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우리 자신이었을 소녀와 가족의 시간들

 

"남매의 여름밤" 포스터 이미지

1_ 추억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영화


‘여름은 액션이지!’를 외치며 코로나19 이후 침체일로에서 헤어나지 못한 극장가에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줄줄이 개봉하는 와중에 <남매의 여름밤>은 보기 드문 가족·성장영화로 늦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과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밝은미래 상 등 근래 한국 독립영화 중 상복으로는 남부럽지 않은 작품이지만 개봉 전망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극장을 찾을 관객에게 보여줄 경이로운 영화 속 풍경과 이야기는 ‘독립영화’라는 칭호가 오히려 진입 턱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놓치기 아까운 그림을 보여주기에, <남매의 여름밤>이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기를 바라는 사심이 녹아 있는 소개 글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겉보기에는 아주 단순하고 심심한 이야기 구조를 따른다. 여름 더위가 푹푹 찌던 어느 날, 소녀 옥주(최정운)와 아버지(임흥주), 동생 동주(박승준) 셋은 더부살이를 하러 별로 왕래가 없던 할아버지(김상동)의 오래된 교외 이층집으로 옮겨온다. 그리고 가정불화로 고모(박현선)가 도착한다. 할아버지 혼자 쓸쓸히 지내던 집은 갑자기 3대가 함께 사는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집으로 변모한다.

이 작품에는 어떤 사회적 발언이 크게 잡혀 있지 않으며 시대 구분도 모호하게 의도되어 있다. 대신에 감독의 유년 시절을 자전적으로 풀어내려 한 영화 속 세계가 여름 햇살처럼 환하게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할 긴장과 스릴 대신 <남매의 여름밤>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주 찰나의 여름휴가나 방학 같은 과거 시절의 추억담과 세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감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원형질이 아주 정교하게 구현된다.

대개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이것저것 욕심을 많이 내서 군더더기를 끼워 넣거나, 상업영화 흥행공식 틀에 맞춰 참신함 대신 어디서 본 듯한 전형적인 장면들 덩어리가 되곤 하는데, <남매의 여름밤>은 감독 자신이 말하지 못한 유년 시절 기억을 인상적인 첫 장편으로 완성했다.


2_ 현실 가족의 풍경들

 

"남매의 여름밤" 영화 스틸 이미지
“남매의 여름밤” 영화 스틸 이미지

옥주와 동주의 아버지는 사회 통념상 유능한 가장은 못 되어 보인다. 아내와는 헤어졌고, 짝퉁 명품 운동화 좌판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안정된 주거도 마련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족 내 폭력이나 술에 의지해 망가지는 캐릭터가 아니라 평범하고 정 많은 소시민이다.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었고 여러 독립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는 양흥주 배우의 연기력이 자연스레 돋보인다.

고모 또한 현실 부부처럼 자신의 처지와 생각과는 다른 결혼 생활에 지쳐 있다. 오빠에 대한 서운함과 잘 풀리지 않는 결혼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지만 옥주와 동주 남매에겐 부재한 어머니의 역할을 나눠 수행하기도 하고, 급조된 3대 가족 내에서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준다. 영화 제목의 “남매”는 옥주와 동주 남매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고모 남매간이기도 하다. 동네 슈퍼에서 맥주 캔을 홀짝거리며 남매 사이에 진솔하게 오고 가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명절 때 오랜만에 보고 금방 헤어져 놓치는 현실의 것들이다. 심지어 유산에 대한 각축조차 ‘악인 열전’이 아닌, 넉넉지 못한 평범한 실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에 가깝다.

할아버지는 건강도 좋지 않고 말수도 적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화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아마 아버지의 현재 모습과 비슷하게 익살도 있고 다정다감했던 것 같다. 할머니를 여의고 쓸쓸히 이층집에 홀로 남겨졌지만 젊은 날의 추억 같은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을 버리지 않고 꼭꼭 쟁여두는 우리 주변 어른의 모습 그대로다.

할아버지의 집은 할아버지의 생을 압축한 것처럼 느껴지고, 정성 들여 가꾸는 텃밭은 흐드러지게 울창해도 너저분하지 않게 관리되어 바깥세상의 힘겨운 삶에 지친 자식과 손녀 손자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역시 여러 영화에서 할아버지 역할 단골인 김상동 배우가 추억 속 가족 앨범 안의 할아버지 같은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남매의 여름밤" 영화 스틸 이미지
“남매의 여름밤” 영화 스틸 이미지

손자 동주는 성질도 있지만 쾌활하다. 누나 옥주를 무척 괴롭히기도 하지만 외로움도 많은지라 누나에게 자주 찰싹 붙고 싶은데, 옥주는 자기 문제로도 폭발 직전이라 동생을 귀찮아하기 일쑤다. 박승준 배우 역시 영화 속에서 ‘열연’한다는 표현이 아쉽지 않을 몇 번의 인상적 연기를 선보인다.

가족 3대 구성원이 모두 하나하나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특히 옥주 역의 최정운 배우는 <남매의 여름밤>의 주인공이자 감독의 영화 속 대리처럼 열연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집안 형편 뻔히 알면서도 쌍꺼풀 수술이 하고 싶던 소녀는 영화 속에서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순간마다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옥주는 모든 게 불만스러울 시기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고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되는 어머니를 미워하며, 남자친구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교외 변두리 집에 더부살이하는 게 너무 싫고, 동생이 누나에게 칭얼대는 것도 귀찮다. 자신만의 영역에 숨기를 희망해 자기 공간에 남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옥주는 ‘불만의 여름’을 보내는 중이지만 천성은 착한 소녀다.

