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드는 극단주의의 한 기원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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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트 문화’의 벽에 부딪힌 힐빌리 촌뜨기의 수난

에팔레치아 산맥 중턱 시골에서 나고 자란, 속칭 ‘힐빌리’라 불리는 계층의 일원인 J.D.밴스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이비리그에서도 하버드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여자친구와 간간이 통화하며 워싱턴의 유명 로펌이 주최하는 저녁식사 파티에 참석한 그는 중요한 게스트 옆자리에 앉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으니….

웨이터가 와인을 권한다. 그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분명 영어로 설명하지만, 화이트와 레드 와인 외에 더는 분간할 수가 없다. 테이블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가 여러 개다. 대체 이건 어디에 쓰고 저건 어디에 쓸지 모르겠다. 그런 밴스를 로펌 중역들과 예비 경쟁자들은 조롱하며 여흥으로 삼는다. 급기야 화를 내면 크게 손해 볼 자리임을 알면서도 밴스는 목소리가 올라가고, 그의 머릿속에서 힐빌리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단지 피부색을 넘어 미국 사회의 주류 집단인 백인 내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고, 빈곤하고 소외된 집단이 적지 않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우리에게 미국 사회와 정치는 다수의 백인이 소수 흑인과 여타 유색인종들을 차별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힐빌리’, ‘레드넥’, 아예 ‘화이트 트래시’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백인 집단이 적지 않다. “힐빌리의 노래”는 그런 백인 하층민에 대해 당사자의 시선으로 조명한 기념비적인 원작과 그 영화화의 결실이다.


2. J.D.밴스의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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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영화 속 주인공과 정말 닮은 꼴인, J.D.밴스의 2016년 출간된 자서전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꺾었던 대선과 같은 해에 출간된 자서전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다. 영화에서처럼 자수성가해 성공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30을 갓 넘긴 주인공의 책이 이렇게 큰 인기를 끈 데에는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부통령으로 아들 부시 대통령과 대결해 선거에서 패한, 워싱턴 정계의 ‘엄친아’ 앨 고어의 사례는 미국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후광을 빼면 당시 아들 부시의 경력은 앨 고어의 휘황찬란한 이력에 비길 바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앨 고어는 부통령 시절 ‘정보 초고속도로’라는 신개념을 주창하며 미국 산업계의 IT 붐을 지원했고, “불편한 진실” 등의 영화로 알려졌듯 환경정치에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런 앨 고어가 너무 잘난 척한다며 평범해 보이는 아들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든 공화당 내의 신세력이 있었으니, ‘티 파티’라 불리는 기독교 근본주의 보수집단이었다. 이들은 남부 시골 동네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복잡한 정치 주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에 연관된 단선적 시야로 세상을 바라봤고, 앨 고어로 상징되는 정보화 시대의 복잡한 변화와 정치적 자유주의를 낯설어하거나 혐오했다. 아들 부시가 제대로 된 치적 하나 없이 네오콘 강경세력에 휩쓸려 이라크-아프간 전쟁에 뛰어들고 이후 재정난과 미국 패권 위기를 불러왔음에도 재선에 성공한 데에는 이런 일방적인 지지층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정이 거듭되면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고 연임하게 된다. 오바마의 자유주의 노선에 티 파티를 포함한 ‘아스팔트 우파’는 분노했다. 그 결과 역시 ‘엄친딸’인 힐러리 클린턴과 맞붙은 허풍선이 백만장자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2016년 만들어낸다.

트럼프 당선에는 기존의 티 파티에 더해, 클린턴과 앨 고어 시절 집중적으로 육성된 실리콘밸리와 대도시 중심의 첨단 정보산업 활황에서 소외된, 하지만 미국의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러스트 벨트’ 쇠락한 공업지대의 빈곤해진 백인 노동계급이 가세했다. 러스트 벨트와 연결된 중서부 에팔레치아 산맥 일대의 초창기 개척민들의 후예가 ‘힐빌리’라는 이름으로, 전통적으로 남북전쟁 다시 미국 남부연합의 후예를 자처하는 ‘레드넥’이 속속 합류한다. 이들은 민주당의 상대적 진보 성향을 혐오하지만, 공화당의 엘리트 정치 가문에도 적대적이다. 오히려 반反정치의 정치화에 가까운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화당보다 트럼프!’ 정치 성향이 선거에서 작동되면서 공화당 또한 혼란에 휩싸인다.

