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으로 21년”.. 이주노동자 안해영 씨 인터뷰
“미등록으로 21년”.. 이주노동자 안해영 씨 인터뷰
  • 김연주
  • 승인 2020.06.08 2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경산이주노동자센터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인 안해영 씨는 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 시행 첫 해에 한국에 와서 21년 동안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코로나19로 해고를 겪으면서도 이주센터 활동을 챙기는 그는 고민이 많습니다. 뉴스풀에서 안해영 씨를 만나 인터뷰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코로나19로 경산은 특별재난지역이 됐는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코로나 때문에 저번 달, 4월 25일부터 실직자 됐잖아요. 알바까지 했었는데 알바가 먼저 끊기고, 원래 다니는 직장도…. 제가 4대 보험 넣은 게 없어서 아무것도 없어요. 4대 보험을 안 해주는 곳이 많거든요. 원래 섬유회사에서 연사 일을 했어요, 진량하고 자인 쪽에서. 지금 ‘프리하게’ 놀고 있는 상태에요. 남편은 빠레트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데, 아저씨도 일이 많이 적어졌어요. 토요일은 반나절 일했는데 요즘은 토요일도 일 안 하고, 어떤 때는 금요일도 일 안 해요. 일이 많이 줄어들었죠. 

힘들었다기보다 그게 제일 좀 화가 많이 나죠, 어떤 거냐면, 왜 이주민이라고 재난지원금을 똑같이 안 주는지 모르겠어요. 세금은 똑같이 내는데, 우리만 빼요. 정부지원금도 도에서 주는 지원금도 아무것도 못 받았어요. 여긴 재난 지역이잖아요, 재난 지역이면 더 피해를 많이 보는데 왜 없는지. 

온라인 수업한다고 학교에서 노트북이나 와이파이가 다 있는가 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오피스 있죠? 오피스가 뭔지 몰랐어요. 아이가 컴퓨터에 오피스가 안 깔려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전화했어요.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체크카드로 결제가 안 돼서 오피스 못 사겠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오피스 없이 규동이가 할 수 있는 거로 바꿔줬어요.

 

-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한국으로 오게된 계기도 궁금해요. 

73년생, 중국 교포고. 아빠는 2세, 우린 3세예요. 아, 할아버지는 북한 사람인데 할머니는 부산 사람이에요. 결혼해서 할아버지 때 중국에 간 거죠. 고향은 길림성 길림시. 길림시에 김일성 중학교가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서 보면 해마다 행사하러 오거든요. 그런데 길림시라 하면 모르는 사람도 너무 많아요.

연수생 제일 초창기 때, 93년도 6월에 한국 와서 산지 햇수로 27년 됐어요. 처음에 연수생 제도 한다고, 한국 얘기가 2~3년 나왔어요. 그때 이모부가 길림시청에서 근무했었어요. 처음으로 연수생 보내는데 모르는 사람 보내기에는 혹시 잘못되거나 잘 안 될 확률도 있고 하니까, 시청 직원 지인들만 다섯 명 뽑았어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 와서 서울 도봉구 수유동(현 강북구) 컴퓨터 자수회사에서 일했어요. 기계로 입력을 하면 꽃자수가 나와요. 거기서 딱 1년 일했는데, 연장이 안 됐어요. 한국이 살 만하니까 제가 안 간 거죠. 그때 미등록이 된 거지. 나머지 4명은 다 가고 저만 남았습니다. 저만 미등록 됐어요. 사람들이 용감하다고 했죠. 

94년에 미등록 돼서 21년을 미등록으로 살았어요. 미등록 단속한다고 하면 집에 숨어있었죠. 단속한다 하면 일 안 하고, 단속 끝났다고 하면 일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왔었어요. 2015년 12월에 합법 됐어요. 

 

- 미등록일 때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병원 가는 거죠. 아저씨가 많이 아팠거든요, 10년 정도 거의 일을 못 했으니까. 그런데 병원비는 오만상 비싸고. 아저씨도 미등록이었어요. 타지에 있다 보니까 아저씨한테 일하라고 못 하고 혼자 벌어서 병원비를 냈어요. 지금은 거의 나았다고 봐야죠. 조심하는 편이고요.

 

- 경산에는 언제 정착하셨나요?

