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를 즐기기 위한 열쇠(들)

 

"승리호" 영화 포스터 이미지

1_ 본격 우주 SF 영화, 발사되다

 

2021년 2월 5일, <승리호>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코로나19의 여전한 영향으로 1년 전만 해도 명절 대목을 누렸을 극장가 대신 많은 이들이 안방에서 <승리호>를 만났다. 한국만 그런 상황은 아닌지라 전 세계적으로 넷플릭스 자체 공개 영상물 중 부동의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이 본격 우주 SF 영화는 원래 작년 5월 극장 개봉을 예정하고 국내 작품으로는 240억이라는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 속칭 ‘천만’ 영화를 꿈꾸던 블록버스터였다. 하지만 코로나 여파로 2번의 개봉 연기를 치르고 끝내 넷플릭스 제휴로 급선회해 공개에 이르렀다. 제작비에 추가로 30% 정도의 수익을 내긴 했지만, 원래 의도처럼 큰 재미를 보진 못한 셈이다. 이런 유형의 블록버스터는 1년 전만 해도 ‘스크린 독과점’이란 논란에 휩싸일 만큼 대규모 홍보나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과 제휴를 통해 단기 승부를 걸고, 대박과 쪽박 사이의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런 측면에서 근래 가장 큰 기대주였던 <승리호>의 넷플릭스 직행은 여러 가지로 코로나 이후 영화산업 향방에 많은 논점을 던진다.

 

"승리호"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승리호 스틸 이미지

<승리호>는 넷플릭스 직행 속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고른 인기를 누리며 순항 중이다. 국내에선 이전 같은 흥행공식을 구사하지 못했지만, OTT를 통한 전 세계 동시 공개를 통해 파급효과는 오히려 더 극대화되었다. 240억이라는 한국 영화 기준으론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할리우드 기준으론 저예산 영화로 분류되는 규모다. 꽤 근사한 시각적 효과와 무난한 완성도, 그리고 기존 서구 SF 영화와는 차별화되는 몇 가지 개성 등으로 전반적인 호평이다.

물론 <승리호>의 기본 얼개는 서구 영화에선 이미 120년 동안 축적된 해당 장르의 기본 구조와 전통에 충실한 편이다. 그러나 그게 단점은 아니다. 애초 SF라는 장르 자체가 근대 서구적 전통과 제국주의 영향 아래에서 태동한 것이고, 그 영향 아래에서 다양한 해석이 추가로 변주되며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소소한 장르 문법의 활용은 시도됐지만, 시각예술 매체라는 영화의 특성을 극대화하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대자본을 들여 ‘제대로’ 만든 SF 영화가 기본적인 완성도와 식상하지 않은 이야기로 선보인 것 자체가 ‘출발’의 의미가 크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고, 너무 상세하게 줄거리와 결말을 소개하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된다. 그래서 이후로는 <승리호>에서 등장하는 개념과 설정들에 대한 약간의 풀이로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한 작은 TIP을 소개할까 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해당 장르에선 길게는 한 세기 넘게 축적되어온 개념들이 <승리호>에서 전통의 재해석을 거쳐 136분 동안 즐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승리호"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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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 키워드 조각 모음

 

궤도 엘리베이터

영화 초반에 승리호의 조종사 태호는 무일푼이라 출근을 위해 일터로 가기 위한 차비 마련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인다. 환경이 오염되어 마스크를 써야 제대로 호흡이 가능할 지경인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구에서 그의 일터인 우주 공간으로 이동해야 하는 여정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우주왕복선이 아닌 엘리베이터 형태로 이뤄진다. 바로 ‘궤도 엘리베이터’이다.

지구는 대기권을 유지하고, 중력과 오존층 등으로 우주에서 내리쬐는 자외선이나 운석 등을 막아내 생명이 탄생하고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반대급부로 우주로 뭔가를 보내려 하면 그 차단막을 돌파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 인공위성이나 우주왕복선 무게는 대기권과 성층권을 통과하기 위한 추진체 로켓과 비교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최적 지점 또한 특정한 몇 군데로 제한된다. 지구에서 우주로 나가는 과정에서 로켓이나 발사체에 가해지는 압력과 피로도 또한 상당해 대부분은 일회용이 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새로 발사하는 부담은 요즘처럼 인공위성이 현대 문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정확히 현재의 발사체 투발 방식과 대척점에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엘리베이터는 고층 건물 내의 이동 수단으로 설치된다. 그러나 궤도 엘리베이터는 이동 수단으로서의 엘리베이터를 올리기 위해 건조가 이뤄지는 식이다. 대기권과 성층권을 관통해 우주 공간까지 직통하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이다. 엄청난 공학 기술과 신소재, 천문학적 예산이 소모될 테지만 일단 안정적으로 설치만 된다면 직접 로켓을 쏴댈 필요가 사라지며 일상적으로 우주 공간으로 진출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초고층 건물에서 가끔 접하는 고속 엘리베이터의 초대형 설정이라 보면 되겠다.

