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마타병을 증언하는 영화들

 

1. 2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오다

 

25회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사진(필자 촬영)
25회 부산국제영화제 현장 사진(필자 촬영)

1996년 1회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25년간 급한 일이 없으면 늘 10월 초중반은 부산에 있었다. 2020년 25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평소보다 2주 늦게 열렸고, 캐리어에 이것저것 살림을 꾸려 길게는 두 주 가까이 머물던 것을 이번에는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꼭 보고 싶었던, 그리고 이번이 아니면 보기 힘들 것이라 예상한 작품이 하나 있어서였다. 얼마 전 소개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을 연출한 하라 가즈오 감독의 신작 <미나마타 만다라>이다.

전날 밤을 본의 아니게 꼬박 새우고 새벽 기차로 부산역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지난 24년간 어스름하게 해가 뜨기 시작할 때부터 영화 티켓 현장 예매를 위한 노숙 행렬이 이어지던 영화의 전당 앞은 적막했다. 영화제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고, 모든 예매를 온라인으로 진행해 줄을 설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반세기 동안 익숙해진 풍경과는 너무나 차이 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와글대던 광장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펜스와 관문 격의 방역 게이트가 서 있었다. 공공장소를 출입할 때 익숙해진 절차-체온 확인, 휴대전화를 활용한 QR 코드 입력과 모바일 티켓 확인, 손 소독 및 방역 통과 인증 띠 부착 등이 의식처럼 진행되었다.

출입통제 과정을 겪으며 기이한 감상에 휩싸였다. <미나마타 만다라>는 세계적으로 대표적 산업재해로 손꼽히는 ‘미나마타병’을 다룬 영화다. 미나마타 앞바다에 유독 물질을 방류한 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정부와 기업은 미나마타병의 발병 원인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불완전한 희생자 인정 규칙은 그로부터 또 20여 년이 지나서야 제정되었다. 추가 오염 방지를 위한 지역 정화작업은 거기에서 또 20년이 흘러야 했다. 즉 일본 국가는 수천수만의 자국민이 원인 모를 공해병에 죽어 나감에도,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정부 책임과 기업 범죄를 방조하고 감춰온 셈이다. 그런 수십 년간의 기록을 집대성한 영화를 보기 위해 국내에서 어쩌면 유일한 상영장소인 영화제를 찾았다. “K-방역”이라 불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통제를 겪으면서 그 온도 차에 현기증이 순간 났다.


2. <미나마타 만다라>와 마침내 만나다


<미나마타 만다라>는 상영시간이 ‘372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하라 가즈오 감독은 영화 촬영에 15년, 편집에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영화 시작 전, 코로나19로 인해 부산 방문을 하지 못한 감독의 짤막한 관객 인사와 작품 소개 영상이 흘러나왔다. 6시간이 훌쩍 넘는 상영시간에 대해 끄덕일만한 영화일 것이란 기대가 생겨났다. <미나마타 만다라>를 포함해 일반 상영작의 두 세배 분량이 넘는 대작은 영화제 상영관 중 가장 작은 극장인 인디플러스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기존 좌석의 1/4만 티켓이 발행되어 국내 첫 상영은 9명 제한으로 이뤄졌다. (총 3회 상영이지만 전회 매진이라도 이 영화를 국내에서 볼 기회는 단 27명에게만 허락된 셈이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 포스터 이미지


2_1. 영화 소개 전 아주 짧은 배경 이야기

영화는 기록과 자료를 활용해 근대 일본이 ‘탈아입구’를 내세우며 추진한 두 축, (서구 열강의 부정적인 측면이기도 한) 산업화와 제국주의 과정에서 미나마타의 비극이 잉태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제국은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만 간주했던 아시아 각국은 물론, 자국 내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도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국가적 강박증 차원으로 열강을 따라잡고자 했던 성장제일주의는 노동탄압과 환경오염을 조장했고, 희생자를 비(非)국민으로 취급해 탄압으로 억눌렀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의 최남단 미나마타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에 의지해 살아가던 조용한 어촌이었지만 1908년 당시 소기전기(현 ‘칫소’)이 화학 공장을 세우면서 비극이 잉태된다. 이 공장은 1932년부터 미나마타 앞바다에 메틸수은(!)을 방류하기 시작한다. 원래는 바닷물에 쓸려 퍼지면서 희석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미나마타 만에서 해류 흐름은 폐수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구조였던 것.

