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라!] “보통의 삶-70”
[이 영화를 보라!] “보통의 삶-70”
  • 김상목
  • 승인 2021.03.1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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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199분

 

영화 <보통의 삶-70> 스틸 이미지
영화 <보통의 삶-70> 스틸 이미지

1. ‘야만의 시간’을 기억하라

나치가 자행한 반인륜 범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인류 최악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졌다는 것을 역사를 배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는 다만 숫자에 대한 강박이나 이후 정치적 논쟁에 따른 진영 대립으로 희석되어갔다. 진정 유의미한 논의들은 잊히고 현재의 이해관계를 위해 과거의 역사는 동원될 뿐이었다. 나치의 대학살은 인간 이성과 근대 합리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불신을 낳았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고도화될수록 학살은 무자비해졌고 과정은 효율적이 되었으니. ‘국가’라는 필요악적 집단은 점점 괴물이 되어갔고, 대의제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로 타락하는 순간 최악의 정치체제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홀로코스트 문학’이라는 장르를 잉태할 만큼 이 미증유의 참상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음은 당연하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참전 문학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경험을 후대에 남긴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불후의 기록을 남겼으나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는 가뿐히 그 참혹성과 후유증을 초과해버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으며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사투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때문에 힘들어했다. 무엇보다 이들이 다시 전쟁 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했다. 너무나 극한의 체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은 살아 있으되 영혼은 죽어버렸다는 의미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비유적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외관상 큰 탈 없이 사회에 복귀한 이들이라도 그들의 내면 어딘가에는 공허와 어둠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에 대해 왜 그들이 그런 절멸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원인에 대한 이론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 대상의 상당수가 유태인일 뿐, 그 기준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고 반드시 기계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니었다. 나치의 이인자였던 괴링은 ‘누가 유태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정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거나 그저 개인적 원한이나 다만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같은 당혹스러운 이유로 떼죽음 대상이 되는 식.

홀로코스트 이후 이런 반인륜적 참상은 불행한 교훈으로 남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다양한 원인으로 축적된 원한과 상흔은 끊임없이 이를 부추김으로써 이득을 보는 세력에 의해 조장되었다. 개인이 결정할 수 없는 인종이나 성별, 혹은 교리 면에서는 모두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종교에 의한 차별과 학살이 연이어 일어났으되, 그 배후에는 중세 십자군 전쟁처럼 대의명분을 내세운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반드시 외국과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처럼 기득권 집단이 권력과 부를 탐해 벌어진 ‘내전’ 상황은 우리 현대사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해 왔다. 용산 참사나 평택 대추리, 제주 강정, 부안과 새만금, 성주 소성리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이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이제는 어느새 과거형으로 잊혀가는 밀양 송전탑 투쟁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형태의 내전들은 권력과 자본이 결합한 기득권 세력이 힘없는 소수를 짓밟는 ‘사회적 학살’의 형태로 치닫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지배세력의 전형적인 수법, ‘분할 지배’를 활용한 갈라치기는 그 과정에서 지역과 분야별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위력을 발휘했다. 투쟁이 끝나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찬성한 자와 반대한 자, 혹은 살아남은 자와 떠나간 자의 골은 깊게 팼고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으며 이웃과 동료들은 원수지간이 되어버렸다. 그 규모는 작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홀로코스트의 결말과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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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밀양> 스틸 이미지

2-1. ‘밀양의 시간’을 기록하라

독립영화인들은 항상 이런 사회적 학살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연대해 왔다. 밀양 송전탑 저지 투쟁에도 적지 않은 이가 함께 했고 다수의 결과물을 남겼다. 하지만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다수의 작품은 잊힌 듯하다. 어떤 작품은 급박한 상황을 알리려는 속보성으로 제작되어 물리적 투쟁이 마무리된 후에는 제반 사정이 변했거나 시효 수명을 다했기도 하고, 다시 볼 가치가 충분함에도 독립영화의 상영 조건 때문에 구해보기 힘든 경우가 태반이다. 아래에 열거되는 작품들은 밀양 송전탑 투쟁을 기록하거나 소재로 한 작업을 전부 포괄하지 못하지만, 비교적 대중적으로 소개될 기회가 있었던 영화들이다.

