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자’들의 대나무 숲에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것들

 

"시 읽는 시간" 포스터 이미지

1_ 현대 한국 사회에서 ‘시’의 거처

 

입시 준비에 모든 게 맞춰진 한국 제도 교육에서 청소년기에 시를 접한다는 행위는 잘 정리된 문제풀이 해설집을 암기하고 숙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시를 음미하고 작가의 의도를 상상하기보다는 정답지를 찾는 데 집중하기도 시간이 모자라다. 소설 등의 산문은 그나마 답을 구하기 쉬운데 절제와 은유가 기본인 시란 문학 형식은 미지의 세계다. 자연히 대학 진학 후 국문과나 문예창작과가 아니라면 시를 접할 일이 없다. 그렇게 시는 버려진다.

시를 쓰는 이를 시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한국의 연재/출판 현실 하에서 시인은 작가로서 가장 약자다. 고료를 받아도 원고지 또는 A4 용지 매당 얼마 이런 식으로 책정되기 일쑤다, 출판계에서도 시집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타 문학 장르보다 현저히 낮다. 그래서 시인이란 명칭에는 ‘가난’의 이미지가 들러붙는다. 자신의 노동을 자본으로 환산하는데 취약한 이 가난한 작가/예술가는 대개 다른 직업을 생업으로 삼아 틈틈이 글을 쓰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명절이 두려운 존재로 숨어지낸다.

이렇게 박대를 받지만 ‘시’는 엄연히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문학 장르다. 넓게 본다면 노래의 가사 또한 시의 일부다. 훌륭한 노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시를 시험문제에 포함되는 지독히 좁은 범위로만 제한시켜 버렸다. 그리고 시를 읽는다는 행위는 전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때의 낭만이거나 자신의 교양 수준을 포장하는데 동원되는 것처럼 기이한 변형에 놓였다.

그런데 2016년 영화가 첫선을 보인 후 햇수로 5년 만에 소규모 개봉을 맞이한 다큐멘터리 영화 <시 읽는 시간>은 제목 그대로 사연 많은 등장인물이 각자 시를 호출한다. 주인공들의 삶은 참 고단하고 힘들어 보이는데도 이들은 오히려 시에 자신을 투영한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동떨어지는 일이다. 과연 어떤 상황에 놓였기에 이들은 시를 찾게 되는 걸까?

 

2_1. 탈영자 다섯 명, 그들 각자의 사연

영화를 만든 이수정 감독은 1990년에 올림픽 이후 전셋값 폭등으로 인한 주택 대란을 극화한 단편영화 <하늘 아래 방 한 칸>으로 데뷔 후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오가며 긴 세월 활동해 왔다. 2012년에는 희망버스를 소재로 장편 다큐멘터리 <깔깔깔 희망버스>를, 2015년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투쟁 1주년을 기록한 <나쁜 나라>를 개봉했다. 이후 후속 작품으로 전작들이 사회적 투쟁을 충실히 기록하는데 가까웠던 데 비해 에세이 영화 형식을 취한 <시 읽는 시간>을 완성했다.

<시 읽는 시간>에는 다섯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들 각자의 사연이 차례로 소개되는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시가 등장하기 전에 그 시를 택하고 소개하는 이들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이입시켜주기 위함이다. 이수정 감독은 몇 년간 본인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주변 인물 중에서 다섯 명을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한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영화의 조연출도 겸한) 30대 오하나 씨다. (감독은 요가 수업에서 동료로 처음 만났다) 파주 출판 단지에서 출판사 교정 일을 보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콩나물시루 같은 통근버스의 장거리 이동과 그저 반복되는 교정업무 속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소외와 무력증이 발호한다. 관련 클리닉이나 약물의 힘을 빌려 하루하루 견디는 수많은 직장인처럼 본인 또한 그래야 하나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 자신을 버리거나 속병을 감춰둔 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는 ‘탈영’을 저지른다.