이미 1940년대부터 원인 모를 질환자가 발생했다. 사람보다 먼저 지역의 동물들에게서 이상한 증상이 목격되기 시작한다. 어부들이 풍어를 축하하며 인심 후하게 던져준 생선 부스러기를 포식한 길고양이들이 이상행동을 보인다. 침을 질질 흘리고, 방향 감각을 잃고, 픽픽 쓰러지거나 바다에 저절로 빠져 죽는다. 물고기들이 헤엄치지 못하고 수면 위에 그냥 떠다닌다. 그 물고기를 잡아먹은 바닷새들이 죽어서 해변 바위틈과 백사장에 떨어진다. 끔찍한 죽음의 전조가 평화롭던 어촌에 드리워진다.

메틸수은 중독은 지역 생태계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동식물에 이어 지역 주민들에게서 공해병의 징후가 속속 확인되었지만 ‘칫소’ 기업은 몇 푼의 위로금으로 대책을 때웠다. 정부는 오랜 기간 칫소 공장의 메틸수은이 원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다 온갖 증거가 드러나자 1950년대 말에 인위적인 재난임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수십 년간 아무 제약 없이 이뤄진 수은 폐기물을 격리하기 위해 바다를 상당 부분 매립하고, 해역에 서식하던 물고기를 포획해 3천 개의 드럼통에 묻어 버리는 ‘해결책’은 1990년대 중반에야 완성된다.

공식 인정된 환자만 2,265명, 민간 희생자 대책위와 사회단체 추산으로는 65,000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낳았다. ‘미나마타병’이라는 공해병으로 기록된 해당 사건의 대책 마련은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 일본 보건성이 기준을 마련한 공해병 인정 규칙이 제정된다. (이 기준은 희생자 단체에서 악의와 무사안일의 표상이 될 정도로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 정부와 해당 지자체인 구마모토현은 1990년대 후반, 공식적으로 수은 유출 피해 제로를 선언했지만, 공해병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90살 넘은 고령의 공해병 1세대들은 (정부와 기업이 바라던 대로) 거의 세상을 떠났지만, 태아성 질환자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미나마타병’은 전염병이 아님에도 오랜 세월 무방비로 확산한 수은이 생태계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에게 상상도 못 할 만큼 다양한 경로로 축적되었고, 그 발병 시기 또한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1977년 제정된 인정 규칙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감정 장애’ 질환에 대한 불인정 때문이다. 외형상 관련 질환은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뇌의 중추신경을 공격해 인간의 오감을 마비시키고 정상적인 사고 활동을 교란하는 끔찍한 후유증을 가져온다. 가장 범위가 넓고 현재 생존한 희생자 다수가 이 태아성 감정 장애를 앓고 있음에도 일본 정부는 1세대 대부분이 별세한 상황을 이용해 미나마타병은 이제 끝난 문제로 치부하려 한다.

주민 희생자 단체와 지지자, 연대단체는 미지정자들의 공해병 인정 문제를 비롯해 주로 ‘정치적 해결’ 방식으로 약간의 금전 보상과 의료비 지원으로 일관해온 정부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중이다. 특히 미지정자의 공해병 후유증 관련 의료지원 기준인 희생자 인정 수첩 발급 확대 요구가 가난한 농어민이 대부분인 당사자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에 집단소송과 여러 형태의 청원이 거듭 이어지는 중이다. 2004년, 대표적 승소 판결인 ‘간사이 재판’에서 천 단위의 인정이 이뤄졌지만, 정부는 보상 범위 확대를 꺼리기에 소송 참여자만 인정하는 식의 편법으로 버티는 중이다.

