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모든 전기가 사라진다면?

 

"서바이벌 패밀리" 포스터 이미지

1_ 가족영화로 풀어낸 EMP 아포칼립스의 풍경


<서바이벌 패밀리>의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한국에는 2004년 작 <스윙 걸즈>로 꽤 알려졌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준수한 작업을 해내고 있다. 그중 2017년에 선보인 <서바이벌 패밀리>는 우리가 흔히 떠올릴 법한 일본 가족 코미디 영화와 재난 영화를 잘 조합해 편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만만하지 않은 내용을 녹여낸 수작이다.

기본적으로 <서바이벌 패밀리>는 전형적인 일본 영화다.

즉, 과장된 인물들의 표정과 꽥꽥 질러대는 소리, 과해 보이는 슬랩스틱 개그와 조금 억지스러운 전개 및 예정된 결말 등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이야기다. 일본 영화 즐겨 보는 이들이라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정석적인 역할을 맡고 지나쳐간다.

하지만,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그런 전형성 가운데에서 늘 예외적인 요소들을 첨가해 맛깔나는 영화들을 만들어 왔고, 특히 <서바이벌 패밀리>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한국이라면 포항 지진 후) 일본 사회 내에서 다시 점화된 재난 상황에서의 생존과 성찰에 대한 지점을 제대로 버무려낸다. 특히, 공상과학영화나 공포영화의 소재로 흔히 활용되면서 오히려 평범한 드라마 장르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한 소재를 활용하는 센스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여름 휴가철 가족과 함께 방구석 바캉스를 보낼 이들에게 추천해본다.


2_ 가족모험물의 정석


한국과 일본의 전형적인 세대갈등 가족이 <서바이벌 패밀리>의 주인공들이다. 스즈키 가족 중 남편이자 아버지인 요시유키는 전형적인 일 중독 직장인으로 집에 들어오면 소파에서 텔레비전만 뚫어져라 보는 전형이며, 아들 겐지는 귀에서 헤드폰을 떼어놓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대학생이다. 딸 유이 또한 또래 아이들처럼 패션과 수다에 바쁠 뿐. 어머니인 미츠에는 그런 가족 틈에서 가정을 유지하는 지주이지만 힘겹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 전체에 정전이 찾아온다. 고지식한 요시유키는 ‘두 정거장’ 걸어서 출근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데에 충격을 받는다. 겐지와 유이 또한 가족과의 대화 대신에 손에서 놓지 않던 스마트폰이 아무 소용 없어져 공황 상태에 빠진다. 당장 미츠에는 전기가 나가 가족의 밥상을 차려야 되는 문제에 직면한다. 고작 전기가 나갔을 뿐인데 평범한 도쿄 중산층 4인 가족의 일상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서바이벌 패밀리" 영화 스틸 이미지
▲ “서바이벌 패밀리” 영화 스틸 이미지

정부와 공권력에 잘 협조한다는 외부의 시선처럼, 스즈키 가족을 포함한 맨션 주민들과 직장 동료들은 차분히 정전에서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출근하고 등교한다. 하지만 우리 일상이 이렇게 전기에 의존하고 있었나? 할 정도로 급격하게 문제들이 속출하고 마침내 스즈키 가족도 외할아버지 동네로 피난을 떠나기로 한다. 1,350km 떨어진 규슈의 가고시마가 목표. 처음엔 자전거를 타고 하네다 공항까지만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비행기가 움직이지 않는다. 오사카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가보니 도쿄와 매한가지다. 그 과정에서 가족은 갈등하고 화해하기를 거듭한다. 중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직간접적 도움을 받아 가며 마침내 스즈키 가족이 108일이 걸려 가고시마에 도착하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서바이벌 패밀리>는 평범하지만 관계가 단절된 현대 가족의 초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코미디의 얼개를 갖췄지만, 현실의 내 가족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풍경이 영화의 1/3 이상 전반부 내내 펼쳐진다. 미증유의 위기 상황임을 직감한 미츠에가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고지식한 남편과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자녀들은 떼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기만 한다. 물론 가족물의 법칙처럼 고생을 겪으면서 가족은 서서히 변화해간다. 초반엔 영화를 보던 관객이 들어가서 한 대 꿀밤이라도 쥐어박고 싶어지던 가족들은 점차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고쳐 나간다.

