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아 잘 지내고 있어? 아직 개학도 못 하고 자가 수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얼마나 지겹고 힘들겠니? 집에서 공부하고 있을 소율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대공원에 놀러 가자.


지금쯤 되는 5월 늦봄이었던 것 같아.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고 미지근한 바람도 살짝 불고 있었어.

잡살곡에서 친구들과 손톱 밑이 새까맣도록 흙장난을 치다 햇빛도 슬금슬금 앞산 뒤로 빨려 가고, 배도 고파오고 해서 집으로 향했지. 

이북에서 쫓겨 내려온 영감이 원장으로 있는 시온산 기도원은 우리 집 초입에 있었는데 예배당 지붕에는 흰 십자가가 달려 있었어. 지난번 편지에서도 몇 번 말한 것으로 기억돼. 

집으로 한참 걷다 보면 멀리 붉은 하늘에 기도원의 하얀 십자가가 조준경의 가늠쇠처럼 눈에 들어왔어.

‘집에 다 왔구나!’

회색 벽돌로 만들어진, 내 키의 세배쯤 되고 끝에는 도둑고양이도 못 넘어갈 것 같은 날카로운 철망이 감긴 기도원 담장을 막 지날 때였어. 

“끼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어.

담장 한중간에 붉게 녹슨 철문이 있었는데 한 번도 열린 걸 본 적이 없었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날다람쥐처럼 번쩍 날아, 재빨리 논두렁으로 몸을 숨겼어. 38선이 그려진 나무 책상 위 책가방 너머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것처럼 긴장됐어. 한참 실눈을 뜨고 철문 쪽을 응시했지.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는데, 열린 철문으로 사람 같은 형체가 나오기 시작했어. 이유 없이 털이 곤두섰어.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에 새까맣게 산발을 한 여섯 명의 사람들이었어. 광대뼈와 갈비뼈가 움푹 파인 발가벗은 어른들. 붉은 노을은 뼈와 뼈 사이에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그늘을 만들어 얼굴을 가렸어.

“쿵, 철렁, 쿵, 철렁…”

자세히 보니 앞에 세 사람은 여자, 뒤에 세 사람은 남자였어. 개나 염소의 목줄을 묶을 때 만 쓰는 줄 알았던, 그것보다 더 굵은 쇠사슬로 손과 발이 꽁꽁 묶여있었어. 그리고 서로 서로를 길게 묶어 놓았어. 

두 발을 하나로 묶어 놓았으니 걸을 수 없어 콩콩 뛰어가고 있었어.

“봄이니 씻어야디… 이, 이, 야, 야!”

기도원 원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는 것처럼 이북 사투리로 호령을 했어. 더운 여름이면 항상 물놀이를 하던 작은 다리 밑 웅덩이로 이들을 몰고 있었지. 한 손에는 기다란 나무 회초리가 들려 있었어.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그날의 장면이 생각나.

그날 이후 거기선 물놀이를 안 했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얼마 전 고추와 가지, 고구마 모종을 심었는데 마침 적절히 비가 내려 너무 기분이 좋다. 좀 더 많이 내려 모종들이 잘 뿌리내렸으면 좋겠어.

올해는 광복 75주년이야. 얼마 전 3.1절이었는데, 코로나19로 기념식이며, 행사가 취소되거나 축소되었어. 광복절 행사는 성대히 치러지길 기대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되어 수개월간 진행된 3.1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자료를 살펴볼게. 

 

△ 1919년 4월 10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명의로 발행된 유고문.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자료.