 

"미나마타 만다라"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 스틸 이미지


2_2. 영화에 담긴 것들


372분의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지난한 공해병 투쟁의 기록을 담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해 보이지 않는가? 영화를 보고 나니 실제로 그랬다.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는 이미 종결된 형식으로 미나마타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미나마타 만다라>는 다양한 입장과 요구를 가진 생존 당사자들의 활동과 입장을 함께 투쟁에 참여해가며 기록해 거대한 과거-현재-미래의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오사카 센난 지역의 석면 피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십여 년간의 투쟁을 곁에서 기록한 전작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2017)처럼.

영화의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기술적으로 나뉜 2차례의 인터미션-휴게시간-은 그저 생리현상에 대한 방책을 넘어 거대한 서사를 3부작으로 정리하는 역할로 확장된다.

<1부>는 현재 미나마타병 문제를 둘러싼 현황과 지형, 주요 쟁점들을 해설하는 시간으로 배치된다. 최근의 집단소송 결과와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가장 그 폐단이 심각한 인정 규칙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조명과 함께 주장들을 입증하기 위한 관련 전문가들의 활동과 이론 소개도 가능한 선에서 배치했다. 특히 이 부분에서 구마모토 대학 등 지역 향토 학자들의 양심적 행보와 학문적 집요함이 돋보인다. 일본 정부와 칫소 기업은 마치 지구 온난화가 탄소 배출만 원인이 아닐 수 있다는 식의 궤변으로 시간 끌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과거부터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검증 절차를 들먹이며 최대한 문제를 회피해 왔고 현재도 그 작전을 구사한다. 양심적 법률가들이 결합한 수차례 집단소송에서 정부 측이 패소할 것 같으면 재빨리 ‘정치적 해결’을 통해 판례를 남기지 않는 방법을 취한다.

특히 근래 가장 큰 쟁점인 태아성 질환자의 감정 장애 문제를 다룰 때 임상실험 데이터 축적이 필요한 것을 악용해 어려운 형편의 희생자들이 나가떨어지게 하거나, 푼돈으로 입막음하는 교활함이 일본의 고도화된 관료행정 체계와 결합해 있음을 영화 내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허점을 파고들어 정부에 영합한 어용학자들의 허위 주장을 논파하는 순간은 짜릿하지만, 양심적 지식인들이 오직 신념으로 이런 작업에 일생을 바치는 건 세계 어딜 가나 공통임이 드러날 때는 씁쓸한 느낌이 짙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당사자들의 과거와 현재의 인생과 투쟁 이야기가 여러 단면을 조명하며 펼쳐진다. 미나마타병이 그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서 숨 쉬는 이들이 부당하게 겪어야 했던 생애사임을 영화는 인터뷰와 동행을 활용해 고스란히 재현한다.

특히 15살 때 체조선수를 꿈꾸다 뇌 중추신경이 녹아서 헝클어지는 증상이 발현되었던 당사자는 그의 증상이 초기 공해병 입증 과정에서 알려지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그를 찾고 인생 역정도 소상히 소개된다.

그의 집안은 소위 ‘히키아게샤’, 일본제국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곳곳으로 이주했다가 전후 귀국한 가난한 농민 가족이었다. 도시 근교 방공호에서 어렵게 살던 가족에게 누군가가 미나마타 정착을 알선했다. 그는 어릴 적 그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 덕분에 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공해병에 걸렸다. 다행히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며 쾌활하게 살아가는 그지만 공해병을 앓아 손을 덜덜 떠는 장애인의 삶은 순탄할 수 없었다. 그의 생계는 병 주고 약 주듯 칫소 계열사의 보상 일자리가 해결해 줬다.

 

"미나마타 만다라"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 스틸 이미지

보수적 견해를 지녀 희생자 단체 활동가들과는 사이가 별로였던 의료진이 그에게 중매를 알선해 결혼도 할 수 있었음이 밝혀질 때는 논리와 정의만으로 풀 수 없는 현실의 딜레마를 느끼게 한다. 그의 부인은 혼처를 구하지 못하던 재일 조선인 혈통이었다.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에서 3D업종이던 석면 처리공장에 유독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과 연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나마타병의 희생자들은 일본 정부 관료와 기업가들보다는 재일 조선인과 더 가까운 계급임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또한, 최초 공해병의 징후가 고양이나 새들에게 닥쳐왔던 바대로 해양 생태계 확인을 위해 직접 수중촬영과 샘플 채집을 감행하고, 인간의 희생을 넘어 미나마타 만 생태계가 정부의 매립 조치 후에도 여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정부 주장대로 1990년대 후 안전하다는 것도 좀 더 면밀히 조사되어야 함을 실증적으로 해설한다.