 

<765와 용회마을>

2013 / 다큐멘터리/ 50분 / 감독 김소희

송전탑 투쟁이 한창일 때 투쟁 거점 중 한 곳이던 단장면 용회마을의 일상과 투쟁 상황을 르포 형식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영화적 구성보다는 감독이 일상에 밀착해 주민들의 일과를 카메라에 담는 방식을 취한다. 주민들은 수십 년간 이어져 왔을 농사일을 하면서 조를 이뤄 보초 활동을 하고 공사를 막는 비상대기를 계속한다. 주민 사이의 갈등과 화해 등의 소소한 일화가 치열한 대립 속에서도 펼쳐지던 장면이 선하다.

 

영화 &lt;765와 용회마을&gt; 스틸 이미지
영화 <765와 용회마을> 스틸 이미지

<즐거운 나의 집 101>

2015 / 다큐멘터리 / 88분 / 감독 련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 산골마을 주민들 최후의 거점이자 보루는 산 중턱에서 공사현장 길목을 가로막는 몇 곳의 농성장이었다. 해당 작품은 그 4개 농성장 중 한 곳, ‘101번 농성장’을 배경으로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투쟁을 상징하는 풍경, 할매들이 구부러진 등으로 지팡이를 쥔 채 산등성이를 올라 당도하는 농성장은 제대로 닦인 길도 없고 물이나 전기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다. 연로한 노인들이 등짐 짊어지고 하나둘 옮긴 물건들로 꾸려진 농성장은 언제 용역과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도 때로는 캠핑처럼 즐거운 순간들을 드러내곤 한다.

오랜 삶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주민들의 낙천성에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연대자’들의 풍경이 영화 내내 펼쳐진다. 물자를 보급하고 맛난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을 공연으로 채우기도 한다. 그렇게 친구가 된 이들의 농성장을 제목처럼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투쟁과 생활의 공동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밀양, 반가운 손님>

2014 / 옴니버스·드라마, 다큐멘터리 / 96분 / 감독 하샛별, 노은지, 허철녕, 이재환, 넝쿨

밀양 투쟁을 각자의 방식과 작업으로 기록하던 독립영화인들이 5개의 단편을 엮어 구성한 옴니버스 영화다.

첫 번째 단편 <좋은데이>는 평택 쌍용자동차 복직 투쟁을 벌이는 문기주 해고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드라마 형식을 취한다.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밀양 송전탑 투쟁에 대한 인상들, 익히 짐작할 수 있듯 보상금 노리는 것 아니냐는 무신경한 내뱉음부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자조, 민감한 이야기는 집어치우자는 회피까지 오랜만에 만난 고향 선후배들의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담는다. 공권력에 의한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을 밀양과 쌍용차를 연결해 구조화한다.

두 번째 단편 <할매들은 알고 계셔>는 시위 현장에서 흔히 보이는 풍경처럼 경찰과 할매들의 티격태격 순간에 주목한다. 경찰은 용역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주민들의 건설 현장 진입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정보를 수집하는 형사들은 살가운 태도로 주민들에게 다정한 척 친밀감을 표시하는데 노인들은 웃는 얼굴에 화내지도 못하고 매일 보는 사이다 보니 근황도 나누는 기이한 관계를 형성하는 셈이다. 하지만 결국 공권력은 주민들을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세 번째 단편 <말해>는 김말해 할매를 주인공 격으로 담았다. 말해 할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구술사 형식으로 담아내면서 그 기구한 삶 속에 한국현대사의 국가폭력이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네 번째 단편 <나의 그녀>는 점점 격화되는 공권력의 탄압 속에서도 연대를 구하려 고민하는 주민들의 분투를 담는다. 다섯 번째 단편인 <한 가락>은 농성장을 침탈하고 공사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행정대집행 이후 다시 싸움을 준비하는 주민들의 풍경을 보여주는 대미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외부자의 시선에서 점점 당사자의 입장으로 좁혀가는 단편들의 내용을 엮어내어 주민들의 온전한 실상과 함께 연대에 대한 갈망을 담았다. 옴니버스 장편 구조로 확보한 이야기 분량을 통해 밀양 송전탑 투쟁의 본질적 문제와 쟁점들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기획이다.

