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CODA’가 쏘아올린 ‘부드러운 직선’의 영화

 

1_ ‘코다’로 자란 감독, 영화를 만들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 농인 부모를 둔 자녀라는 뜻이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코다”로 자라났다.

“코다”는 농인이 아니라면 주로 2개 언어를 구사한다. 수어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국가의 ‘모국어’다. 농인인 ‘코다’는 수어로 가족들과 대화를 한다. 청인(들을 수 있는) ‘코다’는 2개의 세계에 속한다. 수어를 먼저 배웠을 수도 있고 모국어 학습이 선행할 수도 있지만, 가족이라는 소우주에서는 수어가 공용어가 되고, 그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에는 모국어를 구사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경계인이 되는 셈이다.

<나는 보리>는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낸 감독이 몇 편의 단편 작업 후 처음으로 연출한 장편영화이고, 감독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한 점에서 아마 첫 ‘Life-Work’일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창작자의 많은 부분이 투영되었고, 가족영화의 드라마 성 테두리 내에서 모나지 않게, 하지만 할 말 다 하는 ‘부드러운 직선’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전모를 드러냈다.

<나는 보리>는 감독 자신의 유년기 기억과 함께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전작 단편들로부터 꾸준히 담고 있는 고향 강릉의 풍광을 효과적으로 활용해낸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감독이 활발하게 참여 중인 강원 독립영화협회와 강원도 독립영화 ‘씬’의 장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문적인 커리큘럼과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포스트 봉준호’를 노리는 영화학과 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영화 “나는 보리” 스틸 이미지

지역 내에서 협업과 합력을 중시하며 자신들이 나고 자란 지역 배경이나 이야기를 중시하는 공동체 성향은 ‘중앙’의 영화와 ‘지방’의 영화 씬을 구분할 때 주요하게 인지해야 할 지점이다. 부산, 광주, 대구, 강원 등에서 자리를 잡고 꾸준히 주목할 만한 작업을 장르 불문하고 해내는 몇몇 창작자와 그/그녀들이 뭉친 집단들에 공통되는 부분이다.

필요에 따라 소모되는 배경이 아니라, 그 풍경 자체가 이야기를 펼치는 데 주요하게 기능하는 독특한 ‘지역성 Locality’을 필살기처럼 활용한다. 보편적인 공감대와 함께 특정한 코드를 인식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존재는 지역성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데도 유용한 기능을 한다.

이는 독립영화라는 정의가 모호해진 근래 영화계에서 딱딱 구분되진 않더라도 상업영화와 구분되는 정체성을 해당 영화에 부여하고 외부적으로 승인받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독립영화는 2000년을 전후해서 과거 사회비판-사회참여 역할에서 다양성과 작가의 예술적 의도 중시 경향으로 변모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들 요소는 혼재되어 쓰이는 중이다.

전자는 ‘독립군 영화’로 인식되고, 후자는 유럽식 ‘작가주의’와 유사하게 분류되는 한편, 영화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그 개념 또한 명확하게 정의되기보다는 경향과 추세 정도로만 변별성을 가지는 상황이다. 사회비판적 독립영화는 예전보다 상징성은 남아도 실제 이를 지향하는 이들은 소수가 된 지 오래고, 다양성과 작가의 개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독립영화 경향은 그 내에서 하나로 묶기 힘들 만큼, 각자도생 중이다.

독립영화의 공공성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기록’의 역할, 그리고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역소외-지역차별의 정서 속에서 지역 문화예술 활동으로서 펼쳐지는 작가들의 활동은 오히려 개별 작품의 예술성보다 더 유의미한 ‘영향력’이 될 수 있다.

<나는 보리>는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사회적 발언과 함께, 자신이 나고 자란 강원도 강릉의 풍광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연령대 관람 권장 ‘독립영화’로 관객들을 만나는 중이다.

 

"나는 보리"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나는 보리” 스틸 이미지

2_ 장애인 이야기를 다루는 ‘전원 풍경’ 같은 영화


이 영화는 “코다”의 영화다. 다큐멘터리계에서는 역시 농인 부모와 청인 자녀들의 자기 체험을 담은 이길보라 감독의 <반짝이는 박수 소리 Glittering Hands, 2014>가 존재하지만, 드라마로 이에 비견될 작품은 <나는 보리> 이전까지 대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감독의 영화 속 자아이기도 할 ‘보리’는 부모와 남동생 사이에서 유일하게 듣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전반에서 보리는 중국집 주문이나 은행 업무를 볼 때 가족과 장애인에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 사이에 놓인다. 현실의 청인 ‘코다’들이 경험하는 일상의 풍경이다. <나는 보리>는 픽션 설정을 활용해 가장 난처한 구도로 보리네 가족을 설정했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라면 대상을 찾기 힘들었을 테니 드라마의 장기가 발휘된 셈이다.