협력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에 서로 역할을 나누고, 가족이기에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도시 생활자라 직접 생산하는 삶에 익숙하지 못해 서툴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낀다. 영화 시작과 막판의 스즈키 가족은 같은 이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모한다. 그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데에서 감독의 역량이 발휘되는데,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충분히 믿고 볼 만한 연출력을 선보인다.

전형적인 이야기 전개로 대충 짐작이 가능한 설정들이 펼쳐지지만 그렇게 억지스럽지 않다. 몇몇 소품들이 적절히 활용된다. 자전거, 가발, 사진, 재봉틀 같은 것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꼼꼼히 찾아보는 것도 작은 재미일 테다. 한편 중간 여정에서 가족을 기다리며 스즈키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는 시골 노인이나 영화 초반 맨션 위층에 사는 독거노인의 일화는 재난이 없는 시기라도 소외된, 그리고 재난으로 인해 더 고립화되는 노인 문제를 조명하는 울림이 있기에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권한다.


3_ 현실적인 재난물


가족이 같이 볼 수 있는 휴가철 영화로 추천하지만, <서바이벌 패밀리>가 담고 있는 재난물로서의 효용이 무엇보다 이 영화를 권하는 우선 목적이다. 대개 서구 영화에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담은 ‘아포칼립스’ 장르물로 분류될 <서바이벌 패밀리>의 세계는 가족영화의 외관을 통해 보다 진입 장벽 없이 볼 수 있는 장점을 갖췄다. 그렇지만 일본 영화 특유의 막무가내 코미디 요소를 벗어나 조금만 영화 속 풍경을 신경 써 본다면 <서바이벌 패밀리>가 아주 충실하게 재난/종말물(아포칼립스)의 기본 요소를 빠짐없이 구현함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종말물로 불리는 아포칼립스 장르는 요즘 유행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과거 냉전 시절의 공포를 함축한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코로나19 창궐 이후로 주목받는 전염병 아포칼립스 등 그 배경 소재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공통점은 기존 사회 질서의 붕괴와 적자생존이 당연시되는 가혹해지는 환경, 그리고 그 위기 속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문제를 헤쳐 나가는 기발한 발상 등이다.

 

"서바이벌 패밀리" 영화 스틸 이미지
▲ “서바이벌 패밀리” 영화 스틸 이미지

본작은 그중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기계와 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되는 “EMP” 아포칼립스에 속한다. 좀 규모가 큰 정전 같지만, 그 실제적인 파괴력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이 상대적으로 희박한 좀비나 핵 전쟁, 외계인 침략에 비교해 훨씬 압도적이다. <서바이벌 패밀리>는 말 그대로 평범한 가족이 전기로 구현된 현대 문명 시스템이 무너진 가운데 생존을 위해 난관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관객에게 전시하듯 보여준다.

전기가 끊어지니 전력을 활용한 사회체계가 모두 정지된다. (영화 속 설정은 단순한 정전이 아니라 전기를 활용하는 체계 전반이 먹통이 되는 EMP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가깝다) 모든 교통수단이 정지되고 인터넷, 라디오, 텔레비전, 신용거래가 중단된다. 수도와 가스도 멈춘다. 고층 맨션에 사는 중산층 가정인 스즈키 네 식구는 당장 마실 물과 먹을 음식부터 구하기 어렵다. 물건을 사려 해도 일단 물량 자체가 부족하고 교통수단의 부재로 운송이 마비된다. 다른 유사 장르 영화에 비해 폭동이나 약탈은 상대적으로 적게 묘사되지만 굶으면 칼 든다고 온건하게 조명될 뿐 기존 사회질서는 금시 허물어진다. 영화는 ‘0일 차’, ‘00일 차’라는 자막으로 그런 붕괴의 과정을 긴장감 있게 잘 풀어내고 있다.

