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2)

몇 해 전에 대학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강의의 주제는 ‘교직실무’였습니다. 미래에 교단에 설 사범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저의 현장경험과 이론을 접목하여 “살아있는 교육학”으로 재구성하여 수업을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교재로는 어느 교육학교수가 쓴 [교사를 위한 교직실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은 내용도 있고 현장 실무에 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지만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교육의 리얼리티가 없었습니다. 시종일관 막연히 좋은 말로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의 학업성취도 시험을 쳐서 학교간 성적을 매기던 시기였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과격한 기치를 앞세워 초등학생들에게 문제집 풀이 위주의 보충수업을 시키는 것이 ‘현장교육의 실제’이건만, 상아탑의 교육학 교수들은 ‘성직’ 운운하며 미래의 교사들에게 장밋빛 교직관을 가르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교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글들을 여는 마당에서 그때 제가 미래의 교사를 꿈꾸던 그 학생들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똑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철저히 현장교사의 입장에서 현장교사의 언어로 현장의 리얼리티에 충실한 이야기를 열어가고자 합니다. 현실과 유리된 창백한 담론이 아닌 현장교사의 생생한 경험에 터한 실물적인 언어로 풀어갈 것입니다.

그 첫 주제로 ‘교직의 정체성’에 관해 논해보겠습니다. 교직실무 교재에는 교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성직관, 전문직관, 노동직관, 공직관 따위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추상적인 이런 설명 방식이 우리 현장교사들에게는 공허하게만 느껴지죠. ‘교직의 정체성’이란 개념을 실감나게 서술하자면, 한마디로 “학교가 뭐와 같은가? What is our school like?”란 물음에 대한 답을 말하는 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제가 교대를 졸업하고 학교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선배교사들이 학교를 ‘공장’으로 표현하시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공식적인 명명법보다 ‘메타포’가 사물의 본질을 더 적확하게 표상하기도 합니다. 저는 신성한 교육의 장이어야 할 학교가 ‘공장’이라는 조야한 메타포로 교육주체들 사이에 통용되는 이 자조적 리얼리티가 왜곡된 우리 교육의 현실을 웅변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교를 공장으로 일컬으니 어떤 과격분자를 연상하겠지만 그 선생님들은 그저 평범한 분들이었습니다. 애들 가르치는 데 별 열의를 쏟지 않으며 위에서 뭐 해내라고 하면 빨리 척척 해내고선 ‘오늘 오후에 친목 배구 한 판 안 벌이나’ 하면서 일상을 보내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장에 첫발을 내딛은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로 요구되는 것은 아이들 내팽개치든 말든 거짓말을 담든 말든 위에서 떨어지는 오더나 공문 따위를 제때에 처리해내는 테크닉과 센스를 빨리 터득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누가 “학교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저 역시도 20여 년 전의 선배교사와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신성한 학교를 공장으로 일컫는 이 블랙코미디의 진수는 무슨 연구시범학교나 100대교육과정 따위에서 적나라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시범학교가 “시범적으로 아이들 망치는 반교육적 폐단 그 자체”임은 교직생활 한 두 해만 해보면 알게 되죠. 교육의 실적은 종이쪼가리 위에 있지 아니한데, 교사들은 아이들 자습 시켜놓고 실적물 찍어내기에 바쁩니다. 교육의 실적은 사진 속에 담을 수 없는데, 부지런히 사진 찍고 거짓 서류 꾸미고 중앙현관이나 복도 벽에 게시할 판대기 만들기에 바쁩니다. ‘공장’으로 전락한 학교에서 ‘교육실적물’이란 이름의 상품 찍어내기에 바쁜 것입니다. 그 와중에 진정한 교육이 소외되어 갈 것은 말할 나위가 없겠죠.

 


물론 지금 학교를 ‘공장’으로 일컫는 교사는 잘 없습니다. 제가 현장에 발령 받아 근무할 때와 지금의 학교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교육발전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교육실적물을 양산하거나 소모적인 문서작업에 교사의 열정을 쏟는 폐단은 예전보다 훨씬 심한 형편입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문서작업이 용이해지고 무한복제가 가능해진 탓에, 실적 부풀리기나 외양을 번드레하게 꾸미는 거짓 행각이 진화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 형식미가 진화한 만큼 내용미는 퇴화한다고 봐야 합니다. 장학사님 행차할 때 교무실 책상 위에 놓인 실적물의 높이에 반비례해서 교사의 교육자적 양심과 전문성은 추락합니다. 그 실적물의 양만큼이나 학생의 소외도 커져갑니다. 그러기에 ‘공장’이라는 메타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보화시대에 접어들면서 학교는 다만 예전보다 세련된 공장으로 변신해 있을 뿐입니다.

형식미의 세련성은 세련된 용어를 동반해 왔습니다. 교육의 본질에 관한 기존의 우리 정서에 비추어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는 신조어로서 ‘교육수요자’니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니 하는 용어들이 시나브로 교직계에 익숙하게 자리해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시장화와 더불어 교육이 하나의 상품으로 유통됨에 따라 학교는 협동을 미덕으로 삼는 교육공동체가 아니라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학교예산은 필요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마냥 무슨 교육이벤트에 뛰어들어 각축을 벌여 돈 따먹기 하는 놀음이 되었습니다.

교육은 주로 철학과 신념의 문제이건만, 이 놀음의 승패는 교육의 소신과는 거리가 먼 가식과 형식미를 누가 그럴싸하게 포장하는가로 결판납니다. 한마디로, 영혼 없는 학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이 시장터로 전락한 결과로 최근 학교사회에서 유포되며 그 천박한 위용을 떨치고 있는 슬로건이 ‘명품교육’이라는 해괴한 수사입니다. 교육청에서 ‘명품○○교육’이라 떠드니 학교도 저마다 교문 위에 ‘명품○○초등학교’라는 식의 현수막을 내거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대관절 학교가 교육을 어떻게 해야 ‘명품’이 되는 것일까요? 교육은 교사의 손끝에서 시작되고 끝맺는데, 교사들이 학생을 어떻게 가르쳐야 ‘명품’ 소릴 듣게 되는 것일까요?

역사 속 위인 가운데 ‘명품’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일 법한 마하트마 간디는 “진보는 단순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교육도 그러합니다. 가장 앞서 가는 교육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교육이어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육의 고갱이는 ‘교육혼’이란 말로 상징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따뜻한 인간관계에 바탕한 ‘실존적 만남’이 없이는 참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철학이 빈곤한 교육CEO들이 내세우는 ‘명품’이라는 천박한 구호 속에는 실적만 있고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 교직경험으로 미루어 ‘교육실적’과 ‘따뜻한 만남’은 절대 양립하지 못합니다. 평가를 잘 받을수록 필연적으로 학교는 반교육적인 교육기관으로, 그 속의 교사들은 영혼 없는 교육자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직을 성직이라 하면 현장교사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신성한 교직을 누가 공장으로 만드는가요? 프랑스 속담에 “누구든지 천사가 되고자 하는 이는 짐승이 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다름 아닌 “교직은 성직”이라 강변하는 이들이 학교를 공장으로 변질시켜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 입으로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도해달라고 주문하면서, 다른 입으로는 교육실적으로 학교와 교사를 평가하겠다는 식민지적 교육통제가 해체되지 않는 한 학교는 여전히 공장으로 전락할 겁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학교는 신성한 교육의 장입니다. 교사의 교육실천은 성스러운 행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백한 교육학서적 속의 성직자론이 아닌 “부정의 부정”을 거쳐 지양된 교직관으로서의 성직이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성직을 되찾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초라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 고민이 전부라 해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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