 

우주 거주구

<승리호>의 세계에서 95%의 인류는 여전히 환경오염이 극심한 지구에서 살지만 5%는 우주 거주구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 물론 우주 공간에 거주하는 이들이 모두 이런 혜택을 누리진 못한다. “시민”과 “비非시민”의 구분은 엄격하다. 시민은 정작 지구에선 사라진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쾌적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지만, 비非시민은 개인 주거나 물자 측면에서 턱없이 제한된 조건 하에 시민들이 거주하는 우주 거주구의 유지 보수와 운영을 위한 노동에 종사한다.

우주 거주구는 지구와 달의 중력이 교차해 안정적인 공간을 이루는 지점 곳곳에 건설되며 고도로 인위적이고 청결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마치 당대 한국의 온갖 브랜드 이름이 붙은 고급 아파트 단지의 미래사회 풍경에 가까워 보인다. 우주 거주구의 ‘시민’들은 <기생충> 속 박 사장 가족과 닮은 꼴이다. 이들은 바깥 상황에 대해 잘 모르거나 편향된 정보만을 접하며 안락한 삶을 누린다. 그런 그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종사하는 ‘비非시민’들은 철저하게 시민과 격리된 공간에서 일하고 살아간다. 영화 초반에 목숨이 위험한 우주 쓰레기 수거 업무를 맡은 청소부들이 우주 공간에서 벌이는 사투가 우주 거주구의 시민들에겐 그저 인공천장에 뭔가 툭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승리호"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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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쓰레기-청소부

우주는 엄청나게 넓고 광활해 쓰레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현재도 드넓은 바다 곳곳이 해양 쓰레기 문제로 몸살을 앓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태평양의 거대한 ‘쓰레기 섬’처럼 영화 속에서는 중력 관계로 우주 쓰레기가 모여드는 거대한 공역이 있고, 과거에 인간들이 쏘아 올려 지구궤도를 빠른 속도로 공전하는 폐기물들이 무수하게 적체되어 있다. 우주공간 전체가 아닌 몇몇 특수공역에 집중되거나 회전하는 우주 쓰레기들은 안정적인 우주선의 항행이나 거주구 유지에 큰 위해가 되기에 ‘청소부’라는 직종이 탄생한다. (일본 만화로 국내에도 발행된 <프라네테스>가 이런 설정의 선각자 격이다)

 

"승리호"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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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를 비롯한 청소부 우주선들은 집게손 같은 기계로 고속으로 회전하는 위험 쓰레기를 수거해 폐기하고 생계를 이어간다. 이들은 우주 거주구의 안전을 책임지는 핵심 업무에 종사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비非시민들로, 일종의 외주 업무를 맡은 격이다. 영화 속 승리호 승무원들이 우주선 개조 비용 때문에 돈독이 올라 있고, 후반에는 차압 딱지가 붙을 정도인 걸 보면 쓰레기 수거 업무를 위한 우주선은 자기 비용으로 조달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쓰레기 수거 비용 또한 건당으로 그것도 아주 짜게 책정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아닌가? 즉 이들은 <미안해요, 리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자영업자의 외피를 뒤집어썼지만, 실제론 ‘플랫폼 노동’, ‘긱-이코노미’ 하청노동자들이다. 영화 속 설정 시간대는 서기 2092년이다. 71년이 지난 뒤에도 ‘위험의 외주화’는 우주공간으로 확대되었다.

 

세계화-만능 통역기

영화 속 세계에는 기존의 국가 체계는 비중 있게 등장하지 않는다. 국가가 해체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나 지구 자체가 막장이 된 상태라 겨우 명맥만 유지하거나 붕괴한 상황으로 보인다. 환경 문제나 생존을 위한 극한의 조건에 처한 상황을 그린 미래사회 묘사에서는 기존의 인종이나 성별,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차별보다는 경제적 조건이나 지적-기술적 능력을 지표로 차별 기준이 단순화된다. 얼핏 보면 능력지상주의에 가까워 보일 경우가 많은데 <승리호> 설정 또한 이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간 경계나 국적이 별 의미가 없는 사회상을 반영해 우주 공간에서도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사는 풍경이 묘사된다. 영화 속에선 요즘 유행하는 블루투스 이어폰 같은 걸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착용하고 있다. 이것은 설정상 만능 통역기이다. 그래서 서로 각자의 모어를 구사해도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선 ‘세계화’가 적어도 기술 측면에선 제대로 구현되는 상황이다.

