가 가족들에게 인정받자 오히려 초조해하며 시비를 걸어댄다. 이 부분은 감독이 연출에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하나의 상징적 대립 구조로 해석될 법하다.

하지만 게오르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고향을 떠나 산전수전 겪은 그에게 조니가 벌이는 ‘수작’은 뻔히 들여다보이는 텃세와 어리광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니가 본심은 그렇게 악하지 않음을, 그 또한 외로운 존재임을 인지하면서 게오르게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조니를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하려 여러 차례 시도한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집 아들을 어르고 달래다 보니, 단둘이 양떼를 데리고 요크셔의 광활한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교감은 커지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게오르게는 조니와 함께 들른 마을 술집에서 인종차별적 모욕을 당하고 조니는 연인을 대신해 화내고 싸움을 벌여대는 변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바람’을 피우는 등 여전히 애정관계에 서툴다. 사람은 변하지만 그렇게 쉽게 단번에 바뀌긴 어렵다. 그런 갈등이 쌓여가면서 게오르게는 훌쩍 떠나버린다. 조니는 마침내 일방적이 아닌, 서로 존중하고 함께 하는 것이 연인 간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가족들과 진지하게 상의한 뒤, 게오르게에게 사과하러 떠난다. 영화 초반에 파트너에 대한 배려 없이 거칠게 욕망을 채우는 관계에만 집착하던 그가 어느새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을 배워가는 과정의 묘사는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변화일 것이다. 

<신의 나라>는 이주노동자와 퀴어,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는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금기시되는 것들을 용인할 수밖에 없음을 가장 보수적인 공간이라 할 시골마을에서 펼쳐 보이는 ‘러브스토리’이다.


3. 차별과 공포가 아닌, 사랑과 연대로 완성될 <신의 나라>

<신의 나라>는 퀴어 영화로서는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평가가 상반될 수 있지만, 영국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퀴어물에 노동과 이민, 농촌 공간에 대한 설정을 두텁게 연결해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받았고, 영국에서는 독립영화로서 상당한 흥행 성공도 거두었다고 전한다. 상업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표현 수위와 연출 방식에 사회적으로 민감한 화두를 접목한 기획이 탁월한 작품이다.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될 당시 관객들에게 많은 관심과 인상을 남긴 작품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수입 개봉되지는 못했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활용될 여지가 참 많기에, 늦었지만 <신의 나라>라는 흥미로운 작품이 있음을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작품이 갖는 흥미로운 요소들의 조합은 한국 사회가 겪는 갈등을 이해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데 무척 유용하다. 좀 독특한 코드가 녹아있는 농촌 로맨스 멜로물이라 생각하고 봐도 좋다. 그냥 연애물로 생각하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바이다.

 

작품 정보

 

신의 나라 God’s Own Country

영국, 드라마·로맨스·멜로, 2017, 104분, 15세 이상 관람

감독 프랜시스 리
주연 조쉬 오코너, 앨릭 세커리아누, 젬마 존스, 이안 하트

33회 선댄스영화제(2017) 감독상-월드시네마 극영화
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2017) 하비-매너 독자상
71회 에든버러국제영화제(2017) 마이클 포웰상(영국장편영화상)
28회 스톡홀름국제영화제(2017) 남우주연상, 감독상
38회 런던비평가협회상(2018) 영국필름메이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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