보리는 가족 내에선 동떨어진 정체성을 갖지만, 사회로 나오면 적응하기 수월하고 차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반면에 보리의 가족들은 집 안에선 편하고 어려울 게 없이 화목하게 살아가지만,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 보리의 도움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거나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장애인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노출된다. 11살 보리는 또래처럼 마음껏 어리광도 부리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로 진입하려 해도 가족 내에서의 위치 때문에 때로는 권위를, 때로는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강릉 바닷가 마을의 전원 풍경을 닮았다. 극단적인 설정이나 전개를 보는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나는 보리>에서 가장 극적인 장치는 보리가 두 세계 사이에서 어느 한곳을 택하려 결심하고 이후 벌어지는 상황이다. 이는 현실의 “코다”들이 성장과정에서 한 번은 겪게 될 일화일 테다.

특히 현실에서 부모는 농인, 자녀는 청인이거나 모두 농인이라면 겪지 않을 경계선 구분이 이 영화 속 보리네 가족에겐 극적 장치를 통해 복잡하고 중층적인 구조로 설정되어 긴장과 혼란을 극대화한다. (한국 독립영화의 과잉 상징처럼 되어버린) 극단적인 설정과 개인이 파괴되는 잔혹도 없이, 관객에게 몰입하고 결말을 상상하게 만드는 미덕을 <나는 보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시작과 함께 강릉 시골의 푸른 하늘과 파란 동해의 눈부신 원색 가운데, 소녀 보리가 화면 속을 걷는다. 그런데 이 첫 장면은 판타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두 손을 펼치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걷는 보리는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그 장면에선 보여주지 않지만 보리는 사실 방파제 위를 걷고 있기에 일반적인 보행 장면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간단한 장치로 ‘보리’라는 주인공과 영화의 도입부를 연출한다는 것은 감독이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와 그를 위한 영화의 기조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의 세련됨에 대비되는 투박함과 치기의 소산이라는 편견을 뒤집어내는 쾌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나는 보리"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나는 보리” 스틸 이미지

보리는 그렇게 마치 하늘을 날 듯 방파제를 걷고 골목을 달리며 세상을 겪는다. 영화 제목 <나는 보리>는 감독 자신의 연출 의도에서 밝히듯 퍽 중의적으로 읽힐 수 있다. “코다”로서의 ‘보리’는 I am Bori로서의 선언으로 활용된다.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보리가 세상으로 나아가고픈 욕망을 온전히 풀어내는 데 한계가 명확한 가족에게서 좀 더 확장된 세계로 ‘날고 싶은’ 보리의 이야기이기에, “Flying Bori”가 되기도 한다.

보리는 딱 그 나이대 아이의 정서에서 최선을 다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보리는 자신이 듣지 못한다면 오히려 가족 안에서는 더 편안하고 동등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중후반 에피소드 중 자신만이 들을 수 있기에 겪어야 하는 세상의 차별에 맞설 것인가 차라리 듣지 못해 모른다면 더 행복할 것인가? 어린 보리의 고민은 보리의 탓이 아니라 이 세상이 농인들에게 잔혹하기 때문이다. 보리는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자기 인생을 걸고 갈등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 순간에는 의식하지 못할지언정, 보리의 방황은 묵직하고 강한 주제의식과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물론 그 돌팔매는 지나치게 아프지 않도록 감독에 의해 정교하게 설정되고 부담감이 적정 수준에 머물도록 조정되어 있다. ‘영화학과 졸업 작품’으로 불리는, 의도는 좋으나 설익은 영화들과 <나는 보리>의 내공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겠다.