미등록이라 부산 언니 집에 있다가. 제가 일자리 구한다는 거 알고 영천에서 일하는 이모가 오라고 했어요. 영천에서 한 2년 일을 하고, 경산은 96년 말쯤에 왔나. 섬유만 했어요, 규동이 낳고 고깃집에서 한 1년 일했고. 그러고는 항상 섬유 했죠. 경산 자인에 전세 얻어서 이사한 지 1년 반 됐어요. 아 진짜 빠르다. 이사 많이 했죠, 2~3년에 한 번씩.

 

- 체류비자를 받기까지 과정은?

그때 미등록이라 체류비자 신청하기 전에 벌금도 한 사람당 200만 원을 냈어요. 합법화할 때도 돈 많이 썼어요. 6개월 동안 동대구역 근처에서 주말에 하루 4시간씩 중장비 자격증 교육을 듣고 수료증 받았어요. 수료증이 있어야 합법을 해주니까요. 교육 가면 비디오만 틀어놓고 배우는 건 없어요, 잘 사람은 자고 놀 사람은 놀고. 오래돼 기억은 안 나는데 학비가 꽤 됐어요. 교육 이수해야 H2 비자(방문 취업)를 줬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거죠.

H2로 한 회사에서 2년 이상 근무하면 지금 받는 F4(재외 동포 비자)를 줘요. 지금은 시험 잘 쳐도 받을 수 있고, 교육 기간도 줄고 많이 달라졌어요. 그때는 지문 찍고, 출석 일수가 어느 정도 채워야 해서 힘들었죠. 

 

▲ 2020년 5월, 경산이주노동자센터에서 안해영 씨.

- 섬유회사에서 일은 어땠나요? 퇴근 후 따로 취미 활동도 하시나요? 

내 취미 있나? 취미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요. 저는 취미가 잠자는 건데요. 맨날 잠이 모자라서 집에만 있으면 자는 거야. 섬유회사는 세 시 반부터 오후 1~2시까지 일해요. 섬유 쪽은 이렇게 일하는 데가 많아요. 한국 사람들도 이렇게 일하고, 낮에는 볼일 보고 하니까. 이 일 하는 데는 한국 사람이 더 많아요. 연사하시는 분들이 일을 이렇게 하니까, 거기 맞추는 거죠. 우리끼리는 야근한다고 해요. 밥은 대충 다 때워요. 공장에서 그 시간에 밥 주는 데가 있나요.

알바도 맨 섬유회사에서 주 3회 정도 했어요. 오후에 좀 더 일하고, 남는 시간 있으니까 센터에 가죠. 정상적으로 하면 센터 일은 못 해요. 센터 가서 일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알바는 보통 서너 시간 했어요. 저녁 먹고 8시만 되면 자니까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는 맨날 잠만 자요, 그래요.

섬유도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힘들어요. 정규직 말고 최저임금이라도 제대로 주는 데서 일하고 싶어요.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도 안 주는 회사가 너무나 많아요. 며칠 전에 식당에서 저보고 사람 구해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아침 5시 반부터 저녁 5시 반까지 주방 설거지 일하고, 점심시간에 한 시간 쉬는데 170만 원 준대요. 한 달에 일요일 두 번 쉬고 토요일은 일한다면서 사람 구해달라는데, 그냥 알았다 하고 끊고 말죠. 

최저임금 제대로 주는 회사 있으면 빨리 들어가야지, 나이 들면 거기도 못 들어가요. 제가 73년생이에요, 마흔여덟인데. 일은 하러 갈 수 있지만 나이 제한이 너무 많아요. 마흔다섯 살까지 나이 제한도 너무 많아요. 일자리를 얼마나 구하고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져서요. 보통 공장 현장에도 진짜 나이 제한이 많아요. F4 안 쓰는 데도 많죠. 대우 좋은 데는 외국 사람 잘 안 써요.

 

-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요? ‘내 나라’라는 생각보다는… 여기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잖아요, 지금까지 쭉. 별 거리낌 없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죠. 한국 사람도 이 지역에서 살다 다른 지역 가서 사는 것처럼 그 정도예요. ‘할아버지 나라’ 한국이라서 특별한 느낌은 없어요. 그냥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한국에서 27년 살고 중국에서 20년밖에 안 살았는데.

한국에서 아이가 차별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요. 아이들은 그런 게 없는데, 엄마들끼리 차별이 많이 보여요. 말을 붙이긴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어요. 다문화는 다문화끼리…. 내 성격에 어렵다면 많이 어려운 거예요. 어떻게 보면 조금 안타깝고. 

