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사다리(사회적 다리 두기)

 

ㅌㅇㅇ
출입이 가로막혀 밖을 서성이는 장애인과 활동지원사

 

1. 물회 먹으러 가는 길

포항 장성동에서 출발해야 하는 여섯 명의 일행은, 차를 타고 약 30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월포로 향했다. 다들 오랜만에 물회가 먹고 싶었기에, 그나마 접근성이 낫고 맛도 좋다고 소개받은 식당에 대한 기대를 가득 품고, 우리는 평소보다 다소 먼 거리를 이동했다. 포항시 장애인의 자립 생활 지원과 권익 옹호를 위해 활동하는 최중증 뇌병변 장애인 둘과 그들 각각의 활동지원사 둘. 그리고 동료 활동가 둘이 동반한 총 여섯 명의 일행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포항시도 ‘5인 이상 집합 금지’의 행정명령 적용을 받는 상황이었지만, 장애인이 무사히 이동하여 식사를 할 수 있으려면 활동지원사의 동행은 반드시 필요했고, 마침 경상북도의 행정명령도 “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경우”에는 ‘5인 이상 집합 금지’령 적용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사회적 거리두기 1.5단계 연장에 따른 행정명령 변경공고, 경상북도 공고 제2021-411호, 2021년 2월 26일 공고).

“월포로 가자! 물회 먹으러 가자!”

일단 일련의 과정을 잘만 통과해야 할 터였다. 우선 휠체어가 탑승 가능한 특장차(동행콜)가 포항시의 경우 아직 그 법정 대수를 채우지 못해 공급 부족과 경쟁이 심하고, 따라서 동행콜을 부르게 되면 식사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남는 두 대의 승용차에 4명, 2명으로 나눠 타기로 셈법을 거친다.

식당은 전동휠체어가 진입할 수 없는 오래된 건물에 자리하므로, 뇌병변 장애인 당사자들을 전동휠체어에서 수동휠체어로 옮겨 태우고, 다시 수동휠체어에서 승용차로 옮겨 태우고, 수동휠체어를 분해해 두 차에 나눠 싣고, 30분가량을 이동해 주차를 마치면 다시 트렁크에서 수동휠체어를 꺼내어 조립하고, 다시 당사자들을 승용차에서 휠체어로 옮겨 태우고, 주차장에서 식당 입구로 오는 길에 깔린 날카롭고 거친 자갈과 다소 만만한 문턱들을 피하거나 넘어 비로소 식당 문 앞에 도착하기까지의 일련의 이음매들을 잘 지나오는 게 일차적인 과제였다(당연히 이때까지, 그리고 이후로도 활동지원사의 지원은 꼭 필요했다).

문을 열어 들어가려는 일행이 식당 사장으로 보이는 분의 제지를 직면하기까지 말이다.

 

2. 우리가 마주한 게 무엇일지라도

... 다섯, 여섯. 머릿수를 센 즉시 “안 된다” 선을 긋는 단호한 반응이 돌아왔다. 영업주로서 감염병 예방에 철저한 태도를 갖춘 것이었다면, 소비자로서 외려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다만 그 철저함이 어떤 마음으로부터 비롯하는지는, 헤아리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 철저한 태도가 행정명령 자체에 대한 충실함으로부터 비롯한다면, 그래도 기대를 해볼 만했다. 우리 일행은 식당 사장에게 행정명령 위반(신고)에 따른 과태료 부과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차근히 설명해 드렸다. ‘머릿수는 6명이지만, 여기 두 분은 활동지원사고, 장애인들과 한 몸인 셈이기에 셈을 하지 않아요’, ‘법(행정명령)에 따르더라도 지금 우리의 모임과 출입은 허용돼요’라고 설득을 시도하는 동안, 식사하며 ‘무슨 일이래?’ 하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는 식당 안쪽 (비장애인) 손님들과 이따금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장애인과 활동지원사의 대면, 동행, 집합이 장애인의 생명과 헌법상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더욱 각별히 지켜지고 존중되어야 하는 삶의 형상(形狀)이자 가치이기에, 지방정부의 행정명령에서도 그 예외를 두어 “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경우”엔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을 적용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활동지원사의 동행’을 장애인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권리에 속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를 통상적인 ‘사적 모임’ 또는 ‘집합’과 동일 선상에 놓고 이해하고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정명령에 담긴 그 취지를 최대한 전달하는 동안에도, 변함없는 영업주의 표정 저편을 헤아려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계속 밀려왔다. ‘그래도 사람 수가 여섯인데, 이런 설명으로 생각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낙담이 밀려왔다. 문제가 되는 건 분명 식당 출입의 허용과 거부를 규정하는 행정명령인데, 오히려 행정명령으로는 설득이 안 되는 아이러니한 상태의 지속이 무력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아무튼 우리는 안 돼요”, “우리는 머릿수로 세요”하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공격적이기보단 차라리 심드렁했고, 그래서 더 완고했던 말투와 표정 앞에서, 우리는 어떤 먹먹함과 막막함을 느꼈다.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느낌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거듭 밀려왔다. ‘우리가 설명을 너무 못 했나?’, ‘아니면 혹시 행정명령 외에 다른 이유가 있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마주한 건 행정명령 또는 시민적 약속에 대한 충실함일까, 아니면 그것을 핑계 삼은 다른 무엇일까?’

