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1997, 한국 민주화와 사회운동 르네상스의 한 징표

 

1.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처음 접했을 때


1995년 11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전태일 열사 25주기를 맞이해 개봉했다. 전태일 열사 기념사업회가 공동제작에 참여한 이 영화는 상업적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거두며 그해 한국 영화 대표작 중 한편으로 회자되었다.

사회적 소재로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위상을 가진 작품은 그 후로 25년 동안 등장한 적이 없었다. 대체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해 5월, 대구 경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출범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이듬해 8월 연세대 점거 관련 공안탄압으로 이적단체로 낙인찍혔지만, 당시 한총련 출범식은 평화적으로 별다른 충돌 없이 이뤄졌던 연례행사였다. 5만 명 가까운 대학생들이 운집한 무대에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홍경인이 등장해 작품을 소개하고 관심과 후원을 요청했다.

상업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완성되어 개봉된 영화의 첫 2분은 개봉 직전 출범한 민주노총의 거리 집회 영상으로 채워졌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서 비롯된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발이 사반세기 동안의 헌신과 노력으로 민주노총 출범에 이르렀다는 선언이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서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 건설과 1995년 민주노총 출범에 이르는 거대한 흐름의 한 표상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포스터 이미지

2.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향하는 두 개의 경로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 1997년 IMF 경제 위기와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10년간 한국 사회는 급격한 민주화의 길을 걷는다. 군부독재를 계승하는 노태우 정부와 3당 합당의 후신 김영삼 정부의 시간대였지만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사회 각계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여전한 공안탄압과 보수반동 회귀 시도에도 불구하고 부문별로 사회개혁과 진보는 이뤄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만든 박광수 감독을 포함한 일군의 소장파 영화인들은 ‘코리안 뉴웨이브’라 일컬어지는, 과거 검열로 인해 지독히 제약되고 정부 입맛에 맞춰지던 창작 환경이 개선되자 상업영화의 완성도와 사회적 소재의 과감한 차용을 겸비한 새로운 영화를 속속 선보인다. 근 10년간의 다채로운 실험의 한 정점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드러난 셈이다.

또한, 영화 기획 단계부터 공동제작으로 참여한 전태일 열사 기념사업회가 사회운동 네트워크를 활용해 제작비 마련과 홍보 운용을 진행한 점은 지금 시점에서 부활시켜야 할 미덕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완성되는 과정은 전태일 열사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 노동 문제에 대한 환기가 모범적으로 수행된 사례이자, 사회 이슈와 문화예술의 선순환 구조가 작동하던 ‘빛나는 세기’의 기록이기도 하다. 민주노총 출범과 영화의 완성이라는 두 결실이 ‘한국 사회에 전태일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사회적 반향을 끌어낸 셈이다.

 

박광수 감독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 연작

박광수 감독은 여전히 영화인 교육과 행정 등에서 활약 중이지만 창작자로서는 2000년대 들어 잊힌 이름이다. 하지만 그가 1987~1997년 10년간 선보인 영화들은 당대의 화제작이자 작품성을 인정받은 한국 영화의 대표작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 데뷔작이자 안성기&박중훈 주연 작품 <칠수와 만수(1988)>는 동두천 기지촌 하우스 보이의 아들인 칠수와 반공법 연루자인 부친을 둬 연좌제의 폐단으로 해외 취업을 못 나가는 만수가 고층 빌딩 옥상 광고판 페인트 작업 중 자살시도로 오인되어 겪는 사건 사고를 블랙유머로 다룬 사회 풍자영화다. 데뷔 영화로 1989년 대종상 신인감독상과 각색상, 녹음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는다.

후속으로 선보인, 박중훈과 문성근, 심혜진이라는 당대의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들도 우리처럼(1990)> 역시 평범하지 않은 소재와 배경을 담았다. 값싼 외국산 석탄 수입으로 쇠락에 접어든 탄광촌에 시위를 주동하던 대학생이 도피를 위해 취업한다. 경찰국가 시절 엄혹한 신원 조회와 탄광촌 내에서의 계급 문제가 로맨스와 연결되는 이야기를 그려낸 사회파 드라마로 그해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과 기술상에 오른다.

다음 작품으로는 강수연, 안성기, 문성근 주연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의 <베를린 리포트(1991)>를 완성한다. 과거 ‘아동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한 해외입양아 문제에 관한 영화이다. 강수연이 분한, 독일 양부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는 주인공과 오빠이자 자생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뛰어든 문성근을 관찰하는 유럽 특파원 안성기의 이야기를 담았다.

