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사람 사이의 접촉을 위험하게 했다. 고립과 고요한 사유의 틈으로 언제나 그리워했던 자연, 텃밭, 자급자족, 공동체, 치유센터, 평화학교 건설, 영혼의 집으로 향하는 강한 열망이 떠올랐다. 나는 그곳으로 성큼 다가갔다. 원래 계획보다 2년을 앞당긴 셈이다.

마음을 먹고 집을 보러 다닌 지 이틀째, 청도 온막리. 저 건너엔 산들이 둘러있고 산 아래로 집들이 울타리처럼 늘어서 있으나 집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오후 햇살은 잔디 깔린 마당에 가득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 도랑이 흐르고 흙과 잔디로 길이 나 있다. 집과 밭이 ‘바로 여기야!’ 하고 속삭였다. 집 안에 화장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조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실 본다고 해도 건축에 대해 나는 잘 모르니– 다음 날 가서 계약을 했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고도 은행에 빚을 한참 내야 했고, 공동체를 꿈꾸며 같이 공부하는 도반과 함께 살기로 했다.

2월에 이주를 하기로 했다. 청도로 이사 가는 이야기를 했더니 시골살이에 대한 글을 연재해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글쓰기에 게으른 나로서는 원고 마감이 나를 글 쓰게 할 것이고, 생판 낫과 호미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농사 무식쟁이가 숲밭을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또 누군가에게 생태적 삶으로 안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재를 수락했다.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는 생태적 삶과 영혼의 집을 가꾸는 정원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풀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 정원에 사는 동물들 이야기, 마당을 노닐다가는 바람과 물과 햇빛과 별과 달, 그곳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이야기들. 무엇이 어떻게 오고 누구와 만나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기도하며 감사하는 나날들이 올 것이다.

이주를 기다리며 농사일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땅을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착취하지 않고 생명력을 키우는 농법이 있을까? 어떤 풀을, 나무를 심을지. 어떻게 가꿀지. 울타리에 어떤 나무를 심는 것이 좋을지….

약초학과 생태농법, 자급적 생산양식을 고민하며 퍼머컬쳐*를 만났다. 줄 세워 하나의 식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식물과 곤충들이 서식할 수 있고 최소한의 노동으로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숲밭을 만드는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에 대한 정보들이 너무도 다양하고 많다.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산에 들에 자라나는 풀들 중 무엇을 먹을 수 있고 약이 되는지. 지천으로 피어난 개망초를 봄부터 가을까지 먹는 법들을 배우고 상상하면 가슴이 뛰고 설렌다. 아침에 일어나 아사나**를 하고 낮엔 식물들을 가꾸고, 밭에서 난 야채와 과일로 밥을 지어먹고, 저녁이면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고 밤이면 글을 쓰고.

호미를 들어보기도 전에 책으로 농사를 배우는 게 어리석다 싶으면서도 설렘을 가지고 책 읽기 모임에 합류했다. ‘퍼머컬쳐’ ‘생태숲밭’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함께하는 책모임은 ZOOM에서 이루어진다. 월요일 밤이면 경산에서 강원도, 서울, 제주에 사는 이들과 만나.

 

 

지금 읽는 책 『향모를 땋으며』***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다. 풀과 동물들과 흙과 물, 바람과 사람이 하나의 숲으로 어우러진 세상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세상에 처음으로 씨앗을 전해준 하늘 여인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자급자족의 삶을 찾아가는 나에게 어떻게 농사를 짓고 어떻게 누리고 기도하며 감사할지 가르쳐준다. <하늘 여인 강림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다.

 

여인은 단풍나무 씨앗처럼 가을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졌다. 하늘 세상의 구멍에서 빛기둥이 내려와 어둠 속에서 여인의 길을 밝혔다. 여인은 한참을 떨어졌다.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희망 때문이었는지 여인은 꾸러미를 꽉 붙들었다.

추락하는 여인에게 보이는 것은 아래쪽의 시커먼 물뿐이었다. 하지만 그 공허 속에서 많은 눈이 난데없는 빛줄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물체로 보였다. 빛살 속의 먼지 알갱이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물체는 점점 커지더니 이제 여자로 보였다. 팔을 활짝 벌린 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펄럭거리며 그들을 향해 맴돌며 떨어지는.

