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그곳.

 

초여름 바람이 선선하게 불던 날이었다. 하얀 천막 위로 포근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돗자리에는 김밥과 빵, 커피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주위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천막 바깥으로는 연녹색의 나무들과 뭉게구름 몇 점이 보였다. 잠시 눈을 감으면 마치 소풍에 온 것만 같았다. 눈을 뜨고 천막 앞에 놓인 글자들을 읽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부당징계 반대한다”, “징계 이후 한동대는 깨끗해졌습니까?”, “학교는 헌법 위에 있는가. 헌정 질서 준수하라”, “폴리아모리를 이유로 내쫓을 수 없다”, “혐오와 탄압을 저지르는 한동대는 부끄러운 줄 알라!” … 2년 전, 내가 있던 곳은 포항의 한동대학교 정문 앞, 부당징계 규탄 농성 현장이었다.

 

학기의 마지막 날, 나는 기말고사가 아닌 천막을 쳤다. 예정대로라면 졸업 프로젝트에 한창 열을 올렸을 시기지만,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무기정학 처분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졸업을 1년 앞두고 7년간 몸담은 공간에서 기한 없이 “모든 권리가 정지”되었다.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페미니즘 강연을 열었고, 강연 취소를 종용하는 교수에게 “불손한 언행”을 보였으며 언론을 통해 학교의 행태를 공론화했고,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관계)라는 이유였다. 

부당징계를 규탄하는 시민사회와 동문들의 연서명부터 수많은 기자회견과 집회, 교육부의 조사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징계철회 권고 결정에도 학교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교수와 목사들은 “애비 같은 마음”이라며 내게 반성을 요구하거나 “애인과 헤어지라” 충고했고, 강단과 교단 위에서 나를 “곰팡이”와 “암세포”에 비유하며 “잘라내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어느새 가짜뉴스처럼 진실로 포장된 채 학교를 넘어 전국 교회로 퍼져나갔고, 천막 농성 당시는 그 정도가 절정을 찍던 때였다. 그사이 나는 학교가 아닌 신경정신과에 다니게 됐다.

 

천막은 온종일 북적대고 시끄러웠다. 이른 아침부터 연대 방문을 온 사람들 덕분, 그리고 이를 저지하고 훼방하려는 학교 때문이었다. 응원한다며 찾아온 학생들부터 말없이 음식만 놓고 간 학생, 점심시간에 들른 교내 청소노동자들, ‘한동대 학생 부당징계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7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들, 그리고 천막 설치를 방해하던 교직원들과 동태를 살피며 감시하러 온 교수와 목사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천막 주위를 들락거렸다. 그중에서도 유독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해가 중천에 뜬 점심시간 즈음이었다. 천막 건너편 도로 위로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섰다. 그 뒤에는 세 대의 차가 일렬로 따라섰다. 흡사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자동차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토해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했다. 해코지하려는 사람들인가. 길 건너편에서 천막을 향해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천막 코앞까지 왔을 때야 비로소 보인 얼굴은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미소였다. “지민아, 우리 왔다!” “괜찮나. 힘들제” “힘내서 꼭 학교 이기자!” “우리 일하지 말고 여기 있을까?” 깔깔깔 경쾌한 웃음소리와 응원의 말들이 순식간에 천막 안을 메웠다. 