네 번째 연출작은 문성근, 안성기, 심혜진 트리오가 주연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이다. 아버지의 상여를 싣고 외딴 고향 섬에 찾아온 아들이, 한국전쟁 당시 좌우 이념 대립을 악용해 부친이 온갖 패악질을 하고 양민학살에 앞장선 과거를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 이미지

그리고 다섯 번째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 경력은 여기에서 절정을 맞는다.

이어서 감독은 오랜 준비 끝에 현기영의 원작이자 구한말 제주도 민중봉기를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를 소재로 <이재수의 난(1999)>를 내놓는다. 이정재와 심은하 주연으로 1901년 실제 제주에서 일어난 반反외세, 반反가톨릭 민란을 그려낸 이 작품은 당시로선 초대작이었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감독의 연출 경력은 내리막을 걷는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쥐라기 공원> 한 편이 현대자동차 매출보다 더 수익이 크다니 영화산업을 육성하라!’고 일갈했고, 전통적인 충무로 영화판을 기반으로 성장한 감독들 대부분은 대기업이 한국 영화 산업화에 진출하는 전변에 적응하지 못했다. 박광수 감독 또한 신세대 감독들의 틈바구니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갔다. 너무나 빛나던 연출작이 절묘하게 그 10년에 집중되는 경우는 매우 상징적이다.


민주화와 사회운동의 전환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탄생 과정과 아울러 그때 한국 사회를 돌아보자. 1987년 당시 기대했던 민주화가 완성되진 못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일정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군부독재의 잔재와 온갖 악법들이 온존했지만, 반대로 그에 저항하는 재야 운동과 가두 투쟁이 시민들에게 일정 부분 지지를 받으며 야당의 역할 일부를 대체하는 형국이었다.

IMF 경제 위기 직전 ‘국민소득 1만 불’과 ‘OECD 가입’이라는, 1세계의 문턱 앞에 도달한 경제적 풍요 가운데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서 검열의 서슬이 수그러들고, 자본의 유입으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으며, 삶의 여유와 질을 찾던 시민들이 다양한 결의 대안적 문화예술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절이다.

사회운동에선 기존의 정치 지향, 정당 역할의 대체재이던 재야 운동과 좀 더 급진적 투쟁을 부문별로 수행하던 민중운동의 영향력이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었다. 문민정부를 자임한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시민사회’ 이론이 활발히 토론되면서 시민운동의 태동을 맞이한다. 경실련과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 등 분야별로 일상을 바꾸는 활동이 시민들에게 피부로 와닿기 시작하던 때이다.

정치적으로는 여러 차례 민중운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 시도가 좌절했지만, 기존 정당에 젊은 피 수혈 명목으로 영입된 상당수의 ‘운동권’ 출신이 제도권에 진입해 각자의 활동을 펼친다. 운동권 활동을 하던 이들이 사회개혁에 참여하겠다며 법조계와 정계는 물론, 재벌기업의 글로벌 경영 선봉으로 영입되던 변화무쌍한 시절이다.

해방 전후 ‘전평’ 등의 역사적 계승 측면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대중적으로는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본격화한 노동운동은 격렬한 공안탄압에 맞서면서도 차곡차곡 힘을 결집한다. 기업별, 사업장별로 명멸하던 민주노조 건설 투쟁을 넘어 지역별·산업별 조직을 세워낸다. 1990년 전노협이 건설되고 비非제조업 중심으로 업종회의가 결성된다. 기업별 노조 중심이던 당시 노동법 제도 상황을 반영해 대기업 집단 내 노조 협의회들(현총련-현대그룹, 대노협-대우그룹)이 연대 활동을 활발히 벌이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4~5년간 치열한 방향성 논쟁을 벌여가며 1995년 민주노총 출범으로 나아간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그런 거대한 사회적 변화상을 상징하는 영화이다.

 

3.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전과 이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 이미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줄거리와 그 영화가 이룬 성취는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예전에 봤던 이들이라면 복습을, 명성만 듣고 영화는 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얼른 영화를 보면 될 일이다. 영화에서 전태일과 함께 주인공인 김영수 캐릭터의 실제 모델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나 친절하게 만화로 그려진 <태일이> 시리즈를 함께 본다면 더욱 좋을 테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기까지의 활동을 담은, 주로 흑백으로 연출되는 부분과, 1975년 전후 유신독재의 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출구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과 야학 활동에 힘쓰던 (가상의) 지식인 청년 김영수가 활동하는 컬러 장면이 더해지며 전개된다. 이로써 전태일이란 인물의 재구성과 함께 그의 죽음이 이후 어떤 파장과 영향을 우리 사회에 가져왔는가를 풀어내는 형식이다.