기러기들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러기의 노래’가 물결치는 가운데 물 위로 솟구쳤다. 여인은 추락하는 자신을 받아주려고 날아오른 기러기들의 날갯짓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알던 유일한 집에서 아득히 멀어진 채, 여인은 자신을 살며시 내려주는 기러기들의 보송보송한 깃털에 포근하게 안긴 채 숨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러기들은 여인을 물 위에 오랫동안 띄워둘 수 없었기에 대책을 마련하려고 회의를 소집했다. 여인은 기러기들의 날개에 앉은 채 아비, 수달, 고니, 비버, 온갖 물고기가 모여드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무리 한가운데를 가르며 헤엄쳐 오더니 여인에게 등을 내밀었다. 여인은 고마워하며 기러기 날개에서 거북 등딱지로 발을 내디뎠다. 짐승들은 여인이 보금자리로 삼을 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의논했다. 물속 깊이 잠수할 수 있는 짐승들이 물 바닥에 진흙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찾으러 가기로 했다.

아비님이 맨 먼저 뛰어들었지만 수심이 하도 깊어서 한참 뒤에 빈손으로 올라오고 말았다. 수달님, 비버님, 철갑상어님 등 다른 짐승들도 하나씩 나섰지만 수심과 어둠과 수압은 아무리 헤엄을 잘 치는 이에게도 버거웠다. 다들 머리가 띵하거나 숨이 찬 채로 돌아왔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수 짐승 중에서 가장 약골인 꼬마 사향뒤쥐님만 남았다. 그가 내려가겠다고 나서자 다른 짐승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향뒤쥐님은 작은 다리를 바둥대며 아래로 헤엄치더니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모두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까 봐 걱정하며 사향뒤쥐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머지않아 보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작고 흐느적거리는 몸뚱이가 올라왔다. 이 힘없는 인간을 도우려다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그때 다른 이들이 사향뒤쥐님의 주둥이가 꽉 다물려 있는 것을 보았다. 주둥이를 열자 진흙 한 줌이 들어 있었다. 거북이 말했다.

“진흙이 쏟아지지 않게 내 등에 얹어 줘.”

하늘 여인이 몸을 숙여 진흙을 거북 등딱지에 펴 발랐다. 여인은 짐승들의 특별한 선물에 감동받아 감사의 노래를 부른 뒤에 발로 흙을 어루만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인이 감사의 춤을 추는 동안 거북님 등딱지의 한 줌 진흙이 점점 커지더니 온 대지가 창조되었다. 하늘 여인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뭇 짐승의 선물과 그녀의 깊은 감사가 어우러진 연금술의 결과였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거북섬으로 알려진 우리의 보금자리가 생겨났다.

여느 반가운 손님처럼 하늘 여인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여인은 그때까지도 꾸러미를 꽉 쥐고 있었다. 하늘 세상 구멍에서 떨어질 때 그곳에서 자라는 생명나무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여인의 손에 잡힌 것은 온갖 식물의 열매와 씨앗이 달린 가지였다. 여인은 열매와 씨앗을 새 땅에 뿌리고 정성스레 돌봤다. 이윽고 세상은 갈색에서 초록으로 물들었다. 하늘 세상 구멍에서 햇빛이 쏟아져내려와 씨앗을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들풀, 꽃, 나무, 약초가 온 사방에 퍼졌다. 먹이가 많아지자 많은 짐승이 거북섬에 찾아와 여인과 더불어 살았다. (향모를 땋으며, P.15~18)

 

봄이 오고 푸른 풀들 돋아날 때 우리의 온막리 밭에서도 사람들과 ‘열매와 씨앗을 새 땅에 뿌리고… 발로 흙을 어루만지며 춤을 추리’ 라.

 

2021. 1. 25. 경산에서

 

글 / 이은주 (65년 성주 생, 동화작가, 여성주의 사이코드라마티스트, 이은주힐링드라마아트센터 대표, 경산여성회 회장.)


* 퍼머컬쳐 :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영속농업, 혹은 영속문화라고 할 수 있다. 『퍼머컬처』 (데이비드 홈그렌 저, 보림출판사, 2014)의 저자 데이비드 홈그렌은 퍼머컬처를 ‘자연에서 발견되는 패턴과 관계를 모방해서 지역에서 필요한 음식, 섬유, 에너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설계한 경관’, 혹은 ‘위에서 말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체계론적 사고방식과 설계 원리’라고 정의한다.

** 요가 아사나는 자신의 육체를 이해하고 육체를 통하여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자세 행법이다. 육체 훈련을 통해 마음작용을 살피면서 내면의 성찰과 자각을 통해 자신을 성장 시켜나가는 운동이다.

*** 향모를 땋으며( 『BRAIDING SWEETGRASS』, 로빈 월 키머러 저, 에이도스, 2020)는 ‘북아메리카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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