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6)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두 본분이 ‘수업’과 ‘생활지도’라 했습니다. 이번 편지의 주제는 ‘생활지도’입니다. ‘좋은 수업’에 관한 것도 그렇고 교육에 관한 제 이야기의 대부분이 교육현장에서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통념을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좋게 말해 창의적인 글쓰기 혹은 혁신적인 교육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떤 면에선 다소간에 제 주관에 치우치는 경향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판에 박힌 이야기를 거부할지언정 일부러 상식을 비껴가려 애쓰는 사춘기적인 반항정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뜻은 없다는 사족을 남깁니다. 오히려 저의 문제의식은 항상 상식적인 차원의 가치론에 터해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주제인 ‘생활지도’에 대해서도 상식에 입각하여 이것이 교육현장에서 얼마나 왜곡되어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논할 것입니다.
   

 


현장 교사들이 교장·교감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생활지도’일 겁니다. 중등학교에서도 아마 '학력'이란 말과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으실 것이지만 초등에서 생활지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교육학에서 말하는 ‘생활지도’와 현장의 교사집단에게 각인된 ‘생활지도’가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교육학 책에서 다루는 생활지도의 범주는 진로지도 외에 학생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나 원만한 교우관계의 수립 따위에 관한 내용들로서 간단히, '학생상담'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교육실천들입니다.

그런데 현실 학교에서 통용되는 생활지도는 아이들 조용히 시키는 것이나 안전사고 안 나게 하는 것,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학교폭력 예방 따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처구니없게도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을 닦달해 가며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식의 교사가 생활지도에 유능한 선생으로 인정받습니다. 어떤 교실 옆을 지나다보면 쉬는 시간인데도 아이들 숨소리만 들리는 그런 학급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 선생님은 “해마다 내가 맡는 학급은 3월 한 달만 지나면 고시촌 분위기로 만들 수 있음”을 자랑삼아 말씀하시곤 합니다. 창백한 교육학 서적이 생활지도의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바로 이 모습이 21세기 한국 학교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육학에서 말하는 생활지도의 개념과 ‘교육의 실제’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지도 사이에 왜 이렇듯 심각한 괴리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나는 무엇보다 최초 그릇된 언어 사용법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보며 따라서 문제의 처방 또한 그것을 바로 잡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지도란 개념은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상 특정 시기에 이르러 생겨난 산물입니다. 구체적으로 서구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청소년 학생들의 직업진로교육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즉 생활지도는 물 건너온 개념이기에 그 개념이 최초에 어떤 어법으로 구성되어 있었던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쉽게 말해 영어와 우리 말 번역문을 대조해보자는 겁니다.

우리 교육학 책에서 소개하는 ‘생활지도’란 말의 원어는 'life guidance'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외래의 개념이 원래는 ‘삶의 안내’인데 물 건너와서는 ‘생활 지도’란 개념으로 변질되어 유통되고 있으며, 그것도 부족해 교육현장에서는 ‘지도’도 아닌 사실상 ‘통제’로 둔갑하여 실천되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진다 하겠습니다.
 

 


‘life guidance’에서 ‘guidance’란 말을 최초에 누가 어떤 목적으로 ‘안내’가 아닌 ‘지도’란 말로 옮겼을까요? 그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 이 말은 우리나라 학자가 옮긴 것이 아니라 일본 학자가 옮긴 것을 우리가 그대로 차용해서 현재까지 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초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그 중대한 오역을 우리 교육학자들이 계승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한국의 독재정권의 속성상 ‘삶의 안내’란 개념을 의도적으로 ‘생활지도’로 옮길 필요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상식적으로도 guidance는 '지도'가 아닌 '안내'로 옮겨야 정상적인 번역입니다. 예를 들어, '여행 가이드'를 '여행 지도자'라 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도'와 '안내'는 어감부터 다를 뿐더러, 교육사상사가 발전해온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개념의 차이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도(指導)’는 영어로 'direction'입니다. 'direction'이란 단어의 가장 흔한 뜻은 '방향'이죠. 그래서 ‘지도’란 개념은 “(지도자의 주도하에) 학생들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감”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반면, ‘안내’는 그 방향설정의 주체가 지도자(교사)가 아닌 학생(즉, 자기 삶의 주인)인 점에서 둘은 개념적으로 크게 다릅니다. 지도와 안내의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구별하자면, 마침표와 물음표의 차이라 하겠습니다. 마침표가 하고자 하는 말의 끝마침을 뜻하듯이 지도에서는 방향설정이 화자(話者)에 의해 종결되는 반면, 안내는 청자(聽者)에게 열어놓고 있습니다. 요컨대, 지도는 “이리로 와.”라면, 안내는 “뭘 도와줄까?”가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역사에서 어린이(현대적으로는 ‘청소년’을 포함해서)를 삶의 주체로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life guidance'는 루소 이전의 시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루소 이후 몬테소리나 죤 듀이에 이르러 '아동중심교육'이란 교육사조의 성립과 더불어 탄생한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리네 학교에서 'life guidance'는 ‘생활지도’로 옮겨짐으로써 전근대적인 개념정립과 함께 그에 조응하는 식민지적 발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삶의 안내’가 ‘생활의 통제’로 둔갑하여 아이들은 물론 교사들도 대부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복도에서 양손을 뒤로 한 채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걷는 1학년 아이들의 모습은 몬테소리가 말한 ‘나비’ 바로 그것입니다. 100여 년 전 몬테소리는 교사의 딱딱한 지시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표본상자 속에 핀으로 붙박은 나비에 비유하면서 당대의 억압적인 교육현실을 슬퍼했죠. l

ife guidance는 "실의에 빠진 아이의 손을 붙잡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그런 교사의 자세인데, 우리네 학교에서는 실내화 신고 바깥출입 못하게 하는 것이나, 약간이라도 개성을 발휘하는 청소년 학생의 복장을 단속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음에 통탄합니다. 이건 교육이라 할 수 없고, 최고로 좋게 봐서 '훈육(discipline)'도 아닙니다. ‘아동학대’라 고백해야 합니다.

 

 


건강한 실천은 건강한 마인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건강한 마인드는 건강한 개념 정립에서 출발합니다. 올바른 앎이 올바른 교육실천을 이끄는 것이죠. 우리는 아는 만큼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생활지도’란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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