故 조영래 변호사가 처음에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현재는 <전태일 평전>으로 존재하는 그 책을 써나가는 가공 전기의 측면도 짙다.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시작과 끝은 1995년 당시를 배경으로 앞부분은 실제 기록영상을, 뒷부분은 두 주인공이 판타지 형식으로 만나는 장면으로 연출했다.

이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급진적 구성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심지어 상업적 성공까지 담보했던, 마치 르네상스를 떠오르게 하는 그 시절을 평가하자면 소논문을 써도 모자랄 테다. 여기에선 노동운동의 ‘좋았던 옛 시절-벨 에포크’로 그 시기를 임의로 설정하고 추가로 당시를 이해하는 데 이로운 2편의 노동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려 한다.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 민주노총 건설의 역사

1995년 민주노총 출범의 해에 노동자뉴스제작단이 선보인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쉼 없이 전진해온 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의 발전사를 1시간 30분에 꽉 눌러 담은 기록영상이자 토론교재의 형식을 취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뉴스릴 형태로 <노동자 뉴스> 연작을 속속 제작해온 노동자뉴스제작단 작업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1995년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1987년부터 1990년까지를 1부, 1991년부터 1995년까지를 2부로 나눠 정리한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는 민주노총 건설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부정적이 아닌 의미로) 선전 영상으로 활용된다. 이 작품에는 당대 노동운동의 주요 인물이 무려 40여 명이나 인터뷰에 등장할 만큼 동시대 노동운동을 집대성하려 시도했다.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 스틸 이미지

제1부 <’87에서 ’90까지>에서는 87년 6월 항쟁을 곧바로 뒤이은 울산 현대엔진노조 결성 투쟁에서부터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 등의 건설이 속속 이어지는 과정을 담았다. 격동의 민주노조 초창기는 전투적 순간의 연속이었다. 희생이 속출하고 탄압이 모질었지만 그만큼 극적인 승리와 장렬한 투쟁의 기억들이 가득한 시간이 펼쳐진다.

2부는 그런 피와 땀의 경험들이 쌓이면서 장기적 전망을 구현하기 위한 조직 논의와 함께 정부와 기업이 채택하기 시작한 ‘신경영전략’에 대한 대응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생경하고 낯설게 들릴 표현들-계급이나 타도, 총자본 같은 용어가 흔히 들려오던 옛날 옛적 혁명의 시대를 집대성한 사료 기록물이다. 고전 영화부터 텔레비전 광고에 이르는 다양한 영상 형식의 활용 시도와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고 개방적으로 느껴지는 재연 설정 활용도 돋보인다. 되감기나 슬로모션 같은 기법을 사용해 뉴스와 자료 영상에서 풍자 효과를 극대화하는 시도에서 당시 영상 활동 집단의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 전망과 우려를 표하던 노동 문제의 쟁점과 관련해, 이후 25년간의 역사에서 당대의 통찰과 예언이 상당 부분 들어맞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꿈꿨던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귀결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오프닝 시퀀스에 삽입된 그해 11월 민주노총 출범 현장 자료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설이 된 영화잡지 KINO 연말 결산에 이 작품이 당당히 그해의 한국 영화 베스트10에 호명되었다는 사실을 요즘 누가 믿을까 싶다. 옛날 옛적 선현들의 그림자 혹은 오래된 미래의 보물창고 같은 고전임에도.


대안 세계를 믿던 불꽃의 연대기, “96-97 총파업 투쟁속보 연작”

제2부 <’91에서 ’95까지>는 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열사 정국 투쟁에서부터 민주노총이 출범한 해인 1995년 임단투의 성과를 소개하고 민주노총의 이후 임무와 과제를 제시한다.

임기 말을 향해 가던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 초반의 개혁 드라이브가 무색하게 1996년 크리스마스 연휴가 막 끝난 12월 26일 새벽,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단독으로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을 강행한다. 보수반동 세력의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안기부법 개악 시도와 비교하면,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펼치기 위한 포석으로 1990년대 노동운동의 가장 큰 숙적이던 ‘신경영전략’의 국가 버전이라 할 노동법 개악은 현재까지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노동자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흉들로 가득했다.