연기 경력은 많지 않지만, 출연작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던 최정운 배우의 십 대 소녀 이미지가 <남매의 여름밤>에서 정점에 달한 것처럼 느껴진다.


3_ 또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여름날의 이층집과 영화 속 풍경

 

3대 가족이 짧은 기간이나마 어울려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오래된 2층 양옥집은 영화 속 이야기가 절묘하게 녹아드는 공간이다. 실제 노부부가 자식들을 키워 독립시키고 노후를 보내던 인천 주택가의 집을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장소에 이야기를 맞췄다는 제작 비화가 전해질 정도로 잘 보존된 곳이다.

옥주 네 가족이 몇 안 되는 세간을 챙겨 싣는 서울 수색 재개발구역 반지하 방의 황량한 풍경과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녹아 있는 할아버지의 집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이 가족에게 여름 한 철 이층집에서의 시간은 그들에게 절실한 안식이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30대 이상이라면 익숙할, 도시 변두리 단독주택과 골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게 <남매의 여름밤>에서 펼쳐진다.

옛날 구조의 이층집이라 거실 중앙에 삐걱대는 나무계단이 있다. 옥주는 2층 방을 차지하고 (동생을 포함) 가족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는다. 방에 모기장을 성벽처럼 둘러치고, 영화 막바지 전까지 고모 외에는 누구도 들이지 않으며 예민하게 군다. 1층과 2층을 구분하는 얇은 나무 칸막이는 옥주의 숨은 요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매의 여름밤” 영화 스틸 이미지

그러던 옥주가 모기장을 풀어헤치고 잠든 풍경을 보는 순간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 옥주가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관객에게 일깨우는 알람 같은 마법을 선보인다. 영화 속 자신을 응시하는 관객과 시선을 맞추지 않던 옥주가, 영화 끄트머리에 가서 어느 순간 정면을 쳐다본다. 그리고 다른 가족과 달리 한 번도 드러내지 않던 감정을 표출한다. 그렇게 소녀는 유년기의 어떤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의 생계 수단인 아버지의 짝퉁 명품 운동화는 옥주 네 가족의 사회적 처지를, 그녀가 모종의 사건을 저지를 때 눌러쓰는 모자와 온통 검정의 복장은 옥주의 심리 상태를 말이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해낸다. 여름날 입맛 없을 때 별식으로 먹는 콩국수와 비빔국수에 관한 현실적 묘사, 가족물에서 익숙한 장치인 찌개 맛을 품평하는 장면 등은 가족의 식사 풍경으로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1980 ~ 90년대 중산층의 표상이던 대형 전축에서 울려 퍼지는 신중현의 “미련”은 김추자와 장현 등 여러 가수의 목소리로 변주되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정취를 청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남매의 여름밤>은 정교한 연출과 영화 속 계절에 걸맞은 풍부한 자연광 사용, 잘 계산된 소품 활용을 통해 독립영화의 모범적 예시라 일컬을 만한 완성도를 뽐낸다. 텍스트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한계가 명백하니 실제 스크린으로 확인해 보시길 권유하는 지점이다.

 

4_ 작가의 사적 기억을 보편화한 모범 사례, <남매의 여름밤>


독립영화라면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상업영화에서 쉽사리 다루지 못하는 금기를 깨트리는 이미지를 상상하곤 한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파격 없이도 독립영화가 높은 완성도와 함께 주류 상업영화는 보여주지 못하는 독창적 측면을 만만찮게 보여주는 ‘부드러운 직선’의 영화다.

무엇보다 상업영화의 성공 공식이라 떠도는 천편일률적인 관습에 영향받지 않고, 감독 자신의 자전적 기억을 다양한 연령대와 체험을 보유한 관객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만한 이야기로 완성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윤단비 감독은 사회적 발언이나 작가적 야심보다는, 자전적 기억의 형상화와 함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영화 모범을 열심히 따라가려는 듯 보이고 일정 부분 성취를 이뤘다.

21세기 들어 사회 전반에 대한 집단적 이야기나 시스템에 대한 발언보다는, 자기 체험에 몰입하는 사적 이야기 경향이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서 세를 얻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나도 그랬어! 너도?’ 같은 순간을 맞이하듯, 이 영화는 어디에도 풀어내지 못했던 감독 자신의 체험담을 관객들에게 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느꼈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2020년 8월 20일 개봉 후 보다 다양한 이들이 함께 접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남매의 여름밤" 포스터 이미지

작품 정보


남매의 여름밤 Moving On


한국, 드라마, 2019

2020. 8. 20. (개봉 예정), 105분, 전체관람가


감독 윤단비

주연 양흥주, 박현영, 최정운, 박승준, 김상동

제작 오누필름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24회 부산국제영화제(2019) 넷팩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KTH상,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45회 서울독립영화제(2019) 새로운선택상

49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2020) 밝은미래상

8회 무주산골영화제(2020) 뉴비전상(대상)

8회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2020) 초청

15회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2020) 초청

22회 정동진독립영화제(2020)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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