도시공간은 압도적인 에너지 사용량과 비 도시공간에서의 생산물 유통으로 지탱되는 구조다. 가족은 전기 조명이 중단되면서 오랜만에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에 감탄하지만 도시 공간에서는 생존조차 위태로운 현실에 평소엔 무관심하던 외가로 피난을 결정한다. 스즈키 가족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으로 설정된다. 자전거를 모두 보유하고, 어머니 미츠에의 기지로 비상금 보유 및 물물교환으로 물과 식량을 확보한다. 아들의 재치로 물 대신 자동차 배터리 보충액을, 식량 대신 반려동물 통조림으로 허기를 채우고, 우연히 길에서 만난 서바이벌 활동 경험이 풍부한 다른 가족에게 필수 지식을 얻기도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리던 존재들이 사실은 서로 연관되어 정교하게 조직된 현대 사회 시스템의 일환이고, 조금만 삐끗하면 위태로워진다는 전율에 휩싸이는 순간이 영화를 보던 중 종종 드러날 것이다.

온갖 위기 속에서 그나마 주인공들에게 구원이 되는 건 ‘아날로그’ 적인 유물들이다. 자전거는 영화 대부분에서 스즈키 가족이 트렁크를 끌고 정처 없이 걸어가는 다른 이들보다 그나마 나은 조건을 유지하게 해주며, 이제는 기억에도 아득한 시골의 수동 물 펌프는 이들에게 오랜만에 마음껏 안전한 물을 마시게 해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 염장이나 훈제로 보존식품을 만들던 지혜와 농어촌의 자급자족이 스즈키 가족을 포함해 도시를 탈출한 사람들에게 최후의 보루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다리가 없는 강에서 자체적으로 뚝딱 만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뗏목이나, 전기 없이 운행 가능한 증기기관차는 이 가족의 여정과 사회의 최소한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하는 배경들이다. <서바이벌 패밀리>는 한 번은 가볍게 가족영화로 보더라도, 한 번 더 생존 지식 교육용으로 자녀들과 함께 봐도 유용할 법하다.

 

4_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결국, 가족 모험영화의 정석대로 온갖 위기를 딛고 108일 만에 스즈키 네는 가고시마에 도착한다. 영화의 기본 내용이 마무리되고 마치 후일담처럼 전기는 돌아오고, 가족은 도쿄로 귀환한다. 하지만 가족의 관계는 비 온 뒤에 땅 굳듯 많이 개선되고 각자의 삶도 더욱 능동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의 분위기와 별로 안 맞게 느껴지는 엔딩송은 아쉽지만, 다시 전기가 들어온 도쿄 도심 풍경이 음악이 끝나면서 다시 불야성의 야경으로 변한다. 영화를 제대로 봤다면, 주인공 가족들이 겪은 모험이 뇌리에 남아 있다면, 그저 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해 보일 도시의 야경이 전기로 유지되는 현대 문명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 삶에 대한 고민을 마음속에 그려나가는 캔버스처럼 보이기 시작할 테다.

 

"서바이벌 패밀리" 영화 스틸 이미지
▲ “서바이벌 패밀리” 영화 스틸 이미지

※ 2018년 개봉작이지만 현재 VOD로 다운로드 구매해 관람할 수 있다.

 

 

작품 정보


서바이벌 패밀리 Survival Family, サバイバルファミリー

일본, 코미디·드라마, 2017

2018.01.18. 개봉, 117분, 전체관람가


감독 야구치 시노부

주연 코히나타 후미요, 후카츠 에리, 이즈미사와 유키, 아오이 와카나


1회 마카오국제영화제(2016) 경쟁

19회 우디네극동영화제(2017) 초청(개막작)

18회 전주국제영화제(2017) 초청(폐막작)

16회 뉴욕아시아영화제(2017) 초청

50회 시체스국제영화제(2017) 경쟁

37회 하와이국제영화제(2017) 초청

10회 부산평화영화제(2019) 초청

 

"서바이벌 패밀리"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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