변형근로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파업 기간 중 무노동·무임금 적용, 노조의 정치 활동 금지, 동일사업장 내 대체근로 및 신규 하도급 허용이 그 굵직한 내용이었으니 지금은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당시로선 경천동지할 사회적 파문을 불러온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복수노조 금지조항 폐지,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철회,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3권 부분 허용이 달래기 카드로 추가되었지만 이건 뭐 계산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우려했던 거의 모든 것들은 현실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 명예퇴직,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란 용어들은 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당일 곧바로 총파업을 선언한다. 1948년 전평 총파업 이후 최초의 전국적 정치 총파업으로 역사에 남은 투쟁이었다. 조직된 노동운동의 위력과 민주노총의 위상을 만천하에 떨쳤고, 이후로 민주노총은 한국 사회에서 좋고 나쁨이 갈리는 것과는 별개로 유력한 사회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

 

"96-97 총파업 투쟁속보 2호"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96-97 총파업 투쟁속보 2호> 스틸 이미지

이 대투쟁을 기록하기 위해 당시 활동하던 거의 모든 영상 활동가가 결집했다. 공동작업의 결과물은 두 편의 속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곳곳에서 교육과 선전용으로 소개되었다. 속보 1호는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6일까지를, 속보 2호는 1월 7일부터 22일까지의 투쟁을 시간대별로 담았다.

속보 1호는 말 그대로 속보에 충실하게 당시 급박한 투쟁 현장을 보도 형식으로 소개한다. 반면, 2호는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가 선보인 다양한 테크닉과 테마를 활용한 보다 영화적 완결 구조를 추구한 작업이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던 투쟁 현장의 노동자와 시민들의 인터뷰, 정부 인사를 비꼬는 풍자, 통과되어버린 악법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입장 등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소개된다.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와 마찬가지로 “96-97 총파업 투쟁속보 2호”는 월간 영화잡지 KINO의 1997년 베스트 한국 영화에 선정된다. KINO가 영화 운동에 친화적인 매체였다지만 영화적 완성도 면에선 한계가 뚜렷한 현장 투쟁 영상 모음 성격의 다큐멘터리에도 공간을 할애하던, 오버 좀 하자면 ‘혁명의 시간’이 가능케 했던 순간들이리라.

하지만 그 시간은 이내 달이 저물 듯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IMF라는 광풍에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시기가 찾아들었다.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시절 대안 세계의 전망을 잃어버린 채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4.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간을 기억하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표상하던 ‘좋았던 옛 시절’은 김영삼 정부와 초국적 금융자본, 재벌기업 집단이 의도한 노동법 날치기의 목표가 IMF 이후 거의 모두 구현되면서 흘러간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렸다.

당시 50만의 민주노총 조합원에서 2020년 직선제 선거를 앞둔 현재 조합원 수는 2배에 가깝고, 한국노총을 제치고 제1노총의 위상도 획득한 상태다. 민주적 정권교체도 가능하고, 진보정당 또한 원내에서 활동 중이다. 분명 1995년 당시의 인식처럼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사회 변화는 꾸준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사회 모순의 뼈대인 노동-자본 관계의 역전을 꿈꾸는 시도는 몽상가의 꿈처럼 치부되는 현실이다.

가난하지만 공동체의 힘으로 미래가 더 나아질 거란 ‘과학적’ 전망과 진보의 믿음을 간직하던 시절의 표상으로 전태일은 여기에 있다. 여전히 ‘오래된 미래’로 대안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저 좋았던 옛 기억, 향수의 상징이 아닌 존재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다시 호출되기를 바란다. 본래 그런 의도가 녹아들어 창조된 영화였으니.

 

 

작품 정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A Single Spark

한국, 드라마, 1995

1995. 11. 18. 개봉, 96분, 15세관람가

감독 박광수

주연 홍경인, 문성근, 김선재

16회 청룡영화상(1995)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34회 대종상영화제(1996) 기획상

20회 전주국제영화제(2019) 초청(백 년 동안의 한국 영화: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원천)

14회 런던한국영화제(2019) 초청(스페셜 포커스)

♣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서 관람 가능.


민주노조 87에서 95까지 Democratic Union 87-95

한국, 다큐멘터리, 1995

미개봉, 93분

제작 노동자뉴스제작단

♣ 노동자뉴스제작단 별도 문의 필요


96-97 총파업 투쟁속보 1-2호

한국, 다큐멘터리, 1997

미개봉, 26분/53분

제작 노동자뉴스제작단

♣ 노동자뉴스제작단 유튜브 채널에서 관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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