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2살, 9살, 6살 삼 남매 엄마입니다.


내리리에 살고요. 내리리에 이사 온 지는 겨우 3년째인데, ‘내리리’라는 이름을 좋아해요. ‘마음을 낸다, 탈것에서 내린다’ 이런 의미로요. 옛말로는 그냥 안마을, 안실, 안골… 이랬겠죠?

옆 동네 이름은 중구리예요, 중간에 있는 언덕. 이름이 직관적이죠? 대구에 앞산이 있는데, 진짜 지명도 앞산이에요. 이런 이름 좋아합니다, 그냥 누군가 눈에 보이는 대로 막 부른 듯한 이름. 이름부터 홀가분한 느낌이에요!

아무튼, 내리리는 정말 대로에서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와야 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양지바른 곳에 50여 가구가 모여있어요. 예전에는 200가구가 살기도 했대요. 마을 가운데로 개울이 흐르고, 작은 산이 있고, 너른 들판이 있고,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런 풍경의 마을이에요. 비닐하우스도 있고, 뭘 만드는지 모르지만, 공장도 하나 있고, 돈사 우사도 있고요.

저는 강둑 너머 포항제철이 보이는 곳에서 유년기를 보내서 그런지, 지금의 풍경이 참 좋습니다. 여기 살면서 삼 남매들에게 들려주는 옛이야기와 그 외 제가 하는 육아 관련 공부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그냥 수다로 주절주절 써 내려갈게요.

 

ⓒ 내리리 영주.

​첫째 낳고 제가 롤 모델로 따라다닌 언니들이 발도로프 인형을 만들더라고요. 그 언니들 집에 가면 참 따뜻하고 포근하고 든든했어요. ‘그래 나도 이런 엄마가 되어보자!’ 하며 열심히 따라 해봤지만, 육아도 집안일도 ‘넘사벽’이었어요.

저는 좀 괴로웠지만(‘안 되겠다 나는’), 그래서 괜히 부모 원망에 빠지기도 했지만(‘애초에 기본이 없군!’), 언니들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일러주더라고요. (대인배 언니들!❤)

언니들은 너무 애쓰지 말라고 꾸준히 조언을 해줬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떻게 애를 안 쓰고 산다는 겁니까!’ 울부짖고 싶었어요. 갖은 애를 썼죠, 갖은 실패를 하고. 그러는 와중에 애는 셋을 낳고, 이사는 6번을 하고. 그리고 올해 엄마 12년 차입니다. 여전히 애쓰고 있고요.

 

지난주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상대방 과실 100% 후미 추돌사고. 제가 백미러로 차가 달려오는 걸 봤어요. 부딪히고 내 몸이 흔들리고, 차가 멈추고, 보험회사와 짝꿍에게 전화하고…. 사고 시각이 오후 2시 30분경이었는데, 그때 제 마음은 오직 하나였어요.

‘4시에 아이들이 오는데, 그전에 어떻게 집에 가지?’

사고 난 지점에서 국도로 40분은 달려야 하는데, 그때는 택시를 탈 생각도 못 하고(지역이 달라지니), 다친 몸과 마음으로 렌터카를 받아 운전해서 집으로 갔어요. 가는 동안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더라고요. 그래도 오로지 ‘아이들에게 가야 한다!’ 였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아이들은 늘 보던 시간에 엄마가 오니 사고가 났다 해도 ‘그런가 보다’하고, 원래 타던 차보다 더 크고 신형인 차에 정신이 팔리더라고요. 그리고 그 밤을 보내고 났더니 온몸이 아파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왜, 내 몸을 먼저 살피지 않았을까요? ‘엄마 마음이 그렇지…’라고 말하기엔 좀 아쉬운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다음에는 꼭 병원부터 가보려고요. 아이들은 이웃에 좀 봐 달라 하고요. 어려우면 셋이나 되는데 아빠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라고 하려고요. ​

입원하고 병원에서 두 밤을 보내면서, ‘이제 퇴원을 하면 집안일을 많이 많이 나눠야겠다. 나 아니어도 밥과 빨래 해결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고 싶어졌어요. 퇴원해서 며칠 만에 집에서 식구들과 저녁을 먹는데, 참 좋더라고요. (원래는, ‘다 먹었어? 얼른 먹어!’ ‘뭐, 좀 더 먹어’ ‘골고루 먹어’ 하고 치우기 바빴죠.)

그 좋은 기분으로, 식탁에 좀 더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해줄게

다 알지? 알아도 들어봐

놀부가 왜 부자게?

흥부 놀부가 원래 있는 집 자식이었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놀부가 부모님 재산을 다 독차지해버린 거야

흥부는 원래 공부만 하던 선비였는데, 가진 게 없으니까 뭐라도 해서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했는데, 착하기만 하지 일머리가 너무 없어

그래도 그냥 계속 노력은 했지

아무도 원망 안 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도 식구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없었던 거야

왜냐면 자식이 열 명이야!

식구가 열두 명

우리 집보다 더 작은 집에 열두 명이 살고, 이불도 하나였대

우리 집은 사람마다 자기 이불이 있잖아….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물론 경상북도 사투리 모드였어요) 

그때 눈을 반짝이며, 제 이야기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찡~하더라고요. 저는 불평불만이 많은 스타일인데요, 투덜거리면서 오래 살고 싶어졌어요. 

사고로 여러 가지 손해도 생겼지만, 돌아서면 밥해야 하고, 세 아이의 민원을 해결하는 일상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생에 대한 저의 열망과 의지를 딱 마주 보게 해준 ‘선물’로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좀 자라서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고, 알아서 읽기를 바랐는데, ​이제 다시 들려주려고 합니다. 시간 내서 들려주려면 일이 되니, 간식 먹듯 자주자주 잠깐잠깐 들려주려고요.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흥부가 복을 받아 풍요로워지는 부분까지만 이야기하고, 뒷이야기는 통학버스 타는 곳에서 시간이 되면 들려주는 것으로 하고, 끊었습니다.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들려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더 재미있어하더라고요!
 

말의 문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있고, 그걸 들어주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들어주는 봉사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말의 문학은 존재할 수 있고, 또 생명을 잃지 않고 이어갈 수 있지요. 그래서 동화나 옛이야기는 들어주는, 봉사해 주는 사람들이 주인입니다. 왕입니다. 그들을 잘 섬겨야지요.

-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 문학동네, 10쪽

 

이재복 선생님은 책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에서 ‘옛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남을 위해 들어주는 봉사하는 마음의 씨앗이 몸에 심어진다’라고 했어요.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 제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실 늘 제가 들려준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좋은 양분이 되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고요. 엄마가 그런 바람은 품을 수 있잖아요? 하하. ‘아이들이 들어준다, 그게 내 안에서 어떤 힘을 솟게 한다’는 것은 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간식 먹듯, 짬짬이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들, 앞으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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