<3부>에서는 이후 계속 이어질 투쟁의 쟁점을 조망하고, 투쟁하는 이들 내부의 다양한 갈래를 소개한다. 감정 장애 문제가 향후 최대 쟁점이라 판단하는 쪽은 뇌 질환에 대한 장기적 전문 연구에 초점이 가지만, 당장 이슈화를 위해 드러난 장애를 우선시하는 이들과 충돌한다. 재판을 끝까지 진행해 유의미한 판례를 남겨야 한다는 점을 잘 알지만, 자녀 세대에 확산한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의료수첩 확보가 절실한 이들은 정부의 회유에 넘어가기에 십상이다. 이런 견해 차이는 당사자 단체의 분열을 낳게 마련이다.

투쟁에 동의하고 연대하는 이들은 이런 갈등을 묘사하기가 꺼려질 법한데, 하라 가즈오 감독은 그런 면에서 호탕 대담하기 그지없다. 애매한 지점에 대해선 감독이 직접 질문을 던지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주장하며 논쟁을 벌인다. 향후 투쟁의 지속과 쟁점화를 위해 내부의 차이와 논쟁점은 은폐나 봉합보다는 드러나야 한다는 신념이 뚜렷하다.

한편, 상대편인 환경성과 구마모토현 공무원들의 한심한 행태는 <미나마타 만다라>의 주 타격 대상이다. 2004년 간사이 판결 후 고개 숙여 사죄하는 퍼포먼스는 벌여도 근본적으로 대책을 마련하는 데는 태만했던 현 도쿄도지사이자 전국구 유력 정치인 코이케 유리코 당시 장관의 행태가 1부 도입부에서 소개되고, 3부에선 그 한심함이 정점에 달한다.

 

"미나마타 만다라"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 스틸 이미지

구마모토현 지사는 희생자 인정 판결 항소심 패소 후 열린 간담회에 자신의 선거운동 후원행사를 이유로 불참한다. 이후 만남의 자리에서도 중앙정부의 위탁사무만 가능하다며 문제 해결을 회피하기만 한다. 환경성 공무원들 또한 마지못해 간담회 자리에 끌려 나오지만 사사건건 책잡힐까 겁내며 말 한마디 하는 데에도 메모를 주고받는 한심한 작태로 일관한다. 자국민 수만 명이 현재진행형인 공해병에 고통받는 사건을 누구도 책임지고 수습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일본 정부의 위선적인 태도를 드러내면서 근현대 일본의 한순간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국가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애초에 평화로운 미나마타 어촌에 어울리지 않는 중화학 공장을 환경파괴에 대한 일말의 고려 없이 건립한 것도 정부였다. 위험의 징후가 속속 드러남에도 억지로 진상조사를 회피했던 것도, 피해가 공인된 후에도 자신들의 책임을 숨기고 감추기에만 급급한 것도 정부였다. 미나마타병을 역사의 유물로 박제해 버리려는 시도 또한 정부의 소행이다. 대기업과 결탁해 자국민을 억압하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해 수탈하던 일본제국의 유령은 현재형임을 감독과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2_3.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긴 상영시간 내내 <미나마타 만다라>는 미나마타 주민들이 평소 즐겨 먹던 ‘어부의 식단’을 재현한다. 얼핏 보면 먹방 프로그램으로 착각할 정도의 고증을 보여준다. 그들이 주변 자연에서 수확한 먹거리를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소박한 식사로 요리했던 게 공해병에 노출되는 일차 원인임을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소름 끼치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미나마타 지역 주민들의 생활사가 민속지처럼 전달되고, 지역 생태계와 동물들의 피해 증언을 통해 환경생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끌어올린다. 반면, 정부 고위 관료와 정치가들의 위선과 공무원들의 영혼 없는 행정에 대한 통렬한 조소는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적’과 ‘아’를 명백히 규정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 구분의 선명함도 강점이지만, 감독은 좀 더 나아간다. 투쟁하는 이들 안에서 서로 상충하는 다층적인 전선과 각기 나누어지는 견해에 대해 현미경처럼 상세히 고찰한다. 이는 ‘우리 편’ 내부의 복잡한 상황을 진단하는 이성적 해설과 주요 등장인물에게 입체감을 부여해 관객이 더욱 인물에게 끌리게 하는 정서적 접근까지 동시에 제공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와 인생을 걸고 길게는 60년 동안 승산이라곤 없어 보이는 거대 국가권력에 맞선 이들의 신념과 회한과 의지가 <미나마타 만다라>에는 조화롭고 공평하게 갈무리되어 있다. 국가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잘 알지만, 각자의 억울한 사정은 싸우지 않고는 그들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을 거라는, 투사가 되어버린 당사자들의 회고는 그들이 싸움을 즐기는 과격한 이들이 아니라 그렇게 싸우지 않고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약자임을 웅변한다. 감독이 연대의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알리고 매력적으로 묘사할까 고심한 결과일 테다. 결국,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지지가 <미나마타 만다라>라는 대작의 출발이라는 건 분명하다.


