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다운 씨가 학교를 자퇴하고 지역의 여러 학교 앞에서 들었던 대자보의 제목은 이러했다.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렇기에 실을 끊겠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실의 묵직함이 불현듯 감지될 때가 있다. 정해진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발적 움직임이 아니라 실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처박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꼭두각시의 그림자와 함께 불쑥 엄습한다. 실을 끊은 꼭두각시는 무엇이 되었을까, 꼭두각시가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같은 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인 김민섭 작가는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대학을 떠났다. 이후 대리기사로 일하게 된 그는 이 사회를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으로, 모두가 그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 ‘대리인간’으로 살아가는 <대리사회>로 정의했다. 무대를 뛰쳐나온 꼭두각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더 견고하고 노골적인 실뭉치였다. 이는 비단 ‘을’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사회는 수많은 크고 작은, 높고 낮은, 정의롭거나 탐욕스러운 꼭두각시들로 지탱된다.


만들어진 욕망을 인위적인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만이 허용되는 현대 사회는 필연적으로 꼭두각시들을 생산한다. 다른 무언가를 대리/대표하는 삶은 반드시 공허함을 낳고, 그것은 더 많은 사적/공적 성취와 도착적 쾌락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 과정은 또다시 많은 대리인을 필요로 하며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당연히 문제의 해결은 또 다른 대리인에게 맡겨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행렬이다. 많은 사람을 대리하는 정치인과 그의 업무와 일상을 지원하는 비서, 그를 대변하는 변호인을 연결하는 고리도 그 속에 있을까.


사과를 먹고 싶을 때 해야 할 자연스러운 행동은 사과나무로 가서 사과를 따거나 주워 먹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과를 먹고 싶으면 우선 학교에 다니고,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비슷한 과정을 거친 우리의 대리인이 만들어낸 사육된 사과를 구매해야 한다. 돈만 주면 원하는 (질 낮은) 식품과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겉보기에 손쉬운 삶은 괴이한 다단계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유사한 왜곡적 패턴을 따른다. 자연스러운 물리적, 생물학적 욕구와 몸을 써서 그것을 충족시킬 기회 양쪽이 모두 거세된 사회에서 남은 선택지는 꼭두각시가 되는 길이다.


꼭두각시의 몸은 그것을 조종하는 실, 그리고 무대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을 끊는 행위가 즉각적 해방을 가져다줄 수 없는 이유다. 사회는 실로 묶어 일일이 까딱거릴 필요가 없는, 스스로 모든 곳을 무대로 만들어내는 주체적이고 효율적인 자동기계를 더 선호할 것이다. 실에 매달린 채로 허공을 헤매었던 그 몸은 이미 근육을 상실한 채 흐물거린다. 체화된 인위적 움직임도 잘라낼 수 없는 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쇠약한 몸은 제 본능을 되찾아 마침내 실을 끊어내고 말 수 있을 것인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무대를 떠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꼭두각시가 꼭두각시에게 묻는다.



 

글_ 김혜나 대구대학교 연구중점교수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