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를 보며 오버랩 되던 자작나무. ⓒ이현정

애절하게 반짝이던 손톱달이 오늘 밤엔 상현달로 변했다. 목성도 황금빛을 발한다. 까만 밤하늘을 흔드는 창밖의 바람은 어둑어둑한 공간을 마구 휘휘 저어대고 있다. 공허해 보이는 흑색의 밤바람이다. 어둑한 가로등 불빛 아래 우두커니 선 뽀얀 전봇대는 지난 자작나무숲을 오버랩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가늘게 앙상진 자작나무 붉은 빛깔 숲 머리들이 빛바람을 타며 넘실거린다. 그건 넘치는 거품 가득한 하얀 파도를 일궈내는 모습과도 흡사하게 보인다. 줄줄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흰 기다란 막대들 말이다. 그렇다. 며칠을 집안에 묶여 있었으니 가슴이 답답해질 만하다. 하루가 멀다고 내디딘 곳은 숲이었다. 겨울이라 해서 다를 건 없지. 얄밉게도 파고드는 겨울바람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지만 이미 약속 장소에서의 내 두 손엔 함께하신 선생님이 건네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들려있다. 물론 차 문을 밀어제치는 순간 무자비한 바람은 세에악 솩솩하며 저 백야, 북극의 바람을 몰고 오는 것 같았다. 만주, 몽골 또한 유럽 등등을 휘저으며 살아온 자작나무들의 정령들이 꾸짖는 듯하다. 이 지구의 겨울을 모두 녹일 셈이냐면 말이다.

 

자작나무의 열매. ⓒ이현정

지난주 일요일을 뒤로 날씨는 더욱 건조해지고 영하의 기온이 바닥에 융단처럼 깔렸다. 그리고 그 위로 속절없이 흐르며 하얗게 지새운 바람은 어찌나 고집스러운 겨울바람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추위가 몰려올 때면 희고 흰 자작나무숲이 그리워졌던 것은 자연의 시계가 알람을 울려주는 것이었다. 내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기에. 고위도 북반구를 향해 질주하듯 뻗어있는 그곳의 자작나무들은 영하 40~70도를 버티며 살아간다는 소문이 흉흉했기에 난 시베리아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이미 두 분의 선생님들과 자작나무숲을 향하고 있던 투박한 등산화 소리는 도착했나 보다. 터덜터덜 오르던 걸음이 말라 부서지는 낙엽 밟는 소리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떨어졌을까. 자작나무의 익어 떨어진 열매들이 즐비하다. 역시 겨울의 사나운 바람을 오히려 역이용하는 것이 이들의 번식 전략이었나 보다. 투명하게 비치는 날개가 대견하기 그지없다.

 

자작나무의 씨앗. ⓒ이현정
자작나무의 투명한 날개가 달린 씨앗들. ⓒ이현정

하지만 자작나무 숲속은 비목나무의 어린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지극히 추측이 가능해진다. 자작나무의 흰빛이 서로를 데워주는 기능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남쪽의 일 년 내내 상록을 유지하는 녹나무과 집안의 아이들이 유난히도 많이 보인다. 따뜻함을 유독 좋아하는 아이들인지라 내년 여름의 숲을 살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 돼버린다. 아직 잔숨을 고르고 있다. 잔가지들이 마치 송곳처럼 찌르기도 하고 바짓가랑이와 옷소매를 붙잡고 비틀기도 한다. 함께한 두 분도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내내 나지막한 여린 비명을 삼키며 내 뒤를 따라 주신다.

그렇게 야생동물들만의 길 같은, 미로 같은, 그 복잡하고 거미줄 같았던 숲길. 한 번 가지가 우리를 붙잡으면 반드시 다른 손으로 떼어내어야 한다. 그렇게 스치며 걷고 또 걷는다. 이곳은 중산간 마을이다. 근처의 자작나무숲은 우리가 접근하기 좋은 두 군락으로 나뉜다. 그중 남향을 차지한 또 다른 자작나무 숲을 향했던 것이다.

 

자작나무의 껍질. ⓒ이현정
멀리서 보이던 자작나무의 어린 붉은 가지들. ⓒ이현정

빛들은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며 크고 작은 자작나무들을 기어오른다. 간지럽히는 바람이 있어 빛은 더 눈 부신 자작나무로 만들고야 만다. 자작나무가 너무도 환하게 보인다. 나 또한 하슬거리는 흰빛이 되고 싶어진다. 이들의 하얀 몸줄기는 얇디얇은 껍질이 벗겨도 벗겨도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벗겨진다. 우리가 얇은 옷을 겹겹이 입으면 더욱 보온성을 올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게 껍질을 입고 있다. 또한, 큐틴이라는 흔히 밀랍(왁스)이라고도 하는 성분이 세포와 껍질 속을 채우고 있다. 그러니 얼어 죽는 것은 이들과 거리가 먼 셈이 돼버렸고, 고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고 서로가 함께 살아남았던 이유인 것이다. 나에게도 겨울은 나를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내 속과 겉을 살찌울 기회로 다가온다. 내 몸과 마음을 탄력 있는 근육으로 살찌우고 그렇게 나는 겨울을 즐길 것이고, 자작나무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여기 이곳의 자작나무를 말이다.



서로를 비추는 자작나무들. ⓒ이현정

글 _  이현정 경주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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