 

"승리호"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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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는 영화 속 다언어 활용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승리호>의 승무원들은 한국어를 당연히 쓴다. 대기업 UTS의 임원진들은 영어로 대화하고, 우주 청소부들은 여러 가지 현실의 주요 언어들이 난무하는 만담을 나눈다. 비밀 연락을 위해 음성변조로 진행되는 의사소통은 스페인어로, 콜라 주문받는 직원은 필리핀 따갈로그 어로 대사를 전한다. 불심 검문하는 경찰은 덴마크 어로 심문을 진행한다.

특히나 해외에서 화제가 된 것은 조연 캐릭터인 ‘카룸’인데 그는 나이지리아 피진 영어를 구사한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에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화제작에서 나이지리아에서 토착화된 피진 영어가 상당한 분량으로 나왔다는 게 한창 큰 이슈라고 한다. 당연히 한국어 아니면 영어 위주일 것이라 단정하고 영화를 보다가 많이 놀랐던 부분이다. 넷플릭스 소개다 보니 자막 처리 등도 세세한 편이라 군데 군데에서 언어 활용을 확인할 수 있다.

 

"승리호"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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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S(Utopia above The Sky)

영화 속에서 사실상 지구권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집단은 기존의 국가를 대신한 초거대 우주개발기업 “UTS”이다. 우주 거주구와 궤도 엘리베이터 등 시설은 모두 UTS의 통제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며 우주로의 이민 계획 결정판인 화성 개발 또한 이들의 주도하에 이뤄진다. NASA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이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로 화성을 인간이 살기 적합한 공간으로 만드는데 현재 화폐 가치로 3조 9천억 달러가 들어간다는데 이 기업은 그걸 단독으로 행할 정도다.

UTS는 단순한 경제력 집중을 넘어 SF에서 흔히 등장하는 설정인 ‘기업 국가’의 형태를 보여준다. ‘시민권’ 여부를 결정하는 집단이 국가가 아니라 기업인 데다, 우주 공간의 거의 대부분 공공서비스 책임을 UTS가 ‘원청’으로 책임진다. 치안 또한 기업의 행정경찰(이들 또한 ‘비非시민’이다)이 담당하며 기업에 중요 사건에는 UTS가 운영 주체인 ‘기동대’가 출동한다. 이 기동대는 현실의 경찰특공대 수준을 넘어 중화기와 우주 전투기까지 대량으로 운용하는 기업군대에 가깝다. 설정 놀음으로 종종 등장하던 ‘기업국가’가 제대로 시각적으로 구현된다.

 

강화복

UTS의 기동대는 승리호의 조종사 태호가 원래 UTS의 인재 육성 프로그램으로 지구에서 영재 후보로 구매(?!) 되어 기동대장을 했었다는 설정처럼 소수 정예로 운영된다. 이들은 경찰이라기보단 군 특수부대 역할로 등장하는데 무력 사용이나 인명 살상에 별다른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다. 수는 많지 않지만 첨단 장비와 고도로 훈련된 면모를 보이는데, 이런 묘사는 독창적이진 않다.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여러 매체에서 유사한 유형의 미래 군인들을 선보인 바 있다. 동명의 영화로 더 유명한, SF의 거장 로버트 하인라인의 고전 반열에 오른 1959년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등장한 일당백 정예 병사들의 ‘강화복’이 그 선구적 예시다.

현실에서도 ‘택티컬’이란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보통 군인들보다 뭔가 첨단 장비를 빼입은 특수부대원 사진이 외국의 전쟁이나 군사력 소개 때 종종 등장하곤 하는데 강화복은 그런 개념의 미래형 종합판이라 보면 되겠다. 강화복은 추위나 더위, 우주 환경에서의 적응 능력을 부여하고 통신기와 컴퓨터 등이 일체화된 복장에 더해 인간의 신체 능력을 보조하는 동력 기관과 외골격이 제공되어 보통 인간의 몇 배 신체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현재 한국을 포함 군사강국이라면 거의 모두 연구 및 실물 화 초기 단계에 이미 들어간 상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UTS 기동대는 마치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것처럼 비인간적 살상과 무적과도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데 이런 ‘무적성’은 현대 미군이 3세계 분쟁에 개입할 때 기본적으로 취하려는 면모와도 판박이다. 또한 후반부에서 승리호와 일전을 벌이는 우주 전투기들은 대부분이 인공지능 드론 형태를 취하는데 이런 면모 역시 현재 세계 각국이 무인기를 본격적으로 전투 업무에 활용하기 시작하는 것의 발전된 형태라 하겠다.