한참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던 그즈음, 천막 안에서 바라본 학교 모습은 퍼뜩 낯설었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아래 정문에는 어두운색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천막에서 10m도 되지 않는 거리. 새우 눈으로 천막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학교 안팎에서 나를 욕하고 아웃팅 하느라 바쁜 교수와 나를 곰팡이와 암세포에 비유했던 목사, 앞에선 웃으며 정보를 얻고 뒤에선 치밀하게 징계 절차를 준비했던 교직원들이었다. 세상에서 교수님, 목사님,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존경받는 이들이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폭력을 생각하니, 그 반듯함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본 천막 안 풍경은 사뭇 달랐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조합원들, 얼마 전 삭발 투쟁을 하고 머리카락이 얼마 자라지 않은 장애인부모연대 활동가들, 밤새도록 공부하고 시험까지 쳐서 얼굴에 피로가 잔뜩 묻은 학생들, 투쟁 소식에 업무도 내려놓고 버선발로 뛰어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포항여성회 활동가들, 1시간이 넘는 장애인 콜택시 대기시간을 뚫고 온 포항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 업무 중 잠시 짬을 내어 들른 청소노동자들…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뾰족한 십자가가 달린 건물을 등지고 반듯한 정장 차림으로 천막을 내려다보는 사람들과, ‘반듯함’과는 거리가 먼 각자만의 옷과 얼굴로 천막 아래에서 손을 잡고 있는 우리는 마치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듯했다. 정문 앞에는 두 세계를 구분 짓는 듯 단단한 철 바리케이드가 서 있었다.

 

2년 후 이곳.

 

2년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학교를 상대로 두 차례의 소송에서 모두 승소했고, 무기정학생에서 휴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 과정에서 난 학교와 기독교의 밑바닥까지 다 본 기분이었다. 승소 이후에도 학교는 사과는커녕 패소 판결문을 자신들의 승리인 양 포장하기 바빴고, 교계에서 내 사건은 “동성애·폴리아모리 세력을 막아낸” 사례가 되어 그들의 트로피처럼 떠돌아다녔다. 지금까지도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들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꼬투리를 잡아 고소와 고발을 남발하고,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다. 

분명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밑바닥 아래 아득한 지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2년 후 다시 이곳에서 알게 됐다. 부당징계 규탄 천막이 있던 장소 바로 건너편에 새로운 천막이 세워지는 걸 보면서 말이다.

 

올여름, 학교가 만든 현수막들이 갑자기 교내 여기저기에 걸리기 시작했다. “생활관 청소용역 계약 기간이 종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환경미화원 여러분께 그동안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듣도 보도 못한 현수막 해고였다. 정확히는 2020년 6월 30일, 학교는 14명의 생활관 청소노동자를 현수막으로 집단 해고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정난이 표면적 이유였다. 두 달 뒤인 8월 31일, 학교는 19명의 본관 청소노동자마저 전원 해고했다. 이때도 같은 이유를 말했다. 

길게는 25년 동안 학교를 쓸고 닦던 노동자 33명이 한순간에 직장에서 쫓겨났다. 코로나로 인한 재정난이 왜 어떤 이들에게만 적용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무관한 일이 되는지 대해 학교는 말이 없었다. 그저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청소노동자에게만 향한 채, 학교 앞에는 천막이 세워졌다. ‘한동대 학생 부당징계 사건’에서 ‘한동대 청소노동자 부당해고 사건’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해고 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작년 12월, 학교는 청소노동자 노조와 협약을 체결했다. 총장이 직접 서명한 협약문에는 “2년 이상 지속되는 적자 또는 대학 전체 차원의 구조조정이 아닌 다음에는 고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는 당시에도 초대형 건물 3개를 새로 지어놓고 인력을 추가 고용하지 않던 학교에 맞서 노동자들이 이뤄낸 투쟁의 결과였다. 그러나 학교는 협약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협약을 파기했고, 협약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그건 전 용역업체와 맺은 계약인데, 지금은 다른 용역업체이지 않냐’는 말을 남긴 채.

그전에도 학교의 만행은 끊임이 없었다. 2~30년간 일한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하는 건 물론, 용역업체 대신 교직원이 직접 노동자들을 지휘·명령·감시하면서 갑질을 하거나 학교 후원자들에게 보낼 무를 청소노동자들이 재배하게 시킨 ‘무밭 노동’, 청소 비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노동자들의 사비로 충당하게 하고 남자기숙사 청소노동자에게 여자층 출입을 제한하여 업무 중 화장실 이용을 못 하게 하는 등등. 그사이 학교는 개교 때부터 늘 그랬듯 “하나님의 대학”을 자처하며 “배워서 남 주자”니 “Why not change the world”라니 온갖 텅 빈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해고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몇 가지 짐을 싸서 바로 포항을 향했다. 천막 안을 들어서자 청소노동자들은 2년 전과 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이고, 지민이가? 야야 지민이 왔다! 만다꼬 이리 먼 길을 왔노. 고맙다 고마워” “잘 지내고 있나. 니 이겼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린다” … 오는 내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마음이 괜스레 들었지만, 정작 도착하니 격한 환영만 받고 말았다. 연대가 그저 ‘주고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연대 받던 입장에서 연대하는 입장으로 변한 지난 2년이 묘하게 느껴졌다.