 

영화 &lt;밀양, 반가운 손님&gt; 스틸 이미지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스틸 이미지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밀양>

2015 / 옴니버스·다큐멘터리 / 54분 / 감독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밀양

“미디어로 행동하라!”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그해의 초점이 되는 투쟁 현장을 정하고, 농활처럼 단기 집중 활동을 통해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의 프로젝트 기획이다. 밀양 편은 2014년 행정대집행 후 1년이 지나 투쟁을 계속 이어가던 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록한다. 언뜻 물리적으로 패배한 상황인데도 주민들은 거듭 싸움을 진행한다. 이것은 그저 관성적인 작동인가 아니면 주민들에게 어떤 꿈과 비전이 있는 걸까? 카메라는 송전탑이 우뚝 솟은 현실 앞에서 삶을 이어가면서 언젠가는 저 철탑이 사라지길 소망하는 풍경을 담는다.

영상 활동가들의 협동과 개별 작업이 어우러진 밀양 편은 여섯 편의 개별 작업으로 구성된다. 총론 격인 <기록 in 밀양>은 각자가 현장을 기록하면서 부닥치는 상황과 파생되는 고민을 다룬다. <古談, 옛이야기>는 고답 마을 할매들의 옛날이야기를 구전 전승처럼 풀어낸다. <7분 65초>는 제목에 표기된 시간 동안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으며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응시한다. <나는 송전탑을 안고 산다>는 행정대집행 후 철탑이 들어선 동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할매의 일상을 담는다. <등산>은 주민들이 마을의 집보다 더 집처럼 어울려 지내던 농성장 움막, 이제는 사라진 공동체의 공간을 불러내 기억하려 한다. <다시, 밀양>은 송전탑이 들어섰지만 지난 10년간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음을 전하며 마무리를 장식한다. 각자의 단편은 채 1주일도 못 되는 시간 동안 다양한 기록 방식을 활용하고 집단적 토론과 협력을 통해 개별 작업이 조화롭게 진행된 결과물들이다.

 

<말해의 사계절>

2017 / 다큐멘터리 / 107분 / 감독 허철녕

앞서 소개했던 옴니버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에서 단편 <말해>를 연출했던 감독은 짧은 분량으로 다 담아내지 못한 김말해 할매에 대해 집중하는 장편 작업을 선보인다.

도곡마을 주민 말해 할매는 일제 말 징용을 피한 조혼으로 열일곱에 정착했다. 1945년 광복이 왔지만 좋은 날은 오지 않았다. 좌우 이념대립과 한국전쟁의 상흔은 이 시골 마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할매의 남편은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의 희생자가 된다. 누구도 남편의 이후 소식을 모른다. 의지할 데 없는 할매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궁핍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빨갱이 가족이란 차별과 멸시에 시달려야 했다. 아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월남 파병을 신청한다. 기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련 속에서 할매와 아들의 관계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애증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런 회한의 끝에서 할매가 맞이한 건 70년 넘게 떠나지 않고 버텨온 도곡마을에 들어서려는 송전탑이었고, 말해 할매는 악에 받쳐 처절하게 싸운다. 그러나 점차 지쳐가는 주민들은 하나둘 한전이 내미는 보상에 도장을 찍고 만다. 그리고 할매도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말해의 사계절>은 밀양 송전탑 투쟁의 초반, 영상작업이 주로 속보와 르포 형식으로 투쟁에 대해 알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던 방향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이 투쟁의 의의와 성격,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 주목하게 되는 변화의 상징 같은 작업이다. 특히 시골마을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근현대사의 기억과 국가폭력의 자취를 구술사 형태로 정리하면서 밀양이 개별적/일시적 사안이 아니라 거듭 반복되어온 한국 현대사의 악성 대물림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 삼게 해준다.