왜 백만장자에 연예인 기질 다분한 트럼프를 백인 노동계층이 지지하는 것일까? 수많은 석학들이 이 기현상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지만, 그 누구도 J.D.밴스의 자서전에 필적할 파급력은 얻지 못했다.

저자는 영화 속 내용처럼 실제 켄터키 주 잭슨이란 산골 마을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러스트 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 주 미들타운에서 성장했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경제를 상징하던 철강기업 암코에서 제철산업에 종사하던 힐빌리들은 이들 기업의 쇠락과 함께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복지제도에 의존하는 빈곤층으로 떨어졌다. 저자의 회고에서처럼 자기 속 사정을 남에게 드러내길 꺼리는 자존심은 문제 해결과 권리 주장에 악영향으로 돌아왔다.

 

"힐빌리의 노래"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힐빌리의 노래 스틸 이미지

저자는 불안정한 부모 아래에서 또래 집단들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세대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가 애정을 담아 부르는 호칭인 ‘할보’, ‘할모’의 엄한 훈육 덕에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유년 시절을 회고한다. 우수한 학업성적을 거뒀으나 대학 학비가 없었던 저자는 해병대에 지원해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고, 학자금을 모아 명문대에 진학해 자수성가를 이룰 수 있었다.

‘할모’의 가정교육과 해병대의 규율을 예찬하는 저자의 태도에 거부감을 느낄 독자가 꽤 있을 만큼, ‘통제’에 가까운 지도와 조언에 목말라 있던 저자는 방관에 가까운 힐빌리의 풍조를 이해하면서도 그런 면모가 지역을 망치고 있다고 단언한다. 누군가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잡아주고 교육과 정보를 제공하는 게 힐빌리의 청소년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지역의 위기는 예견된 것이지만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거의 향수에 집착하며 새로운 변화를 어려워하는 힐빌리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극우화될 위험이 높다는 것이 J.D.밴스의 자서전을 읽은 이들에게서 공통으로 도출된 결론이다.


3.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재탄생한 “힐빌리의 노래”

 

이렇게 사회적 현상을 불러온 원작의 영화화를 누가 탐내지 않으랴. 하지만 “힐빌리의 노래”는 할리우드가 아닌 넷플릭스에서 2016년 미국 대선이 끝나자마자 판권을 취득하고 곧바로 영화화 작업에 돌입했다.

“뷰티풀 마인드”, “아폴로 13”, “다빈치 코드” 등의 명작을 만들어 ‘거장’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론 하워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명배우 글렌 클로즈와 에이미 아담스가 주인공의 ‘할모’와 어머니를 맡아 열연을 선보인다. 비록 원작의 심각하고 복잡다단한 계급 묘사가 희석되고,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가족 드라마로 탈바꿈한 점이 아쉽지만, 군데군데 원작의 예리한 묘사가 살아난 장면만으로도 우리가 바다 건너 미국에 대해 피상적으로 인식하던 지점을 톺아보게 하는 효과가 혁혁하다.

영화의 묘사는 특히 초반부, 서두에서 언급한 저녁 식사 파티, 그리고 힐빌리의 기억을 주인공이 떠올리는 추억 속 켄터키 잭슨의 풍경들에서 탁월하다. 원작의 장점, 힐빌리의 기억을 단맛과 쓴맛 골고루 풀어내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한계에 대한 성찰을 겸비한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반면에 전형적인 가족 드라마로 감동을 끌어내려는 후반부에선 원작과 전반부의 세밀한 사회상 묘사가 탈각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보다 더 기대하기가 어려울 만큼 출중하다. 특히 전형적인 힐빌리 세대이지만 손자는 다른 삶을 살길 원했던 ‘할모’ 역할로 강인한 면모를 드러낸 글렌 클로즈의 연기와, 힐빌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파괴적 삶을 거듭했지만 끝내 갱생하게 되는 어머니 역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는 영화에 대한 호오를 떠나 평단의 격찬을 받는 중이다. ‘할모’와 어머니의 명연기에 가려졌지만, 실제 J.D.밴스와 거의 형제라 해도 믿어질 만큼 닮아 있는 가브리엘 바소, 주인공 못지않게 강인한 누나 린지로 분한 헤일리 베넷, 그리고 주인공의 시련을 항상 곁에서 조력하는 여자친구 역 프리다 핀토와 ‘할보’ 보 홉킨스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실제 인물과 겹쳐 보일 정도로 적절한 배역에 출중한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부분에서 실제 주인공과 가족들의 후일담과 과거 사진·영상이 짧게 소개된다. 픽션과 비교하는 재미와 함께, 지난한 인생 역정을 거친 이들의 현재가 뭉클한 감정을 선사해 준다. 하지만 영화가 원작의 심오한 발언 깊이에 못 미친 건 분명하다.