영화 속 내용에 추가해 <나는 보리>는 모든 장면에 한국어 자막이 포함되어 있고, 관객과의 대화 행사 진행에는 수어 통역이 함께 배치된다고 한다. 농인의 문화예술 접근성이 높아져야 한다고 말은 분분하지만 정작 한국의 극장 환경은 여전히 농인에게는 좁은 문과 같다. “배리어 프리” 영화라는 용어조차 아직 영화계 바깥에선 일상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굳이 이 용어를 붙여 홍보하진 않지만, 영화가 담은 코다 가족의 일상 대화처럼 <나는 보리>는 듣지 못하는 농인이라도 영화를 보는데 별도의 배리어 프리 앱을 깔거나 관련 버전 상영을 찾지 않더라도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나는 보리"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나는 보리” 스틸 이미지

이러한 지점은 말로는 쉽지만, 편집 과정에서부터 많은 추가 비용과 수고를 전제하는 것이기에 상업영화도 아닌 저예산 독립영화가 취하기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보리>의 설정과 감독의 의지가 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에 이런 섬세한 장치가 가능할 것이다. 상업영화라면 눈앞에 확실한 수요(그리고 상업성) 없이 절대 보장되지 않았을 진일보한 영화 편집이 <나는 보리>에선 구현되어 있다. 농인의 영화 접근 권리 담론에서 <나는 보리>는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3_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과 최선을 다해 함께한 배우들

감독의 의도와 궁리가 좋더라도 영화는 감독 혼자 완성할 수 없는 상업 예술의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영화와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보리네 부모 역의 곽진석, 허지나 배우는 수어를 배워 연기해야 하는 난관을 작품과 감독에 대한 신뢰로 마다하지 않았고, 이는 실제 부부인 두 배우(+ 부부의 반려견인 코코 활약까지)의 안정적 활약으로 영화를 떠받치고 있다. 아역배우 셋은 연기 경험이 거의 처음이거나 많지 않은데도 현실 남매와 또래 친구처럼 영화 내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지역 독립영화의 색깔처럼 작은 규모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경쟁보다는 협동, 튀기보다는 조화를 중시하며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은 수어 습득이라는 특별훈련을 함께 거쳐 드라마 속 보리 가족과 강릉 바닷가 전원마을 주민들로 재탄생했다. <나는 보리>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극중 설정은 크게 군더더기가 드러나 보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큰 무리 없이 연출되었다.

 

"나는 보리"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나는 보리” 스틸 이미지

<나는 보리>의 주요 배역들 모두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특히, 곽진석+허지나 부부의 실제와 영화 속을 넘나드는 부부로서의 조화와 함께 ‘보리’ 역을 맡은 김아송 배우의 연기는 그저 무난하고 준수함을 넘어서는 배역 해석과 짜인 각본대로가 아닌 배우의 연기가 캐릭터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경지에 순간순간 근접한다. 캐스팅 능력이 감독의 주요한 역량 척도 중 하나이기에 김진유 감독이 얼마나 <나는 보리>에 작정하고 달려들었나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요즘 아역배우가 아역 같지가 않다는 한탄도 심심찮게 들리는 현실에서, 설정에 녹아나는 드라마 속 리얼리티를 중심에 놓고 연출한 감독의 뚝심과 그에 부응한 배우들의 연기라는 자연스러운 궁합의 힘이 <나는 보리>에선 미덕이 되었다. 이 영화는 액션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고 온 관객이 아니라면 일단 객석에 앉는 순간 절반 이상은 만족하고 나오게 될 ‘웰 메이드’ 영화다. 독립영화라는 규정이 관객 떨어지게 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나는 보리>는 5월 21일 전국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독립영화로 규정되는 영화 치고는 상영관 수도 꽤 확보했고 전반적인 반응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저 볼 사람만 보는 독립영화로 갇히거나, 농인 문제를 다룬 특정 범위에서만 향유되는 주제 영화로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인이건 청인이건 모두 어려움 없이 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된 여러 장치와 강릉의 아름다운 풍광과 도시 생활에서 잃어버린 소소한 동네 풍경의 재현, 보리와 또래들의 웃음 피식 나오게 하는 고민과 성장 이야기까지, <나는 보리>는 상업영화 블록버스터에 밀리지 않는, ‘영화 한 편 볼까?’ 할 때 고려해도 무방할 그런 작품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작품 정보

나는 보리 Bori

한국, 드라마, 2018
2020.05.21. 개봉, 110분, 전체관람가
감독 김진유
주연 김아송, 이린하, 황유림, 곽진석, 허지나, 코코

23회 부산국제영화제(2018) 한국영화감독조합상
44회 서울독립영화제(2018) 초청
 7회 무주산골영화제(2019) 초청
14회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2019) 초청
21회 정동진독립영화제(2019) 땡그랑동전상
 1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2019) 초청
20회 대구단편영화제(2019) 초청
12회 진주같은영화제(2019) 개막작
20회 가치봄영화제(2019) 대상

제24회 독일 슈링겔국제영화제 관객상&켐니츠상
제18회 러시아 Spirit of Fire 영화제 Your Cinema 섹션 최고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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