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서태지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나는 난생처음 ‘시위’라는 것에 참가했다. 당시 서태지가 발매했던 7집 앨범에 실린 <Victim>이라는 노래 때문이다.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태아 성감별 낙태를 비판하는 곡인데, 가사가 ‘선정적,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팬들은 표현의 자유를 고려하지 않은 형평성 없는 판정이라며 항의했고, 전국 곳곳에서 모여 시위를 벌이고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판정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서명을 모으고 번화가에서 플래시몹과 행진에 참여한 일들이 내게 무척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하지만 그 후로는 거리로 나가 본 적이 없다. 인터넷 기사 댓글로만 나의 의견을 표현했고, 눈물을 흘리며 피켓을 든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딱히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나는 우연히 사람들과 함께 청도 삼평리를 찾았다. 그곳엔 자신들의 고향에 설립되는 송전탑에 대해 항의하는 어르신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있었다. 날은 너무나 덥고 습했고 비도 조금씩 내렸다. 수많은 현수막은 이곳 어르신들의 절박함을 나타냈고 수없이 늘어선 경찰차들은 그 자체로 우릴 위축시켰다. 공사 현장 주변은 까만 막으로 가려져 있었고 어르신들은 입구에 앉아 지나가는 한전 직원과 경찰을 향해 자주 언성을 높이셨다. 그날은 많은 개신교회 목사님들과 교인들도 현장에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이곳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설명하셨다.

활동가들은 이곳에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이라고 했다. 공사 현장으로 장비나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선 함께 입구를 지킬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의 까맣게 그은 피부는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칠 법도 한데,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활력이 있었다.우린 다 함께 점심을 나눈 뒤 설거지를 돕고, 목사님들과 함께 기도회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입구를 막고 있기 때문인지 헬기로 자제를 운반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기도회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멈추어 달라 부탁했건만, 헬기의 엄청난 소음은 기도회의 맥을 계속 끊어놓았다. 기도회가 끝날 무렵, 어르신들이 앞으로 나와 이곳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무렵, 경찰관과 한전 직원들은 다시 공사를 진행했다. 그들은 현장으로 중장비가 들어가야 하니 비켜달라 요구했으나 목사님과 활동가들은 어르신들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라도 시간을 달라며 언성을 높였다. 현장의 분위기는 무척 험악했다. 결국, 전경들은 방패를 들고 줄을 지어 들어와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주변을 에워쌌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결국 20여 분의 시간을 약속받았고, 전경들도 물러갔다. 종교인이나 기자 등이 없을 때는 경찰들이 이 정도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전경들의 진압으로 생긴 몸의 상처를 우리에게 보이며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렇지만 거대한 중장비는 여전히 우리 앞에 서 있었고, 마을버스가 한참이나 통행을 방해받기도 했다.약속한 시간이 끝나고 다시 전경들이 들어왔다. 

묵직한 발걸음과 내 바로 뒤에서 들리던 방패와 땅이 부딪히는 소리를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경찰은 우리에게 비켜주길 요구했고, 나는 잠시 앉아 있다 결국 순순히 뒤로 비켜났다. 하지만 많은 활동가와 목사님은 끝까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때론 격렬하게 몸으로 부딪히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매체를 통해 접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전경보다 훨씬 수가 적었고, 상황은 빠르게 끝이 났다. 중장비는 현장으로 들어갔다.지금 보고 듣는 사실만이 전부는 아니기에 나는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현장에서 만난, 일면식이 있는 한 기자분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의 어르신들이 분명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처음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한전 직원들과 경찰들에게 폭언을 퍼붓던 어르신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드센 성격이실까? 굳이 저렇게 거친 행동으로 응해야 할까?’ 그러나 내가 떠날 때쯤 본 것은, 전경들과의 대치 후 한 할머니께서 조용히 흘리시던 눈물이었다. 단 하루 이곳을 찾아 전경들을 본, 젊은 나도 이렇게 무섭고 떨리는데, 당사자로서 반복되는 이 상황이 어르신들은 얼마나 힘들고 지치실까. 거칠고 공기 탁한 도로 위에서 견뎌내는 하루하루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뉴스 속 몸을 사리지 않고 거칠게 저항하던 이들도 나와 똑같이 두려워하고 힘들어 한다는 것을 난 왜 이제야 아는 걸까.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활동가들, 목사님들이 경찰과 한전 직원들에게 행하는 거친 행동과 언행 역시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대적해 서 있는 것은 거대한 공권력, 원전과 관련된 경제 논리이다. 결국엔 전경들에게 속절없이 끌려나가던 이들의 행동을 일방적인 폭력으로 볼 수 있을까? 

물론 폭력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절박하게 저항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어떻게 ‘이성적인’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보지 못했더라면 현재 단식 중인 김영오 씨가 세월호 사고 당시 현장을 방문한 대통령 앞에서 욕설을 내뱉은 것을 두고 비판하던 종편 방송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다.끝없는 항의와 대립이 반복되는 하루를 겪으며,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도 힘들 거 알아요. 하지만 끝까지 저항해보는 거예요.” 

10년 전 내가 사람들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외친 주장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문제를 알리고 나 역시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저항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킬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어쨌건 나는 이제 편하게 방 안에 앉아 키보드로 이들에게 ‘빨갱이’라는 말 따위를 쉽게 내뱉는 누리꾼들에게 전보다 더 많은 분노를 느낄 것 같다.(기자제휴 = 뉴스꼴리지, 글쓴이: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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