식당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을 서성이던 우리는,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법으로도 문제가 없는데 안 된다고만 하시는 진짜 이유가 뭔가요?”, “지금 못 들어가게 하셔도 똑같이 과태료 받으시는 거 아시나요?”, 아니면… “지금 차별하시나요?” 하지만 이런 말들 대신 우리는, “당장 저희 머리수가 여섯이라 걱정되시는 건 이해하지만” 따위로 시작해서 “누가 사장님 신고하면 저희가 방어해드릴 수 있어요” 따위로 끝맺는 효력 없는 말만 연신 건넬 따름이었다. (한 장애인 활동가는 자신이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활동하고 있음을 전달하기 위해 명함을 건네기도 했다.)

물론 그토록 ‘소극적’으로 대응한 까닭이 없진 않았다. 일단 코로나 시기에 방역을 도모하는 영업주와 식당 내부의 손님들의 면전에서 ‘입장을 가로막지 말라!’는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은,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활동해 온 당사자들에게도 충분히 난감하고 번거로운 상황이었다. ‘코로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지들 권리만 외치는 놈들’로 비칠 거란 걱정이 없었다고 말하면 그 또한 거짓일 것이다. ‘권리를 표방한 이기심’이 아니라 상식과 제도가 뒷받침하는 당연한 권리의 행사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가, 그리고 활동지원사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소극적’으로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더 ‘세게’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던 까닭은 단순하게도,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된 고된 업무와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서로를 격려하는 데 그 식사시간을 온전히 할애하고 싶었을 서로의 기분을 서로가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식당 입구에서 마주한 게 무엇일지라도, 오늘만큼은 서로 얼굴을 붉힐만한 발언을 삼가자고, 오늘만큼은 싸우고 싶지 않다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하며 모인 그 드문 뜻이 새삼 신선하고 귀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오를 지나 길어지기 시작한 사물들의 그림자처럼, “오늘만큼은”이라는 핑계에 숨어 꼭 했어야 할 말과 꼭 했어야 할 일을 방기한 건 아닌지,라는 죄책감 섞인 생각이 이내 드리우는 걸 어찌하진 못했다. 그건 영업주의 출입 거부만큼이나, 앞서의 셈법에서 우리가 차마 계산하지 못한 것이었다.

 

3. 셈 치는 사람들

결국, 우리 일행은 영업주가 ‘제대로 알아듣게 만들’ 말들은 정작 하지 않은 채(못한 채), 월포를 떠났다. 다시 자갈과 문턱들을 넘고, 장애 당사자들을 수동휠체어에서 차로 옮겨 태우고, 수동휠체어들을 두 차에 나눠 싣고, 다른 식당을 검색해 찾아간 후에야 비로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여섯 명의 사람이 그렇게 헤매었고, 거기엔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식사를 무사히 마치고, 대형 카페(일수록 접근성이 나은 경우가 많다고 기대되었다)에 가 자리를 잡았다. 행정명령을 꼼꼼히 확인할 동안만큼은 셋셋 또는 넷둘 이렇게 떨어져 앉아달라고 당부하던 젊은 직원들은, 나중에 우리에게 와 “장애인 손님이 계실 경우엔 안심하고 붙어 앉아계셔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중심가에 위치하고 젊은 직원들이 많은 대형 카페에서 누린) 그런 확인의 기회와 절차의 존재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마냥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연로한 어르신 두어 분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 대한) 비교로 이어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런 ‘기회를 제공할’ 기회와 여유 같은 게 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지 않으리란 짐작 때문이었다. 그 격차에 주목하다 보니, 그 격차를 해소하는 공공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게 될 따름이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약속)은 감염병의 예방을 위해, 수도권은 물론 각 지역 정부에서도 행정명령을 통해 실행하고 있는 중요하고 요긴한 방책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 놓쳐선 안 될 예외가 존재하는 까닭은, 우리가 다름 아닌 관계 맺음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또 우리가 그러한 관계 맺음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 즉 대면성에 크게 기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대면성 내지 대면해야 할 필요성이 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경우에는 그러한 대면성 내지 대면해야 할 필요성을 무화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과 믿음이, 우리 사회의 깊은 어딘가에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명령(약속)에 예외를 두는 건, 우리의 삶이 대면의 필요성을 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의 표현이자, 그러한 대면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보다 깊은 차원의 약속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몇몇 예외를 두며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명령(약속)을 정하고 자유의 절제를 도모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대면하고 모일 필요와 자유의 존중과 보호야말로 우리 사회의 더욱 본질적인 깊은 약속이고,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행정명령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잠시 동원 중인 ‘예외’적 조치임을 우리가 보다 깊은 곳으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공공의 책임과 역할은, 그 깊은 약속의 관점에 서서, 그 약속을 훼손시키는 사회적 조건(장애)들을 해소하고, 나아가 약속의 더욱더 충실한 이행을 위한 적극적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하진 않을까.

“그냥 바람 쐰 셈 치지 뭐.”

월포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애인 당사자 일행 중 한 분이 한숨을 푹 쉬며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삶에 어느 한 지점에선가 스쳤을,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거나 나지 않는 여러 얼굴들을 떠올렸다. 불필요하거나 부당한 일을 겪은 뒤에 ‘어떤 교훈을 얻은 셈 치지…’, ‘성장통을 겪은 셈 치지…’, 하며 겸사겸사 다른 어떤 ‘셈’을 자신의 경험에 겹쳐보고 의미를 덧대보던 사람들. 사람들… 그 얼굴들을 향해 ‘정신승리했다’거나 ‘현실 도피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외려 반대로, 셈 치는, 셈 쳐야만 했던, 그리고 셈 칠 수 있는 우리 이웃들의 꿋꿋함과 의연함을 떠올려보고 싶었다. 약하지만 강한 그들의 의미 앞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게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가 공공이라 부르는 세계의 다음 스텝을 위해 통과하는 또 하나의 질긴 이음매가 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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