불법체류자라고 얘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외국인들한테. 차별하지 말고요. 요번에도 재난지원금 줄 때 차별했잖아요. 이주노동자, 미등록이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데, 일자리 더 빨리 잃고. 회사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실업급여 받지만, 이분들은 아예 그런 게 없잖아요. 힘든 건 이분들이 더 힘든데. 빨리 미등록을 없애야죠, 사각지대가 없도록.

 

▲ 중국노동자 임금 체불 사건을 지원하며. 2019년 10월, 대구지방고용노동청에서.
▲ 중국노동자 임금 체불 사건을 지원하며. 2019년 10월, 대구지방고용노동청에서.

- 경산이주노동자센터 활동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어요?

센터가 2007년도 4월에 문 열었고, 규동이는 9월에 태어났죠. 임신하면 산부인과 가야 하잖아요. 대구의료원에서 의료 지원하는 것으로 해서 병원 다니고, 규동이 낳을 때 센터에 도움받았잖아요. 예방접종 하러 가면서 센터 와서 진료의뢰서 받아서 가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센터를 알고 규동이 키우면서 시간 날 때마다 들린 게 지금까지 왔죠. 

규동이 애기 때는 활동 많이 못 했어요. 2008년쯤부터 센터 와서 청소하고, 제일 많이 한 게 센터 각종 행사 때 음식하는 거. 주방 일을 주로 했었죠, 잘하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소장님이 센터를 떠나고 란미 활동가 혼자 일하면서 너무 바쁘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됐죠. 전에까지만 해도 활동에 관심 없었어요. 센터 후원금으로는 진짜 집세·유지비 할 뿐이니까, 일 년에 한 번씩 천만 원 정도 모으기 위해 <후원의 밤> 행사를 안 하면 운영이 안 돼요. 

 

- 여러 가지 일은 어떤 일인가요?

노동청에도 가고, 산재 신청도 같이하러 다니고, 중국 사람들 상담 통역은 거의 80%는 내가 했을 거예요….

 

-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다른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미등록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더 많이 얘기해줄 수 있으니까 이렇게 활동하려는 거죠. 미등록은 전혀 정부 손길이 안 가는 사람들이죠. 결혼해서 왔던 분들은 다문화센터에서 지원하지만,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다르죠. 아이 키우는데 가정통신문을 봐도 이해를 못 해요. 한글 잘 알고, 한국말 잘하는데도요. 우리는 물어볼 데가 없죠. 그래서 모르는 게 있으면 무조건 이주센터에 연락해요. 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라 사람들이 쉽게 무시를 못 하는데, 한국말을 잘 못 하는 사람들은 진짜 차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 바라는 점은? 

도움 줄 수 없는 사람들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농장에서 일하는 분들, 공장도 아닌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허가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일하는 분들이 제일 기억에 남죠. 노동청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우리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데, 일당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중간에 브로커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세 명씩 걸친 사람들은….

우리는 최저임금 못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최저임금뿐만 아니라 최소한 기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숙사 같은 주거 문제도 중요하고요. 

‘노동자는 하나’라지만 따로 가는 것 같아요. 센터 초기부터 이주노동자들 활동을 조직적으로 하자고 했는데 10년을 해도 안 됐잖아요. 큰 노조, 큰 조직에서 작은 단체랑 함께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어요. 집회하거나 성명서 내고 할 때 큰 단체가 함께하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어요. 이주노동자 투쟁을 한국인들이 지지하는구나, 그렇게 사람들한테 알려지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민주노총경북본부 20년사 토론회에 다녀왔는데, 그런 곳에 가서 조금 들으니 사람이 확 달라지는 것 같았어요. 지금 이래선 안 되고, 어떻게 방법을 찾자고 하잖아요. 뭔가 방법이 달라지면 좀 안 좋아지겠나, 그런 기대도 생기죠. 이런 걸 진짜 다 같이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어디 가서 듣고 싶어도 이런 토론회는 평일에 하잖아요. 일요일에, 우리가 쉴 수 있을 때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어요. 

10년 동안 더 잘 된 것도 없고, 최저임금 오른 건 이주노동자 때문에 오른 것도 아니잖아요. 크게 안 바뀌었잖아요, 전체적으로 오르니까.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이라도 받게끔 연대하는 게 민주노총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노동자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10년 동안 해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낮은 곳부터 시작해서 같이 끌어가자고 해야죠. <끝>.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