3. 또 다른 이야기들


영화로는 미나마타의 비극을 접하기 어렵다. <미나마타 만다라>는 대단한 작품이지만 상영시간의 압박은 물론, 비상업적 소재로 인해 국내에 수입되어 극장 개봉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아마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다른 영화제에서 소개될 기회도 지극히 드물 것이다. 반면에 책으로는 여러 분야로 만들어져 동화부터 전문 의학서까지 다양한 서적이 국내에서도 출판되어 있다. 하지만 본작 이전에도 미나마타를 증언하는 영화는 존재했고, 다행히 <미나마타 만다라> 이후에도 새로운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라 소개해본다.

 

"미나마타"(1971) 영화 포스터 이미지
영화 미나마타(1971) 포스터 이미지


3_1. <미나마타 만다라> 전에 <미나마타>가 있었다


<미나마타 만다라>에서 흑백 기록 화면으로 공해병 발생이 알려진 초기 자료 영상들이 종종 활용되는데, 이 영상들의 대부분은 나리타 공항 강제 건설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을 기록한 <산리츠카> 연작의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함께 일본 독립다큐의 거장으로 불리는 츠치모토 노리아키 감독의 1971년 영화 <미나마타 みなまた Minamata>에서 인용된 것이다.

본작은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과 세계 여러 환경 관련 영화제 그랑프리를 석권한 명작으로, 1950년대 미나마타병이 공개된 이후 제작 당시까지 자료 화면과 인터뷰를 충실하게 집대성한 기록물이다. <미나마타 만다라>에서는 과거 회고와 기록으로 등장하는 초반 투쟁 현장이 <미나마타>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칫소 공장의 수은이 농축된 폐수 방류가 공해병 원인임이 입증되자 유족과 생존자들이 법률 소송을 통해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 문제를 회피하는 정부와 대기업에 맞서 지난한 투쟁을 벌이는 생생한 과정이 담겨 있다.

특히 <미나마타>에는 지금도 활동 중인 당사자와 지지자 단체가 결성되는 과정, 개별 요구에서 집단 투쟁으로 확대되는 상황, 집단행동과 여론을 만들기 위한 서명이나 모금 운동 등의 구체적 풍경이 잘 녹아들어 있다. 츠치모토 감독은 처음 미나마타 상황을 담은 보도 영상을 찍다 그 참상에 오랜 기간 힘겨웠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의지를 다지며 5년 넘게 작업한 결과물은 역사에 남았다. 아마 미나마타병 문제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미나마타>와 <미나마타 만다라>를 함께 연속해서 보는 게 현재로선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미나마타"(2020) 영화 포스터 이미지
영화 미나마타(2020) 포스터 이미지


3_2. <미나마타 만다라> 이후 또 다른 <미나마타>가 온다


놀랍게도 할리우드 대작으로 미나마타 문제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연배우는 놀랍게도 조니 뎁이며(!) 그가 제작까지 맡은 작품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본작의 제목이 <미나마타 Minamata>라는 설명으로 대신하겠다.

