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나 크리스마스가 아닌 12월 23일이 기다려진 해는 처음일 것이다. 그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테이블 주변을 치우고 박스 속에 숨어 있던 알전구를 꺼내 창문 커튼에 달았다. 케이크도 주문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케이크 전문점이었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먹는다는 부쉬드 노엘이라는 케이크를 시즌 한정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집에서 모임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그것도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맞다. 모임이다. 독서모임. 그런데 우리 집에 모이는 건 아니다. 온라인 독서모임이다.

몇 주 전, 북스타그램을 하면서 알게 된 분께서 1회 성 온라인 독서모임을 개최한다는 게시물을 올리셨다. 서로의 리뷰에 댓글을 달 때도 있었고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의 친분이 있던 분이었다. 북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싶단 생각을 해왔기도 했고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누군가를 대면해서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 보니 쓸쓸한 연말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북스타그램으로만 알던 사람들을 처음 보는 자리임에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선착순 6명을 받았는데, 딱 마지막 신청자가 되었다.

 

주최자님이 직접 만드신 포스터

주최자가 선정한 책은 백수린 작가의 <다정한 매일매일>이었다. 빵을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하고 싶은 책과 그 책에 어울리는 빵에 관한 이야기를 몽글몽글 맛있게 풀어낸 에세이다. 주최자는 이 책을 읽는 것 이외에도 참여자에게 한 가지 더 주문했는데,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 중 한 권을 선택해 읽고 모임원들에게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에 두 권을 읽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정한 매일매일>을 다 읽은 뒤 소개할 책을 선택한다면 너무 늦을 것 같아, 목차를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책 제목을 골라 함께 주문했다. 독서모임 준비의 시작이었다.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짬짬이 독서모임 책을 읽었지만, 당시 읽어야 할 다른 책들과 병행하면서 읽느라 쉽지 않았다. 읽어야 할 책을 다 읽고 나면 자야 할 시간이 되는데, 그 시간을 줄여 조금씩 읽어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책 내용이 어렵지 않고 흥미롭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12월 23일이 다가올수록 읽어야 할 페이지는 점점 줄어들었고 설레는 마음은 커갔다. 드디어 독서모임 전날 밤, <다정한 매일매일>은 다 읽었고 추가로 읽어야 할 책은 30페이지 정도 읽은 채로 준비를 마쳐야 했다. 조금 더 열심히 읽을 걸 아쉬움이 남았지만, 내일을 기다리며 가장 좋았던 문장과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을 마음속에 정리해두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12월 23일이 되었다. 일하는 내내 저녁에 있을 독서모임과 퇴근 후 가지러 갈 케이크 생각에 신이 났다. 나를 제외한 5명과 주최자는 어떤 분일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다들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만 해도 설레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정말 만연하긴 했나 보다. 확진자가 지난주 우리 사무실에 다녀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입구에서 물건만 전달하고 가셨다는데 그 접촉자 중 한 명으로 내가 지목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스크를 쓴 채로 잠시 대화한 게 전부이고 신체 접촉도 없었기에 감염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멘탈 붕괴였다. 당장 선별 진료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감염되었으면 어떡하지, 누군가를 감염시켰으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터덜터덜 걷다가 불현듯 주문해놓은 케이크가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새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른다. 부랴부랴 케이크 집에 연락해 케이크를 가지러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혹시 퀵으로 받을 수 없느냐고 양해를 구했고 다행히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퀵으로 받기로 했다. 자 케이크는 해결되었겠다, 이제 무얼 준비해야 하나. 평소 같았으면 예상 시간보다 일찍 퇴근했다며 신이 났을 텐데 그날은 그게 잘 안됐다. 멍한 채로 소파에 앉아 핸드폰만 잡고 있었다. 온라인 독서모임은 9시. 8시 반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나 노트북을 꺼내 열었다.

 

부쉬드 노엘 케이크

시간이 다가오니 그제야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정신이 좀 들었다. 손이 바빠졌다. 노트북에 온라인 화상 프로그램 줌을 실행시켜놓고 그 앞에 케이크를 가져다 놓았다. 옆에는 함께 마실 음료를 예쁜 잔에 따라 두었고 독서모임 책 두 권도 가져다 놓았다. 울상인 얼굴에도 양볼을 두드려 미소를 만들었다. 준비 끝. 시계를 보니 8시 55분이다. 떨렸다. 몇 개월간 북스타그램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다니. 분명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부담이 덜했지만, 낯가림이 덜한 건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참여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까매지고 다시 빛이 차오르는 순간 꽃봉오리가 열리듯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노트북 창에 피어올랐다.

10시 30분에 끝나기로 했던 독서모임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마무리를 지었다. 주최자가 시간에 맞춰 끝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밤새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12월 23일 겨울밤. 우리는 각자 화면 앞에 앉아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나눴고 <다정한 매일매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낭독했다. 공감될 때는 격한 끄덕임을,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물개 박수를 치며 마음을 나눴다. 생김새도 인상 깊은 구절도 각자 다 달랐지만 모임 내내 함박웃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은 꼭 같았다.

 

우리를 이어준 <다정한 매일매일>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면서 오늘 모임에 대한 소회를 나누기로 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할까 말까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선별 진료소에서 검사를 받았다고, 무사할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모임 전까지도 멍했다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모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고 말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많은 모임이 취소되었고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한동안은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것과 단절되었다고 느꼈던 그때, 이렇게 온라인 독서모임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 그 위로가 너무 고맙다고 전했다. 정말 고마운 시간이었다.

 

온라인 독서모임 기념사진

모임을 처음 제안해 준 분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일회성으로 끝나기 아까운 모임이라며 한 번 더 하자는 우리들의 요구가 이뤄질진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의 글에 전보다 더 애정을 가지며 읽고 댓글을 단다. 책을 읽은 뒤 꼭 리뷰를 쓰자는 다짐으로 시작한 북스타그램이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 있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따뜻한 연말을 보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를 만나게 해준 책에게도 고맙고 우리를 엮어준 북스타그램에게도 고맙다. 앞으로 또 어떤 인연들과 책으로 만나게 될까, 행복한 상상을 떠올리며 오늘도 북스타그램 태그를 건다.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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