두 번째 ‘탈영자’는 50대 김수덕 씨다. 감독은 그를 녹음 업무로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는 영화 관련 공적 기관에서 20여 년 넘게 일했다. 녹음실 기술 스태프로 보조부터 시작해 오랜 시간 종사했고 나이가 들어 행정직으로 옮겼다. 겉으로 보기엔 안정된 직장에, 격동하는 변화와는 거리가 먼 고즈넉한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온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소일거리가 취미이던 그가 홀로 있으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증상에 시달린다. 밀려드는 고독과 불안을 견딜 수 없어 무작정 연락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는 그의 사연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곪아가는 이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는 감독이 동네 개척교회에서 만났던 40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안태형 씨다. 가난한 시인 못잖게 대책 없어 보이는 직업을 가진 그는 돈을 잘 벌기는커녕, 일에 집중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느지막이 일어나 인터넷 쇼핑이나 게임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이 없는 게 아니다. 주변의 기대와 권유에 떠밀려 직장 생활을 해봤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던 그는 같은 일을 하는 아내를 만나면서 여전히 돈은 못 벌지만 비교적 안정을 찾기에 이른다.

 

"시 읽는 시간"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시 읽는 시간 스틸 이미지

네 번째는 콜트 기타 장기투쟁 해고노동자인 50대 임재춘 씨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취직했는데 하필 세계 1위 기타 생산 업체였다. 20여 년간 잔업이 일상으로 하루에 300~400개의 기타를 만들었지만,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대상이 된 그는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바람에 10년 넘게 복직 투쟁을 벌이던 참이다.

최소한의 제도권 교육에 머문 데다 일생을 공장에서 일만 하던 임재춘 씨가 장기투쟁의 피로와 권태를 이겨내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종사하면서 그에게 시가 다가온 셈이다. 삐뚤삐뚤 투박한 손으로 글을 써보기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에 참여하기도 한다. 기타를 만들어만 왔을 뿐 연주해 보지는 않았던 그와 동료 해고노동자들은 밴드를 만들어 투쟁에 문화적 코드를 결합하기도 했다.

마지막 ‘탈영자’는 (희망버스 안에서 감독과 만난 인연의) 20대 유학생 하마무 씨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회 특유의 정체된 분위기에 힘들어하던 그녀는 외국으로 떠나려 했고 본래 목표와는 다르지만,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전공하는 중이다. 일본에서부터 질문을 제기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여전히 답을 구하면서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다양한 방식의 예술로 표현하는 나날을 보낸다.

감독 본인의 일상에서 접하게 된 이들로 연령대와 성비, 인생의 경력과 궤적 면에서 고른 조합이다. 각자의 탈영 사유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현대 (한국)사회에서 소외되었거나 스스로 순응을 거부한 이들이 한데 모였다. 과연 그들은 어떤 시를 읽고 들려주게 될까?

 

2_2. 탈영자들이 시를 읽는 행위란

전반부는 다섯 명의 탈주 과정과 개인 정보를 소개하는 나열식-순차적 구성이다. 후반부는 그들이 시를 읽는 시간을 배합하고 교차시키며 소개한다. 단순하게 보면 각자가 애송하는 시를 알리는 부분인데 전반부와 전개나 편집이 달라지면서 단조로움을 벗어나 건축물이 올라가는 과정을 보는 느낌이다.

출판사 일을 그만둔 오하나 씨는 전방위 예술 활동을 펼치던 하마무 씨와의 만남 과정에서 그녀의 시를 한국어로 번역해 교정하는 일을 맡는다. 안태형 씨는 아내와 함께 일상을 보내며 삶의 소박한 기쁨을 다소간 얻지만, 여전히 각박한 한국 사회에서 그가 자리를 잡기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안태형 씨가 담담히 토로하듯 한때 그가 집착하던 오락 게임에 노력하고 집중하는 만큼 현실은 정당하게 보상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생을 서로 이해하며 함께 빈한한 삶을 보낼 동반자와의 시간에 그는 밝은 모습이다. 김수덕 씨 또한 수줍게 소년 같은 표정으로 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하마무 씨는 자신의 다양한 면모와 세상에 대한 질문을 전시 등으로 풀어낸다. 그녀 자신이 직접 쓴 시는 세상의 강고한 벽과 부당한 편견에 부딪히고 깨어지는 연속이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임재춘 씨의 사연은 좀 이질적이다. 다른 주인공들이 세대별 보편적 갈등과 고민을 안은 데 비해 당사자가 되지 않고는 체감하기 힘든 해고노동자의 일상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임재춘 씨가 등장하는 부분은 속된 말로 ‘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또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인간 소외를 드러내는 단면이다.