 

"힐빌리의 노래"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힐빌리의 노래 스틸 이미지

4. 새로운 영상문화 대세, 넷플릭스의 야망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기억하는가? 2017년 6월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감독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전국 32만여 명 관객 동원으로 막을 내렸다. 넷플릭스 제작 투자로 완성된 영화를 CGV를 필두로 한 국내 멀티플렉스들이 사실상 상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옥자”는 몇 안 되는 개인 극장과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서만 상영되었다. 극장 개봉을 전제로 한 기존 영화계 집단 VS 오리지널 영화를 자사 채널에 우선 방영하려는 넷플릭스 간 영역 다툼 결과였다. 올해 11월 11일, 국내 3대 멀티플렉스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힐빌리의 노래”가 일제히 개봉하는 상황은 3년 전 격렬했던 갈등을 기억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작금의 급격한 전개는 두 세력 간 일정한 타협점이 형성되었다는 신호다. 코로나19 창궐로 멀티플렉스 체인은 기존 방식-개봉 첫 주 독과점 논란이 일 정도로 스크린을 대량 확보해 수익 극대화-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전 같으면 천만 영화를 꿈꾸며 큰돈과 집중 홍보를 아낌없이 뿌렸을 화제작의 개봉이 줄줄이 연기되고, 제작비 건지기 위해 OTT에 판권을 넘겨버리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넷플릭스 신작 유치로 화제를 만들어내려는 극장 체인의 처지를 감안해 보라. 자기 채널 공개 전에 사전 홍보 기회를 얻는 셈인 넷플릭스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다. 그렇게 극장 개봉 후 2주라는 홀딩 기간을 거쳐 넷플릭스 채널에서 공개하는 수순의 합의다.

그런 합의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첫 주자가 “힐빌리의 노래”라는 점 또한 시의성이 크다. 화제성과 시의성 두 마리 토끼를 획득하기 위해 할리우드 스케일과 물량을 압도하며 ‘크게 지르는’ 넷플릭스의 한발 앞선 선구안과 기획력은 기존 할리우드의 야박한 투자에 질린 거장 감독들을 블랙홀처럼 끌어들이는 중이다. “힐빌리의 노래”에 이어 이후 줄줄이 개봉 대기 중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라인업들은 ‘게임 체인저’로서 영상문화계 신흥 강호의 위용을 증명할 것이다.


5. 영화 보단 원작, “힐빌리의 노래” 시사점

주인공이 진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함께 토로하던 ‘힐빌리’는 역설적으로 미국 초기 개척민들의 후손이다. 신대륙에서 건실한 삶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넜던 이들 개척민은 미국의 세기에 중서부 중공업 지대로 대거 이주해 러스트벨트에 정착했고, 안정된 직장과 성공의 기회라는 아메리칸드림을 신봉했었다.

하지만 미국 산업의 경쟁력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변화에 뒤처진 러스트벨트-힐빌리 일대의 백인 노동계급과 지역사회는 서서히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럼에도 정치적 자유주의의 붐 속에서 동부와 서부 대도시 지역과 유리된 이들은 남부 농촌 지역의 ‘레드넥’과 더불어 고립화의 길을 걸어왔다. 누구도 이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국 주류 정치에서 소외됐던 힐빌리들의 정돈 안 된 즉자적 욕구는 ‘대안 우파’라 불리는 공화당 내 신흥 극우 집단이 제일 먼저 포착했다. 몇몇 선동정치가들은 재빨리 이들의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명쾌하고 극단적인 주장들로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미국 대선 과정에서 보는 자유주의와 토론의 위기다. 비단 미국뿐 아니라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믿어왔던 국가들 다수가 그런 불안에 휩싸이는 중이다. 물론 우리 사회 또한 의외는 아니다. 그렇기에 “힐빌리의 노래”는 국내에서도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

 


작품 정보


힐빌리의 노래 Hillbilly Elegy

미국, 드라마, 2020
2020.11.11. 개봉, 116분, 청소년관람불가

제작 넷플릭스
감독 론 하워드
주연 에이미 아담스, 글렌 클로즈, 가브리엘 바소
출연 헤일리 베넷, 프리다 핀토, 보 홉킨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Hillbilly Elegy: A Memoir of a Family and Culture in Crisis

지은이 J. D. 밴스
옮긴이 김보람
출판사 흐름 (2017-08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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