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어머니가 성인 장애인 자녀와 ‘동반 자살’을 했다. 일부 시민들은 “돌봄 고통을 이해는 하지만 장애인 자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냐”며 부모의 무책임함을 비판하는 사람도 꽤 많다. 더 나아가 ‘동반 자살’이라는 단어도 타당한 것이 아니라며 살해라고 했다.


정신건강 영역에서 사회정의는 법적인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사회정의 상담에서는 사회문제로 발생되는 사람들의 고민을 접할 때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우리 고유의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누구나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으므로 항상 전후 맥락과 삶의 과정, 문화적 배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어떤 행위는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서 나타난다고 바라보는 학문이 사회심리학이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도 개인차가 나타나는 것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결국 사회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진짜 나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발달단계에 따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부분이 아마 복합적으로 얽혀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개념화하기 어렵겠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섞여 나를 구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성 구성에서 문화 차이를 살펴보면 서유럽이나 미국에선 생활의 기본단위가 개인이고, 독립적인 판단과 자율적인 삶을 일군다고 한다. ‘독립적’ 자기 문화를 갖고 생활하는 이들은 타인과 상호 교류하는 과정에서 경계가 명확하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출한다.

그러나 ‘상호의존적’ 자기 문화권에선 타인이나 가족,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독립된 성원이 아닌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써 부여된 역할과 의무를 수행하고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게 된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자기 구성에 관여하는 정도의 문화 차이를 살펴보는 뇌영상 장치를 이용한 연구(Zhu et al., 2007)에서 밝혀진 결과가 흥미롭다. 성격 형용사를 제시했을 때 자신에 대한 것인지, 엄마에 대한 것인지, 타인에 대한 것인지 판단하도록 하고, 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로 복내측전전두엽을 촬영했다.

그 결과 서양인에게 복내측전전두엽 영역의 활성화는 자기 관련 판단을 할 때만 나타나지만, 중국인의 경우 자기는 물론 엄마를 판단할 때에도 활성화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중국인에게 엄마가 자기의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생체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인과 미국인을 대상으로 집단주의자와 개인주의자를 구분하여 측정했을 때도 국가 간의 차이는 없었지만 자기성의 차이는 나타났다(Chiao et al., 2009).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자기성, 자기를 구성하는 연구’에서 이미 문화에 따른 자기성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되었고, 관련 이론도 상당하다. 이런 결과를 볼 때 한국의 문화와 정서는 상호의존적 자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는 사회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엄마들은 자녀를 나의 한 부분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특히 장애 아동을 양육하거나 성인 장애 자녀와 동거할 경우 그 책임과 역할이 엄마에게 집중될 경우가 많다. 엄마들은 자신의 삶을 억압하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과도한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자. 모든 학교와 사회복지시설기관이 문을 닫고 엄마는 오롯이 혼자 육아와 돌봄을 감당해야 했다. 내 경우도 몇 주 전 장애인부모회에서 안부 전화와 식품 선물 한번 온 것 빼고는 공적인 기관 그 어디서도 연락 온 적이 없었다. 이렇게 고립무원 상태에서 발달장애 특성상 다양한 행동이 나타나고 반응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될 경우 엄마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죽었다. 누가 우리를 비판할 수 있을까?

매년 부모가 장애 자녀와 동반 자살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늘 부모는 죄인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왜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 건가? 삭발하고 무릎을 꿇고 수없이 진정을 넣어도 왜, 왜 우리는 자살하고 장애인은 부모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작년에 “어머니 우리를 죽이지 마세요”라는 편지를 읽었다. 나는 슬펐다. 아주 많이 슬펐다. 난 살고 싶다.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우린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자녀보다 하루만 더 살다 죽는 것이 꿈이다”.

2016년 영국 연수 때 있었던 이야기이다. 돌봄자네트워크라는 기관에 가서 돌봄자에 대한 지원정책과 캠페인 방법 등을 상세히 질문하다가 네트워크 구성원 다수가 장애인 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행 중의 한 명이 우린 “자녀보다 하루만 더 살다가 죽는 게 꿈이다”라고 했더니, 그쪽 실무자가 왜 그런지 이해를 못 했다. 우린 통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재차 설명했지만, 그들은 성인 자녀에 대한 부모들의 부양 부담과 돌봄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무 살이 되면 당연히 성인기 맞춤 지원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문화, 환경적 배경 차이가 크다.

2018년 스웨덴 연수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가활기관을 방문했다. 가활센터는 장애인을 일상적으로 지원하는 이가 센터에서 재활이나 작업 치료를 배우고 익혀서 장애인에게 일상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관이었다. 그런데 스웨덴에 머무르는 한국인 중에 장애 자녀가 있는 경우 가활에 만족하지 않고 인근 폴란드로 가서 직접 물리치료를 받고 온다고 했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몸의 손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치료를 통해 고쳐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분명히 한국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환경, 제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회정의와 인권과 연대를 생각한다. 사회에서 차별받고 사회환경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시민들의 연대는 없는 건가? 아주 정치적인 이슈 외에, 나에게 이익이 오는 일이 아니면 관심 없는 사람들이 참 야속하다. 내 옆집, 이웃의 삶은 어떠한가? 부모 사후 장애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가르친 장애 아동이 어른이 되어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우리 사회는 왜 하지 않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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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자녀를 키우는 것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장애 부모만의 특별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이 축복이 되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타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 그 반대로 지속적인 돌봄과 양육 스트레스 앞에서 엄마는 무너질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이 개인 차원에 머무르고 개인의 역량으로 인식되면 곤란하다. 제도와 서비스가 안전하게 주어지고, 그것이 정당한 권리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사회와 환경은 부모들, 장애인 엄마들에게 가장 나쁜 선택을 하도록 지난 수십 년간 떠밀었다. 이제 그만하라. 시민사회의 연대는 사회적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연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인의 특성을 더 많이 고려해야 할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는 더 큰 기회를 주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변화하라.

이제라도 장애인 가족의 역할과 기능을 더 많이 고려하고, 발달장애인의 원활한 사회통합을 위한 가족 지원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정의와 인권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나쁜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진짜 사회정의’를 논하라.


 

글 _ 김신애 울진사회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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