 

"시 읽는 시간"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시 읽는 시간 스틸 이미지

이제 사연 참 많은 다섯 사람과 시가 만난다. 오하나 씨는 짓다 만 신도시 개발 터 황량한 땅에서 성장(盛裝) 한 모습으로 조곤조곤 시를 낭독한다. 세밀한 감성으로 그녀가 읽어 내려가는 시는 임경섭 시인의 <새들은 지하를 날지 않는다>, 그리고 개별적인 애도의 표시인 <죄책감>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애도에 질문을 던지고, 익숙한 것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빤한 연민으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땜질해 온 이들이라면 스크린 화면에 큼직하게 새겨진 시구절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만큼.

김수덕 씨는 영화에서 소개되는 시인들 중 가장 대중적일, 이정하 시인의 <지금>을 읽어가며 하루하루 스쳐 보내곤 하는 일상의 소중함과 가치를 담담히 이야기로 풀어낸다. 안태형 씨는 심보선 시인의 <오늘 나는>을 골랐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구절로 끝나는 시를 그는 자신의 동반자 앞에서 읊는다. 하마무 씨는 자신이 창작한 <살아있는 쓰레기>를 소개한다. 그녀의 미술 작업이나 시나 얼핏 보기엔 그로테스크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이미 본인의 삶과 지향에 대한 정보를 얻은 관객들에게는 자신을 자신이게끔 하는 결론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재춘 씨가 선택한 시는 故 김남주 시인의 <자유>다. 흔히 ‘80년대’ 감성으로 여겨질 격렬한 투쟁의 정서와 피아 대립이 명백한 구도. 하지만 임재춘 씨가 이 시를 고른 것은 한 세대가 지난 후에 그가 처한 현실이 여전히 그러하기 때문일 테다. 거대한 모순과 그를 뒷받침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사상의 무기로 도구화되는 것을 두려워 않던 옛 시절 감성의 현재형인 셈이다.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각자의 현실에서 스스로를 반영하는 시들을 골랐다. 이 과정을 통해 ‘시’는 그저 여유로운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반영이자 절창으로 오랜만에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

 

3. 온전한 ‘시 읽는 시간’의 소망

 

"시 읽는 시간"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시 읽는 시간 스틸 이미지

<시 읽는 시간>은 군더더기 없이 70여 분 남짓, 장편 영화로선 꽤 짧은 시간 동안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섯 명의 주인공이 자신들의 처지를 소개하고 각자의 상황을 시로 반영한다. 이게 내용의 전부다. 영화가 고단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라 믿는 이들에게 <시 읽는 시간>은 훌륭한 에세이 영화다. 혹은 낭독극의 확장된 형태로도 받아들여질 법하다. 그리 많은 분량이 각 등장인물에게 할애되지 않음에도 자기주장 드러내기 잘 못할 것 같은 이들의 조곤조곤한 이야기만으로 그들의 지금까지의 삶을 형상화해내고, 그 풍성한 느낌을 시로 다시 압축해낸다. 아마 몇 인물들에겐 감독이 시를 추천해 주기도 했을 것 같은데 그게 전혀 무리하지 않게 느껴진다. (감독의) 카메라 시선이 탈영자들에게 따스한 애정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덕이 퍽 잘 구현된 작품이라 하겠다.

영화에서 임재춘 씨 분량이 조금 모나게 튀어나왔다고 느낄 이들에게 보너스 하나. 감독은 후속 작업으로 임재춘 씨를 주인공으로 장편 다큐멘터리 <재춘 언니>를 2020년 후반에 완성했고,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공개 대기 중이다.

흔히 시는 좀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아니면 여유를 부릴 만할 때 접하는 예술이라 치부된다. 하지만 <시 읽는 시간> 속에서 현대사회에 지치고 절박한 다섯 사람은 시로 자신을 표현하고 위로를 얻는다.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예술 표현 중 하나인 시가 한국 사회에서 오랜만에 본래의 가치와 효용으로 구현되는, 그러면서도 독립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의의를 전혀 놓지 않은 감독의 뚝심이 어우러진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영화 속 주인공들을 힘겹게 하는 현실이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다는 아쉬움이겠다.

 


작품 정보

 

시 읽는 시간 Time to Read Poems

한국, 다큐멘터리, 2016

2021.3.25. 개봉, 74분, 12세관람가

감독 이수정

촬영 왕민철

출연 오하나, 김수덕, 안태형, 임재춘, 하마무

제작 생의 한가운데

배급 (주)마노엔터테인먼트

 

"시 읽는 시간"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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