밤새 천막을 지키면서 들은 속 이야기는 밖에서 들은 이야기보다 더 아득했다. 이 부당해고가 얼마나 치밀하게 기획된 것인지부터 그동안 노동자들이 결집하는 것을 갈라 쳐내기 위해 학교가 어떤 짓을 했는지. 학교 근처는 황무지뿐인 이곳에서 투쟁 중인 노동자에게 건물 출입을 금지시켜 화장실조차 못 쓰게 하는 것,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경비실에 CCTV까지 새로 달았다는 것, 투쟁 과정에서 고령의 노동자 한 명을 ‘도둑’으로 몰아세우며 학생을 통해 검찰에 고소한 이야기까지.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천막 앞에는 학교가 내건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민주노총은 업무방해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그렇게 몇 차례 비가 오고, 해가 뜨고, 태풍으로 무너진 천막을 다시 세우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포항 거리에서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낸 지 121일 차. 학교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규탄 여론이 거세지자 더는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걸로 보였다. 2020년 11월 1일, 학교와 노조는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전원 원직복직하며 그간의 임금 중 반을 지급한다’는 협정서를 체결했다. “이 협정은 용역업체의 변경과 무관하게 쌍방은 이를 준수한다”는 문구도 포함됐다. 평소 갑질을 일삼던 교직원도 청소 관련 업무에서 배제됐다. 갖은 고초 끝에 얻어낸 노동자들의 값진 승리였다.

고작 2~3년 사이에 한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라기엔 지난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대학’을 자처하며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곳에서 몸에 “암세포”가 자라고 빵에 “곰팡이”가 피었으니 그것들을 떼어내야만 한다는 듯 벌어진 일들이 참담했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선명하게 그으며 울타리를 쌓아가는 사이 누가 그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지 지난 2년의 시간이 여실히 보여줬다. 누군가는 학교가 교육 철학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학교가 재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고 말하며, 누군가는 그러한 학교와 맞서는 우리를 “떼쟁이”라고 말한다. 누가 떼를 쓰고 있는 걸까. 그들은 무엇을 지키고 있으며 그사이 누구를 죽이고 있는 걸까. 

부당징계와 부당해고 사이에 학교는 더 교묘해지고 영악해졌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웃을 쳐내는 일의 끝은 뻔했다. 부끄러운 패배의 반복. 그런데도 여전히 학교는 청소노동자들의 복직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떼어내고 나에 대한 징계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일이라고 우기지만, 이제는 모두가 안다.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고집하는 이들은 결국 도태할 것이고, 우리는 끝내 승리할 거란 걸.
 

 

※ 2년여 투쟁 끝에 2020년 1월 30일, 한동대 부당징계 사건은 ‘징계는 무효다’라는 승소 판결로 하나의 마침표를 찍었지만, 단지 재판 승소가 끝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한 개인만의 일도, 한동대만의 일도, 특정 종교만의 일도, 대학이란 특정 공간만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동대를 비롯한 기독교, 나아가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각종 혐오와 차별이 만연하고, 이들은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그저 흘러가고 사라지며 없었던 일이 되지 않도록 한동대 부당징계 사건을 구석구석 기록한다.

 

글 _ 지민
한동대 부당징계 당사자. 비혼생활공동체에서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갓길: 같이 걷는 길> 등에서 활동합니다. 염치 아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 글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 ‘랑’(https://lgbtpride.tistory.com)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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