 

2_2. 오지필름 박배일 감독의 밀양 연작

 

<밀양전>, Legend of Miryang 1

2013 / 다큐멘터리 / 74분 / 감독 박배일 / 제작 오지필름

<밀양 아리랑>, Miryang Arirang - Legend of Miryang 2

2015.7.16. 개봉 / 2014 / 다큐멘터리 / 102분 / 감독 박배일 / 제작 오지필름

 

부산 지역에서 다큐공동체 <오지필름>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박배일 감독은 동료들과 함께 밀양에 결합하며 두 편의 연작을 선보인다. 현재 개인이 구해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인 <밀양전>과 <밀양 아리랑>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밀양 아리랑>은 극장 개봉을 진행했으며 두 작품 모두 네이버 VOD로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 관람이 가능하다.

<밀양전>은 10년을 넘기던 송전탑 저지 투쟁의 지난 8년간 경과와 함께 마을 주민들, 특히 할매들의 매력적인 면모와 싸움 도중에도 일상을 영위하는 강인함을 담아낸다. 속편인 <밀양 아리랑>은 좀 더 격렬해진다. 감독의 태도가 변했다기보다는 투쟁 상황이 격렬해졌기 때문이다. 2013년 10월에 시도된 강제철거와 지지부진한 협의 과정, 그 결렬 후 결국 일방적으로 강행된 2014년 6월 공권력에 의한 행정대집행까지가 담겨 있기에 그런 변화는 어쩔 도리가 없다. 격화된 싸움의 한복판에서 주민들은 도저히 자신들은 이해할 수도, 동의하지도 않는 국가라는 괴물의 전력 공급 정책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절규하며 흐느낀다.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구경꾼이 설자리는 없어진다. 관객은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

이 연작은 현재 상황에서 밀양 송전탑 투쟁이 생소하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한 이들에게는 우선 통과의례 같은 작품으로 자리하고 있다. 배급 과정을 확보했고 종합적으로 투쟁을 소개하며 결정적 요소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들어차 있기에 여전히 추천작이다.

 

영화 &lt;말해의 사계절&gt; 스틸 이미지
영화 <밀양전> 스틸 이미지


3. ‘보통의 삶’이 짓밟히던 시간의 증거물

그렇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밀양 송전탑 투쟁을 다룬 영화는 훗날 회고적으로 등장하거나 자료화면으로 소개되는 것 외에는 종료된 것처럼 느껴졌다. 밀양 송전탑 투쟁은 동남해안 지방 탈원전 문제와 밀양을 지나 내륙으로 뻗어 들어가는 통로인 청도 송전탑 투쟁과 연결되어 장기간 진행되었고, 비록 밀양에 765Kw 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전국적인 이슈가 되면서 향후 동류의 상황이 재발할 때 참고하고 반영될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와 함께 과거사로 편입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보통의 삶-70>이 느닷없이 등장했다.

이 작품은 과거시제로 접어두고 서랍에 넣어버렸던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지독한 집념으로 담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영화화 작업 결과물 중 가장 거대한 분량으로 다뤄버렸다. 영화 내내 그저 “보통의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 마을 주민들을 용역과 공권력들이 진절머리나게 괴롭히듯 이 영화는 관객에게 잊고 싶은 기억들을 상기시키고, 이제는 적당히 추억담으로 치워두고 싶은 당시의 기억을 부활시킨다. 당시 밀양에 몇 차례 다녀간 것으로 나 역시 함께했다고 주장하던 게 쑥 들어가 버린다. 영화를 보다 초반에 느끼던 기이한 감정이다.

