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 미안해’. 학대로 죽은 아이를 살려내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이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 사회가 이토록 아이들을 끔찍이 위하는 곳이었던가. 그런 곳에서 아동 학대는 왜 숨 쉬듯 일어나는 것인지. ‘아직 죽지 않은’ 아이들의 고통에는 더할 나위 없이 무심한 사회가 죽은 아이에게 보내는 통곡은 어쩐지 네크로필리의 냄새가 난다.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만을 지칭하는 학대의 개념은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은 만연한 학대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것이 학대가 아니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고등학생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대학생들부터 부모가 된 중년들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사악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로 ‘애들은 맞아야 한다’고 단언하던 수업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기 때문에, 미성숙하기 때문에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도 맞은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학습지를 안 해서’, ‘말을 잘 안 들어서’, ‘욕을 해서’, ‘거짓말을 해서’ 같은 것들이다. ‘맞을 짓을 해서’로 요약되는 이 이유들은 밥 먹듯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어른들이 오로지 아이들을 때리기 위해 만들어낸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들은 맞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바르게 클 수 있었다고 다시 입을 모은다. 어릴 때 몇 번 맞은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별것 아니었다고도 말한다. 폭력의 가장 무서운 효과는 폭력 자체에 대한 망각이다.

좀 더 ‘부드러운’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때리기보다는 벌로 책을 읽게 하거나 ‘좋은 말’로 설득한다는 것이다. 별다를 것 없는 두 방안은 모두 부모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법’을 따르지 않는 아이를 때리고 훈계하고 지배할 자격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사랑의 매’라는 오래된 수사는 모든 폭력이 그 자체로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어른이나 타인의 아이를 때려서 교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 설령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 하더라도 이런 행동을 ‘자신의’ ‘아이’가 아닌 사람에게 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물인 절대적 약자에 대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가장 끔찍한 효과는 폭력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 수업에서 각자의 ‘옳지만 쉽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예기치 않은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글썽이는 눈물을 동반한 ‘효도’라는 답이었다. 효도는 옳은 것일까? 효도는 사랑일까? 앨리스 밀러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데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네 번째 계명, 그리고 폭력을 사랑으로 둔갑시키는 기만으로 인해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파괴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내면화된 부모와 헤어져야 한다”고. 마루야마 겐지는 부모를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도 한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정인이’의 ‘보호’인가, ‘해방’인가. 어른들이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방하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탈리아인들을 따라 아마존에 가게 된 진 리들로프는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서구의 문명사회와 정반대에 있는 예콰나족과 생활하게 된다. 어느 날 그녀의 일행과 함께 있던 예콰나족의 어른들이 자리를 뜰 때 한 아이가 자신은 어른들과 함께 가지 않고 낯선 사람인 리들로프 일행과 동행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이의 결정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것을 방지하거나 고쳐놓으려는 문명사회와 달리 예콰나족은 아이들이 사회적 존재이므로 공동체의 기대에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전제 위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설득을 통해 자기 뜻대로 아이들의 고유한 의사를 바꾸려 드는 것은 그들의 문화에서는 교묘한 조종이나 위협으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단지 문화적 요인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놀랍게도 예콰나족의 아기들은 울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 속에서, 자연이 빚어낸 진화 과정의 연속성 위에서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이다. 자연도, 해방도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한 비혼모가 촉발한 ‘낳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들과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분노와 눈물들이 한없이 공허하다.



글_ 김혜나 대구대학교 연구중점교수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