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호미곶 등대, 호랑이 꼬리를 품은 천하의 명당



동해를 따라 밋밋하게 내려달리던 해안선이 영일만을 이루면서 낚싯바늘처럼 꼬부라져 나온 곳, 우리나라 남녘땅 가운데 제일 동쪽으로 돌출한 땅끝,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먼저 아침 해를 맞이하는 곳이 호미곶이다.

한반도를 짐승에 비유할 때 호미곶은 그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비하의 뜻을 담아 ‘토끼꼬리’로 묘사했고 해방 후에도 그 표현을 한 동안 답습해왔다.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1856~1935)는 1903년 발표한 논문 ‘조선산악론’에 조선의 형세를 두고 ‘토끼꼬리 형국론’을 펴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탈리아는 지형이 장화와 같고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것과 같다. 전라도는 뒷다리에, 충청도는 앞다리에 황해도에서 평안도는 머리에, 함경도는 어울리지 않게 큰 귀에, 강원도에서 경상도는 어깨와 등에 각각 해당한다. 조선인들은 자기 나라의 외형에 대해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중국)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 게 마땅한 일이다’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 같은 생각은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
 


일찍이 조선풍수의 비조, 격암 남사고(1509~1571)는 한반도를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하면서 이곳을 범꼬리(虎尾登)로 맨 처음 불렀고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동해에서 어느 곳이 가장 튀어나왔는지를 확인하려 죽변곶(용추곶)과 호미곶을 7차례나 오가며 조사하여 호미곶을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으로 확인하고 호랑이 꼬리라고 기록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고토 분지로가 제기한 토끼꼬리 형국론의 조선비하를 간파하고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소년' 창간호의 ‘봉길이 지리공부’라는 난에 한반도를 호랑이로 묘사하면서 이곳을 ‘호랑이 꼬리’ 라고 이름 하였고, ‘조선상식’ 지리편에 영일만 일출을 조선 10경의 하나로 꼽았다.

그때는 말을 기르는 목장(장기 목장성)이 있었을 뿐 풍토가 사납고 거칠어 ‘샛바람에 말이 얼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몹쓸 땅이었다. 호미곶 구만리 앞바다는 그 지명이 말해주듯 정치 문화의 중심부인 서울에서 ‘구만리’처럼 느껴지던 변방이었다.

일본제국의 불빛, 호미곶등대 건립예산은 일본이 아닌 조선이 부담했다. 이는 쾌응환의 좌초가 조선의 항만시설이 부실하여 벌어진 참사라며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강압에 밀렸기 때문이었다.

1908년 12월 16일자 대한제국 정부의 관보에 ‘동년 12월 20일에 동외곶(冬外串)에 불을 밝힌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호미곶 같은 말을 쓰지 않고 ‘동외곶’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등대가 완공된 지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1910년 5월 30일자 황성신문에 ‘등대 간수 피살’이란 기사가 등장한다.

「경북 영일만 등대 일인 간수는 작일 해적에게 피살하얏다고 모처에 전보가 래하얏다더라.」

해적은 누굴까? 동해안 영일만에 웬 해적?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직전 조선 의병의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등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실제로 전남 완도 당사도등대에 인근 소안도 의병들이 들이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건축미가 뛰어나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로 꼽히는 호미곶등대는 철근 없이 벽돌로만 지은 팔각형 연와조양식으로 6층높이 26.4m, 하부둘레 24m에 이른다. 이런 축조 기술은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붉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고 석회 모르타르를 발라 우아함을 더하였다. 훗날 석회를 벗겨내고 시멘트 모르타르를 덮어씌우고 흰색 칠을 했으나 견고함이나 미학적 가치는 여전히 빼어나서 근대 건축사의 살아있는 최고 학습장이라 할 수 있다.

또 상부는 돔형 지붕 형태에 8각형 평면이 받치고 있으며 하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진다. 벽돌을 쌓아 그 높은 건물을 축조했기 때문에 안정성을 위해 당연히 하부를 펑퍼짐할 정도로 넓게 만든 것이다. 수직선상의 곧고 우람한 기상을 살리면서 안정감도 추구하는 매우 어려운 선택을 조화롭게 소화했다는 평가이다.

호미곶등대는 근대 문화유산에 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인 1982년 경북 지방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지방기념물 등급으로 취급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근대 명품 건축물이다.




 

 



호미곶등대의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돼 있다.
목재로 된 등대 외부 출입문에는 금속장식판이 붙어있는데 워낙 두껍게 흰색 칠이 되어있어서 문양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금속장식판과 같은문양의 금속장식판이 등탑 내부 출입문에도 붙어있다.






 





호미곶등대 등탑내부는 장중하고도 기품이 있다.1층으로 들어가면 작은 회랑과 창문 그리고 등탑 내부 출입문이 있다. 1층 현관 등탑 목재출입문에는 황금색 일본 성곽문양 금속 장식판이 붙어있다.

6층으로 된 등대 내부의 각 층 천장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자두)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오얏꽃을 철판으로 가리고 자신들의 국화 문장을 새겼다. 해방이 되어 철판을 떼어내자 아무도 몰랐던 오얏꽃이 제 모습을 드러내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문양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호미곶 등대장을 역임했던 박윤봉 옹은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비옷같이 생긴 하오리라는 일본 정복(正服)의 등 부분에 그려진 ‘기부노고모’ 무늬라는 것이다.

등대 점화 시기는 경술국치 전인 1908년 12월로 아직 미약하게나마 국권이 살아 있을 때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등대건설을 진두지휘한 주체는 일본인이다. 다만 설계는 프랑스인, 시공은 중국인 기술자가 했고 한국인들은 돈만 내고 화물선에 벽돌을 실고와 부두에서 날라 짓는 노동력을 제공했을 뿐이다. 우리는 오얏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다르게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등탑 내부의 압권은 조립식 주물철제 계단이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나선형 층계는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품격을 지나고 있다. 등롱까지 올라가는 6층 철제계단은 고난의 108계단이기도 하다. 팔각 바닥의 고급 나뭇결도 그대로 살아 있다. 진정 ‘100년 전통의 명품 등대’이다. 등탑 5층 내부에는 목제 수납장이 붙어 있고 목제 벽기둥이 드러나 있다. 
 


 




 

등탑의 꼭대기는 등롱이다. 등롱 속 등명기의 밝기는 30만 촉광으로 22마일(35.2㎞)까지 불빛이 나가며 고동소리는 30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등롱 밖으로 나가면 호미곶 영일만 일대가 훤히 보인다. 참으로 장쾌한 풍경이다. 1908년~2001년 까지 사용된 옛 등롱은 지금은 은퇴하여 등대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 기사 및 사진제공 : 도영주 구미치과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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