하지만 <보통의 삶-70>은 보는 이의 감정을 후벼내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무척 정제되어 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연출이다. 끝나기 직전 마지막 10분을 제외하면 3시간 넘게 흑백 화면으로 시종일관한다. 관람하는 이에게 강렬한 분노와 슬픔의 요동을 일으키는 행정대집행 당시 충돌의 순간은 그 직전에서 멈춰버릴 뿐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영화는 기억 속의 캐비닛에 갈무리되어 있던 두꺼운 상황일지를 백서처럼 정리해 들이민다. 친절하게 돋보기안경까지 건네면서 말이다. 그런 작은 배려가 없다면 이 영화가 선보이는 방대하고 촘촘한 기록을 소화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초반은 늘그막에 밀양 산골로 귀농해 오붓한 노후를 보내려던 정임출, 윤여림 두 어르신이 송전탑 투쟁에 참여하면서 겪는 기구한 삶과 투쟁의 후과로 재판에 시달리는 풍경으로 진행된다. 2014년 6월에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어 공권력과 한전은 자신들이 바랐던 결과를 얻었지만, 투쟁했던 주민들은 온갖 고소·고발에 시달리며 1년이 지난 후에도 법정투쟁에 임해야 했다. 파괴된 일상을 복구할 여유는커녕 지루하게 펼쳐지는 소송에 진이 빠져간다.

점점 밀양 관련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본 이들이라면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위양 마을과 평밭마을 주민들,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 주민들, 127 농성장에 연대했던 다양한 이들이 2012년 이치우 어르신 분신 이후로 행정대집행까지 2년여 동안의 기록 영상 속에 속속 자리를 차지한다. 카메라는 이제 쭉 시간순으로 가장 격렬했던 시간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풍경이 펼쳐졌었는지를 연대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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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통의 삶-70> 스틸 이미지

주민들의 주장과 국면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감독은 전문가 해설을 적재적소마다 배치한다. 자료들은 화면을 칠판처럼 활용하며 가득 채워버린다. 투쟁일지 와 쟁점 설명, 관련 법조문 등의 텍스트는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화면에서 넘겨지지 않고 버틴다. 관객이 그 내용을 다 읽기를 바라는 듯 비친다. 시험 삼아 또박또박 소리를 내어 낭독하듯 다 읽는 순간 화면이 넘어간다. 정말 읽는 시간을 계산해가며 텍스트를 배치한 걸까? 다시 몇 번 시도해본다. 딱딱 맞아떨어진다. 이건 의도한 바가 분명하다.

전문가 패널들은 화면에 칠판처럼 필사된 텍스트를 열심히 설명한다. 밀양 송전탑 대책위의 이계삼 사무국장, 전직 국회의원이자 ‘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 활동가, 탈핵 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헌석 소장이 등장해서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이들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녹음이 잘못된 건가 일순 의심하지만, 유심히 보니 일부러 소리를 뺐다. 화면에 가득 프레젠테이션 된 내용에 집중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터넷 강의로 얼핏 느껴질 법한 분위기지만 강사의 현란한 언변에 의지하지 않고 마치 투쟁일지와 관련 해설 및 각주를 담은 자료집을 조각조각 분리해서 영상 속에 배치하는 것처럼 효과를 낸다. 앞서 언급한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느리게 전환되는 텍스트 자막들은 정말 똑바로 다 읽지 않고는 배겨낼 도리가 없다. 다시 한번 실험해보니 소리 내어 낭독하면 1번,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려가면 2번 독해가 가능한 리듬감이다. 편집할 때 얼마나 감독이 자신을 갈아서 넣었는지 두려움이 일 지경이다.

이런 ‘편집광’ 감독의 연출 태도 덕분에 뇌리에서 희미해져 가던 밀양은 강제 소환되듯 다시 각인된다. 주민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가능한 여유 있게 배치되는 편이라 보는 이들에게 그들의 생애사와 가족관계, 현장에서의 역할과 각자 품고 있던 고민의 속내를 추측할 수 있게 상상력을 촉발하도록 지원한다. 초중반에는 개개인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며 개별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준다.