유고

금반도서정이 기히 취서하야 치적이 겨우 거코져할 제를 당하야 적히 전월내로 소요가 각지에 발발하고 랑민이 시로 위하야 녕거치 못할 부행을 견한대 지함은 본총독이 최히 유감으로 하난바라 본총독은 기히 이회유고를 발하야 민중의 경거망동을 계하고 이내백방기오미를 해하야 각성을 촉하엿스나 간금상진정에 귀치 안이할뿐더러 근시 더욱 흉박을 령히 하고 혹은 관헌을 습격하며 혹은 관공서를 파괴하야 기박상이 순히 용서치 못할 것이 유하니 시난 실노 다삭민중이 관지할 바이리요 어시에 본총독은 랑민의 곤액을 우려하고 지방의 안녕질서를 유지하야 사속히 각기업에 안케코져 하기를 사념하야 중앙정부에 전청하고 군대의 파견을 구하야 지방위수에 당케코져하노니 서민은 수히 관헌의 보호에 신뢰하야 업을 려하며 산을 치하야써 치평의 경에 욕할지라 부병을 용하야 치안을 유지코져 함과 여함은 소시본총독이 희치 안이한바이나 부령한 도를 근절하고 랑민을 부안한 경에셔 구증코져할진대 역부득이함이라 구혹다중취합하야 부온한 항동을 함과 여한 사가 유할지면 단연한 수단을 강할지니 서민은 능히 차의를 량하고 경렬히 부령의 도와 오하고 부측의 화를 몽하지 말며 향당이 상계하야 린보가 호유하고 오하야 형벽에 촉함과 여한 사이 업기를 기할지어다

대정 팔년 사월 십일

조선 총독 백작장곡천호도

 

이 자료는 1919년 4월 10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명의로 발행된 유고(諭告) 전단문이야. 

내용을 살펴보면, ‘대정 8년(1919년) 3, 4월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조선 총독 총독으로 심히 유감이다. 앞서 두 번에 걸쳐 독립 만세 운동을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계속 시위가 진행될 경우 각 지방에 군대를 파견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진압할 것이며, 불온한 집단행동은 엄벌한다’는 내용이야.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혔어. 한일병합이 되고 10년이 안 되는 시점에서 일어난 시위로 안정된 식민통치에 금이 가면 안 되기 때문이었지. 조선 총독을 비롯한 친일파들은 앞다투어 3.1운동을 폄하하고 회유하기 시작했어.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의 거두, 한일병합의 선봉장인 이완용도 경고문을 내며 존재를 과시했어. 여러 번의 경고문을 냈는데 내용이 참 기가 막혀. 

 

△ 1919. 4. 5 매일신보. 이완용 경고문.

“…당국에서 즉시 엄중히 진압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마는 몰지각한 자들에게 두 번이나 타일렀지만 자각하지 못하니 다시 타일러서 말하겠노라.”

“어린 자식과 조카 같은 녀석들이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고로 일차로 타이르고, 타일러도 따르지 않으면 문책을 하고, 그것도 따르지 않으면 필경 회초리를 들 것이다.”

“근자에 듣자 하니 여러 인민이 죽고 부상을 당하였다 하는데, 게 중에는 혹 만세를 외친 이도 있겠지만 다수는 부화뇌동한 자들이라 나는 자신하노라.”

- 이완용 경고문  中 


당시 3.1운동은 친일파, 친일 지주, 친일 자본가 등을 제외하고 조선에서 거의 모든 개인, 세력이 참여한 거족적 독립운동이었어. 

조선의 독립 의지와 일제 식민지 강점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려 냈지. 그러나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했던 33인의 지도부는 운동이 시작되자 곧 투항했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전국적으로 진행된 이 운동을 끝까지 지도하지 못했어. 참 안타까운 일이지. 

수많은 희생을 통해 많은 교훈을 찾을 수 있었어. 조선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적 단결과 함께 무장투쟁의 중요성, 전국적·단일적 지도체계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어.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여러 방면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

그리고 26년 후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어. 그러나 친일은 친미로 변신하여 아직 이 나라에 존재하고 있어. 아직도 여전히 진행되는 변혁 운동을 통해 곧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길 바라본다. 

코로나19로 더욱 강하게 인식된 보편적 복지,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을 광복 75주년에 더욱 바라본다.

 

 

*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조선 총독으로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오사카병학료(大阪兵學寮)를 거쳐 1871년 육군 대위에 임관되었다. 1877년 구 무사계급이 일으킨 반란인 세이난(西南) 전쟁 때 중좌로 참여해 반란군을 진압했다.

1886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12여단장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는 제2군 소속으로 뤼순(旅順)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며, 1896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3사단장·근위 사단장 등을 지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제1군 소속으로 전공을 올려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에는 임시 통감 대리를 겸임했다.

1912년 참모총장이 되었고, 1914년 원수로 승진했다.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뒤를 이어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재임 중 조선임야조사령·조선식산은행령·조선지세령 등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의 기틀을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이를 억눌렀다. (다음백과 발췌, 요약)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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