미나마타병은 현재는 일본 국내 사건을 넘어 전 세계적인 산업재해와 환경파괴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일본 국내적 사건에 가까웠다. 이를 세계적 사진작가 유진 스미스가 <미나마타> 다큐멘터리가 완성된 직후인 1971년부터 3년간 미나마타 현지에 머물며 촬영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할리우드판 <미나마타>는 바로 유진 스미스의 일화를 담았다.

그는 단지 흥미로운 피사체를 찾은 게 아니라 희생자들을 연민하고 공감하며 저널리스트로서 미나마타 문제를 세계에 알리려 했고, 숱한 방해에 시달렸다. 심지어 반대편의 폭행으로 한쪽 눈을 실명할 정도였지만, 종군기자로 잔뼈가 굵은 덕분에 시련을 견뎌내며 역사에 남을 작품 사진을 남겼다. 영화는 유진 스미스를 주인공으로 그가 접한 미나마타병 사건을 큰 스케일로 다뤘으며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2021년 봄에 전 세계적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조니 뎁 외에도 미국과 일본의 연기파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는 점도 기대를 높이게 만든다.

 

"미나마타"(2020)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미나마타(2020) 스틸 이미지

4. 에필로그 - 미나마타의 현재성


요즘같이 악화한 한-일 관계 속에서, 자칫 미나마타병이 일본 특유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일 뿐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오판할 사람들이 있다면 원진레이온의 사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는 자의든 타의든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정부 주도 중화학공업 성장전략의 기원은 과거 만주국을 지배했던 만주철도회사에 있으며, 일본 대기업의 하청 혹은 기술 전수를 통한 하위 파트너로 현재 한국 다수의 대기업이 성장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원진레이온은 일본에서 노후화되고 안전성이 의심스러운 인조견사 기계를 도입한 섬유공장이었고, 곧 심각한 산업재해의 온상이 된다. 이 원진레이온의 노동자 투쟁 사례를 기록한 영화가 김태일 감독의 <원진별곡>(1993년)이다. 영화는 2년간의 투쟁 과정을 기록했다. 이후 겉으로는 노사 합의가 이뤄졌으나, 실질적인 피해자 구제는 없었다. 더 끔찍한 건 이미 일본에서부터 위험한 노후 기계로 확인된 원진레이온의 설비가 공장 폐쇄 후 막 산업근대화를 시작하며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던 중국으로 다시 인수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한국의 고위층과 재벌들 또한 미나마타의 참상을 불러온 일본 정부나 칫소 기업과 별반 다름없다. 법과 제도는 항상 거대 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조치되고, 재난과 피해가 발생하면 문제 해결보다 자신들의 방관과 무책임을 감추는 데 급급했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미나마타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는 비극은 언제든 우리 집 대문 앞에 닥칠 문제라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작품 정보


미나마타 만다라 MINAMATA Mandala

2020, Japan, Documentary, 372min

Director 하라 카즈오

23회 상하이국제영화제(2020) 경쟁(금작장-다큐멘터리)

25회 부산국제영화제(2020) 초청(아이콘)

21회 도쿄필멕스국제영화제(2020) 초청(특별초대작품)

 

미나마타 みなまた Minamata

1971, Japan, Documentary, 124min(일본 국내 상영본 167min)

Director 츠치모토 노리아키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미나마타 Minamata

2020, U.S.A, Drama

Director 앤드류 레비타스

Cast 조니 뎁, 빌 나이, 사나다 히로유키, 아사노 타다노부, 릴리 로빈슨, 쿠니무라 준,

히나세 미나미, 카세 료, 캐서린 젠킨스, 하네다 마사요시, 이와세 아야코

Based on 유진 스미스, 에일린 미오코 스미스

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2020) 초청(베를린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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