하지만 점점 강하게 옥죄어오는 탄압 상황과, 한전의 주민 분열 갈라치기 공작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상처받는다. 이 시점부터 영화를 보기가 매우 힘들다. 주민들의 울분과 한탄이 고스란히 보는 이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소리만 청취해도 피할 수 없이 머릿속에 이미지가 아른거린다. 아무튼 버텨본다.

그 정점은 기억 한구석에 치워뒀던 행정대집행의 순간이다. 전력산업기본법 등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개발을 지탱해 온 핵심 논리는 이미 앞선 해설들에서 진하게 교육받았다. 공익과 합법을 명목으로 야만의 시간이 다가온다. 주민들은 두렵고 외롭다. 그 순간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에서 적의 대군에 포위된 소수의 절망한 로한 군대에 비록 승리의 전망과는 거리가 멀지만, 요정의 미약한 구원 병력이 도착하던 순간처럼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연대하는 이들이 도착한다. 가톨릭 수녀들, 연로한 주민의 자녀들, 움막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활동가들이 당도해 주민들과 얼싸안는다. 비장함 속에 시린 겨울 햇살처럼 미소가 감돌며 임박한 물리적 패배를 향하던 순간, 그 직전에 카메라는 멈춘다. 굳이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전시하기보단 그 과정과 평가에 집중하라는 감독의 주장이 전해져오는 기분이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지난 뒤 화면은 처음으로 컬러로 바뀐다. 그 총천연색 화면에는 765Kw 송전탑이 서 있는 모습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목청을 아무리 높여도 음성을 들을 수 없던 전문가 패널의 마무리 해설이 드디어 소리와 함께 재생된다. 밀양의 싸움이 어떤 의의를 지녔고, 어떻게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이후의 과제는 무엇인지 찬찬히 개괄하는 시간은 영락없는 복습과 총정리의 시간이다. 10분간 이 꼼꼼한 마무리 과제의 순간이 흘러가다 자연스럽게 크레디트로 전환된다. 영화 속에 등장한 이들과 작업한 이들이 소개된 뒤 마지막 한 문장이 화면 중앙을 차지한다.

“돌아가신 이치우(2012), 유한숙(2013) 어르신께 이 작품을 바칩니다.”

잊으면 안 될 이름들을 그동안 어쩌면 잊으려 애썼구나. 그런 자책과 반성의 망치질이다. 그렇게 199분의 시간 동안 감정을 자극하는 배경음악 한번 쓰지 않고 우직한 태도로 영화를 편집한 감독의 시간은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4. ‘보통의 삶’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사색의 시간

<보통의 삶-70>은 밀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체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작품과 만든 감독의 태도는 어찌 보면 기억을 위한 간절한 호소, 삐딱하게 보면 계몽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확고하다.

밀양 송전탑 투쟁은 10년의 투쟁 끝에 상처와 희생을 무수히 남겼지만, 또한 대안적 공동체의 실낱같은 단초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질문, 근현대사에 대한 성찰의 과제를 숱하게 남겼다. 밀양 송전탑 투쟁을 그저 망각 속에 떠내려 보내지 않고 어떻게 미래의 투쟁에 자양분으로 활용할 것인가를 스스로 숙제로 떠안고 고민하는 이에게 이 영화는 거대한 분량의 ‘총서’로 쓰이길 기다린다.

극장 개봉의 전망은 당연히 불투명하고, 온라인에서 다운로드 서비스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근래 출범한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에서 큐레이션 스트리밍 및 공동체 상영을 일정 기간 지원할 계획이다. 극히 제한된 영화제 상영 외에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다이제스트 판 같은 작품이 제약을 뚫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길 기대해본다.

 


작품 정보

 

보통의 삶 -70 Ordinary Life, -70

2019, 다큐멘터리, 199분

감독 강세진

출연 정임출, 손희경, 곽정섭, 윤여림, 한옥순, 이남우, 이계삼, 위양마을 주민 여러분, 평밭마을 주민 여러분,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 주민 여러분, 127 농성장 연대자 여러분, 장하나, 이헌석

제작 푸른영상

배급 시네마달

2019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한국경쟁, 용감한 기러기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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