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얼마나 애가 탔는지. 그 계곡으로 가기까지는 말이다.

수년 전부터 그 아이 소식은 들었지만, 도대체 어느 골짜기로 들어서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도 원을 세우면 꿈에서라도 만나는 것이었던가. 며칠 전 꿈속엔 첩첩산중을 헤매고 또 헤매며 보라 빛발이 서리는 골을 넌지시 바라보며 어느새 발등 위로 보라색 향기가 타고 흐르며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 어쩌나, 어쩌나.

엄습해 오는 불안함이 약속 시각보다 20분이나 앞서 도착하게 한다. 하지만 웬걸 그분의 싱글 생글 웃으시는 모습은 오늘 그럴 줄 알고 계셨으리라. 우리들의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꽃이 핀다. 웃음꽃이 피며 봄임을 마치 확인하듯 걷는다. 곧 웃음소리들이 얕아지기 시작하더니 그분은 정색을 하며 이제부터는 험로라 하신다. 20년 지기 내 다리는 오히려 신이 난 것일지도.

지난해 태풍으로 급 내리막 계곡길은 바위와 큰 돌덩이들이 나뒹굴며 길의 초점을 흐려 놓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 큰물의 힘을 보여 주듯 크고 작은 돌덩이들은 너무나 깨끗하다. 마치 금단의 길을 걷듯 숨죽이며 내려간다. 아주 작은 소리도 샐까 했지. 자갈과 검은 흙들 위로 촘촘히도 낙엽이 쌓여 한 발씩 두려움으로 내디디고 있다. 정강이까지 푹푹 들어가는 졸참나무와 신갈나무, 굴참나무들의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는 그 아래로 흐르는 잔잔한 계곡물소리를 감추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찌나 씩씩하신 걸음을 하시는지 그분께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낙엽들의 덫에 걸려 내 등산화 속으로 스며든 계곡물이 야속하기까지 한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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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협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점점 넓어지기 시작할 그쯤, 그분은 갑자기 왼쪽 급경사를 타고 오른다. 드디어 강렬한 감이 정전기처럼 일었을까. 그분의 움직임 끝엔 조그마한 여린 청보라색 들판이 펼쳐진다. 흰 솜털 사이로 비쳐든 빛으로 스르륵 눈이 감기고 발끝엔 어지간히 힘을 주어야 했었다. 이 아이들을 만나려면 말이다. 이 아이들은 꽃잎이 없다. 그렇게 구조가 안갖춘꽃을 싼 포엽이 펼쳐지며 피는 것이며 포엽이 노루의 귀를 닮아 노루귀인 것이다. 색깔 또한 다양하다. 그중의 청색을 만난 것이다.

잔잔한 봄바람들은 잘랑이며 청색의 보랏빛 꽃받침 잎에 볼을 비빈다. 그리곤 진한 허그를 하며 각자의 갈 길을 가고 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제 살을 묻는 청색의 노루귀지만 또한 새로운 해마다 그럴 것이지만 그 봄바람에서 느꼈던 따뜻함은 지난겨울의 추위로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이제 제법 넓고도 완만한 계곡을 타며 계속되는 노루귀들의 향연을 곁에서 즐겨본다. 계속 이어지는 슬픈 향연이겠지만 이 계곡은 내 눈을 물들였고 이들의 찬란한 흔적들은 아픈 마음으로 담길 것이다. 우리가 만든 기후변화로 일찍 피기도 하고 늦게 피어오르기도 하기에. 아프다. 곧 호수가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 청색의 노루귀와의 눈 맞춤은 차고도 넘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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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현정 경주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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