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아!

 

한 해의 끝이 벌써 다 지나가는구나. 일 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하루살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이 아쉽다.

이번 겨울에는 한 번도 오지 않은 작년의 첫눈을 기대해 본다.

찬 바람이 불고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이 오면 아버지는 마구간에 있던, 사람만큼이나 귀했던 황소를 나뭇간으로 끌고 왔어. 나뭇간은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고 같은 곳인데, 안방 아궁이와 땔감들이 비와 눈에 젖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어.

저녁이면 뜨거운 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그 위에 얹은 까만 바둑알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인 무쇠솥에는 소 콧김처럼 구수하고 따뜻한 쇠죽이 끓고 있었지.

주황색의 백열등 빛으로 가득 찬 나뭇간은 바지게 한가득 산에서 끌어 놓은 갈비와 아버지랑 내가 슬근슬근 톱질한 장작들로 가득 차 있었지. 솜사탕 같은 황소의 코에서는 허연 김이 나오고, 거기에 구수한 쇠죽의 축축한 습기까지 나뭇간을 꽉 채우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배가 부른 듯했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실컷 넣고,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빛나는 숯을 보고 있었어. 발그레한 볼 사이로 나오는 숨결 따라 사그라졌다, 살아나는 잿빛이 참 예뻤어. 한참 바라보면 슬픔과 고독 따위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 같은 것들이 생기는데,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조절하며 분위기를 잡아봤어.

여차하면 눈시울도 붉힐 수 있었지.

어머니의 다리를 베고 아랫목에 누웠어. 목단 꽃이 크게 그려진, 맨드라미 잎사귀 같은 밍크 이불을 덮고 있으면 산 너머 들려오는 기차 소리가 잦아지며 금세 잠이 들었어.

하루는 따뜻했던 방바닥이 식어 한기를 느끼며 잠을 깼는데, 아직 밖은 으스름한 빛을 내는 새벽이었어. 분명 어제저녁에 아버지가 아궁이에 불을 넣는 걸 봤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지.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이 더욱더 차갑게 느껴지고 콧잔등은 시렸어. 억지로 뒤척이며 잠을 청하다 아침이 밝았어.

“아버지, 왜 이렇게 추워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나뭇간으로 들어가셨어. 나도 병아리처럼 냉큼 따라 들어갔지. 아궁이 안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아버지가 괭이로 숯과 재를 긁어내셨어. 그리곤 쑥 하고 아궁이 속으로 손을 넣었지. 한참을 이리저리 씨름하더니 시커멓고 뻐덩하게 굳은 걸 끄집어내셨어. 그것도 두 마리나 꺼냈어.

털이 다 타버린 개 두 마리가 희번들한 눈을 하고, 시커먼 숯검댕이가 되어 죽어 있었어.

추위를 피해 나뭇간에 들어왔다가 저녁 무렵이 되니 아궁이가 따뜻하게 식어 거기에 들어간 거지. 그러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궁이에 불을 넣으니 연기와 화염을 피해 안으로 더 들어가고, 불이 더 활활 타니, 도로 나오지도 못하고 코르크 마개처럼 고래 구멍을 막고 죽어 버렸어. 그러니 아무리 불을 때도 불이 안 들고 방바닥이 식어버린 것이지.


언젠가 제주도에 있는 다랑쉬굴에 역사 기행을 간 적이 있었어.

1947년 제주 4.3 당시, 해안가 소개령을 피해 피난 갔던 피난민이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의 토벌대들에 의해 학살된 곳이지.

반세기 즈음 지난 뒤인 1992년 발굴, 조사되었는데 아홉 살 어린아이부터 오십 대 아주머니까지 11구의 유골이 발굴되었어. 그리고 밥을 해 먹고 생활했던 무쇠솥과 그릇, 바가지, 생필품 등이 발견되었어.

 

“토벌대들이 다랑쉬굴에 숨어 있는 피난민을 발견하고, 굴 입구에서 수류탄과 총을 쏘며 나오라고 했어” (증언 1.)

“11명 중 한 명이 나와 살려 달라고 했더니, 다리에 총을 쏘았어. 다시 굴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다 데리고 나오라 했지” (증언 2.)

 

피난민들은 나가도 죽을 것을 예감했어. 나갈 수가 없었지. 토벌대들은 말굽처럼 생긴, 입구가 두 개 나 있는 다랑쉬굴의 한쪽을 틀어막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류탄을 던지며 불을 질렀어. 입구에서는 화염이 일고, 한 치도 볼 수 없는 검은 연기와 비명이 좁은 다랑쉬굴을 가득 채웠어.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몰려 질식했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조선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과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어. 그 노력은 미군정(美軍政)의 이익에 맞지 않았지.

제주도민은 궐기했지만 ‘붉은 섬’이라 낙인찍고 배제하고 차별하며 대리인들을 보내 공동체를 파괴하고 초토화시켰어.

미국 군대가 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을 살육했던 것처럼.

 

조선총독부 경상북도지사 발행 전시농업요원 요원증. (1945. 4. 7)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자료.
조선총독부 경상북도지사 발행 전시농업요원 요원증. (1945. 4. 7)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자료.

자료는 해방을 불과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발행된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조영동에 사는 박 아무개를 전시 농업 요원으로 임명한다는 요원증이야.

1892년(명치 25년)생으로 당시로써는 노인으로 불렸던 54세의 나이였어. 아마 호적 신고 등의 늦은 행정을 추측해보면 환갑에 가까운 노인으로 생각돼. 일제는 이런 노인들까지 태평양전쟁의 전시 농업 요원으로 명하여 전쟁에 동원했지.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박 노인’에 대한 동원 정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

‘박 노인’이 씨를 뿌리고 한 해 농사를 시작했던 4월 봄이 지나고 몇 달 뒤 늦여름이던,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해방됐어.

‘박 노인’ 또한 해방을 맞이한 조선 민중들처럼 새로운 세상과 자주적인 나라를 꿈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예상이나 했을까, 해방 후 펼쳐지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이제 소율이한테 일제강점기 자료들을 소개한 지도 2년 정도 되어가는구나. 내년부터는 해방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이 시기는 5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라 자료와 유물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그래도 삼촌하고 재밌게 살펴보도록 하자. 올 한 해도 수고했고 코로나19 없는 건강한 새해를 맞이하자꾸나.

차가운 날씨 건강 잘 챙겨.

 

삼촌이.

 


*4.3항쟁 :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 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용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요약.)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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