 

검은 여우단

영화에는 UPS가 장악한 언론에 의해 반사회적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규정된 ‘검은 여우단’ 조직이 등장한다. 이 조직은 수소폭탄을 내장한 인간형 안드로이드 ‘도로시’를 이용해 우주 거주구에 테러를 저지르려는 혐의로 악명을 떨친다. 초반 설정으로 따지면 액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극단주의자 집단의 전형이다. UPS에 의해 홍보되는 ‘검은 여우단’은 현실의 IS나 알 카에다의 판박이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암약하며 사회에서 소외된 불평분자들을 자양분 삼아 세상에 해를 끼치는 존재들. 하지만 중반부에 밝혀지는 이들의 실체는 너무나 엉성해서 보는 이들을 허탈하게 만들 지경이다.

알고 보니 ‘검은 여우단’은 지구의 심각한 오염은 방관한 채 화성으로 소수 엘리트만 이민하는 정책에만 골몰하는 UPS의 입장에 반대하며 지구의 환경 복원을 요구하는 비폭력 평화주의 환경운동 단체였다. 검은 여우의 표식을 문신처럼 신체 어딘가에 하고 있어서 비밀결사의 분위기로 초반에 긴장감을 높이지만 정작 알맹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지나치곤 하는 가두 캠페인이나 평화행동 수준 활동가들의 모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실제 행동보다는 UTS의 공포 정치를 위한 희생양으로 테러 단체라는 누명을 쓰고 사냥당하는 신세에 처한 셈이다. 가끔은 실제 이념이나 활동이 아니라 체제의 필요에 따라 과도하게 마녀사냥 당하는 현실의 사회운동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테라포밍

영화 속에서 UPS의 목표는 화성으로의 이주다. (물론 지구에서 빈곤과 공해에 시달리는 인구가 아닌 우주에서 거주하는 시민 위주) 하지만 현실의 화성은 비록 태양계 다른 행성들에 비해 물이 존재하는 등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이라고는 하지만 평균온도 -63˚에 이산화탄소 농도 96%, 도저히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환경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류가 화성에 정착할 수 있다는 걸까? 설정상 화성은 ‘테라포밍’이 완료되어 지구처럼 별도의 거추장스러운 보조기구 없이 생활할 수 있게 개조된 것으로 등장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테라포밍은 행성 차원의 원래 환경을 개조하는 일련의 과정을 이른다. 별 하나의 기존 환경을 싹 다 뜯어고친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궁극 수준인 셈이다. 단순하게 상상해보면 사하라 사막을 통째로 숲으로 만든다거나 시베리아를 온대 기후 지대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게 가능하다면 현재 지구의 환경이나 식량 문제 등은 대부분 해결될 것이다.

현재 태양계에서 그나마 테라포밍이 인류의 미래 기술과 능력으로 가능할 곳은 화성이 유일하지만, 4조 달러 가까운 비용에 480년의 세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엄청나게 긴 시간 같지만 수십억 년 동안 각자 고유의 조건이 형성된 행성 환경을 인위적으로 뒤바꾸는 것치고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 테다. 지구보다 턱없이 약한 중력 때문에 대기를 조성하는 것도 힘들고 유지하는 것은 더 힘들다. 표면 온도를 높이기 위해 강제로 온실효과를 행성 전체에 조성해야 하고 산소 발생을 위해 현지 토양에 적합한 식물을 행성 차원으로 퍼트려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이게 가능할 정도의 기술이라면 그냥 지구 환경을 복원하는 게 더 쉽고 빠르지 않을까?

무엇보다 기득권층이 자원을 활용해 모든 이들을 먹여 살리고 동등하게 대접해야 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벗어났을 때 과연 인도주의적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가 영화의 숨은 복선이자 주 갈등 요소라 하겠다. 지금도 세계의 식량과 물자 생산은 전 인류가 먹고 쓰고도 남지만, 절대적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2092년의 미래 또한 같은 문제가 여전하다는 것만.

 

나노봇

고전 SF의 거장 아서 클라크는 미래학에서 종종 인용되는 ‘과학 3 법칙’을 그의 소설 세계에서 구현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게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라는 제3법칙이다. <승리호>에서는 영화의 결말로 향하는 실마리로 위의 제3법칙이 작동하는 순간, 즉 “기술적 특이점”이 존재한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의 인지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상황이 바로 그 지점이다.

영화에선 분자 크기의 기계-로봇인 ‘나노봇’이 그 기술적 특이점에 이르는 존재다. 2092년의 미래에는 지구와 달의 중력이 균형을 이뤄 마치 현실의 사르가소 바다처럼 우주 무풍지대라 할 ‘라그랑주 점’이 존재하는데 그곳에 집적된 우주 쓰레기들을 분해하는 데 나노봇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가 증식한 나노봇은 쓰레기뿐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라그랑주 점 구역에 진입한 우주선 같은 물체도 모조리 ‘잡아먹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간이 만든 초소형 기계-로봇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임무를 수행하고 번식하는 자율성을 갖게 된 것이다.

실은 480년 걸릴 화성의 테라포밍도 이 나노봇의 어떤 작용 때문에 몇 년 만에 실현된 것으로 나온다. 마이크로 단위의 초소형 로봇은 우리 인간의 인식 수준을 까마득히 벗어난 존재다. 하지만 그 원리 자체는 시각적으로 식별 가능한 인공지능 로봇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인류 지각 능력 너머에 위치할 뿐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평범한 바닷물 한 바가지 속에 무한한 생태계가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나노봇이 대체한 셈이다. 영화 후반의 경이로운 순간들은 이들 나노봇이 특정한 상황에서 활약한 결과에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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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 한국 SF 영화의 창세 이후를 기대하며

 

<승리호>는 지금껏 주로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아이디어 차원으로만 활용되던 SF 장르를 상업영화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소화한 드문 사례이다. 천문학적 대자본과 기술력의 경연장인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 예산의 1/10 수준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버금가는 시각효과와 완성도를 선보인 측면에서 고무적인 결과물이다. 넷플릭스를 통한 세계적 흥행 성과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창의성보다는 기존 장르 영화들의 장점과 특색을 잘 조합한 복제-변주에 가까운 건 부인할 수 없는 지점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해당 장르에 이해도가 깊은 이들이라면 무수한 이미지들이 스쳐 지날 것이다. 선택된 이들이 우주 거주구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다수의 인류는 지구에서 고통받는 설정은 <엘리시움>에서, 우주 쓰레기 청소는 <프라네테스>에서, 미래사회를 무대로 하지만 은근히 과거의 증기기관 시절 느낌 연출은 <스페이스 트러커> 같은 스팀펑크 SF 영화들에서, 기동대의 강화복은 <애플시드>의 분위기와 디자인을, 무엇보다 주역인 ‘마개조’ 우주선 승리호는 <스타워즈>의 아이콘 중 하나인 밀레니엄 팔콘 호를 떠올리게 한다. <승리호>는 그런 장르 전통을 적절히 차용하고 약간의 참신함과 색다름으로 차별화를 둔 작품이다.

SF 장르물의 계보에서 <승리호>는 쥘 베른 부류의 제국주의-근대 합리주의 시대 고전 전통 SF와 생태/환경 의제 등이 주목받는 현대 SF 경향이 혼재되어 있다. 갈등 구조는 후자를 많이 반영했지만 (출생의 비밀을 숨긴 영웅 신화처럼) ‘알고 보니 은둔 고수’ 능력자들이 팀을 이뤄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낙관적 모험담의 구조는 전자를 닮아 있는 식이다. 상업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보편적으로 쉽고 분명하며 감정적으로 이입되기 쉬운 구조를 선택하게 마련이라 이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봐야 할 측면이다. 어쨌든 한국에서도 그동안 외국영화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해당 장르가 기술적 구현이나 흥행도 가능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니 다음 선수가 등판할 여지는 생겼다. 아쉬운 점 여럿이지만 일단 우주 모험을 즐겨도 좋겠다.

 


작품 정보

 

승리호 SPACE SWEEPERS

한국, SF, 2020

2021.02.05. 개봉 / 넷플릭스, 136분, 12세관람가

감독 조성희

주연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

출연 리차드 아미티지, 김무열, 박예린, 오지율, 김향기, 나스 브라운, 케빈 도크리, 카를라 페르난다 아비야 에스코베도, 다니엘 조이 알브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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