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딛고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것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 이미지

 

1. 상처를 있는 그대로 찢어발기기 vs 더딘 극복과 치유의 서사

한국의 독립 단편영화는 꽤 유행을 타는 편이다. 특정 스타일이나 소재가 인기를 끌면 유사한 내용의 작품들이 한동안 뒤를 잇곤 한다. 한동안 한국의 극단적 현실을 더 극대화한 듯 날것 그대로 같은 작품들이 줄줄이 양산되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그것 또한 현실의 반영이긴 하지만, 그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은 사람 살 곳 못 되는 지상에 펼쳐진 지옥 같은 곳과 다름없었다. 비록 현실의 한국 사회가 문제가 많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해외 영화제들, 특히 서구 몇 곳에서 그런 작품들이 화제에 오르내리자 그런 경향은 한동안 더 대세처럼 떠돌았었다.

유독 그런 영화들은 공통으로 개인의 출구 없는 분노가 자기 파괴적 측면을 넘어 사회적 약자나 이웃에 가해지는 극단적 폭력으로 귀결되곤 했다. 영화적 절정의 순간들은 차마 보기 불편한 지경에 종종 도달하곤 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영화들에 지칠 때쯤 되면 반작용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2017년은 그런 경향에 대한 반론처럼 느껴지는 작업이 속속 등장해 흐름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해로 기억한다. 정제된 표현과 연출, 영화 속 인물들을 벼랑으로 내몰지 않고 재기의 여지를 남기는 이야기들이 하나둘 여기저기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설픈 타협과 현실 긍정은 앞에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날것의 폭력 못지않게 현실과는 동떨어질 위험에 놓인다. 어쩌면 적당하게 끼워 맞춘 타협이 더 세상을 바꾸는 데 해롭다고 생각할 이들도 적지 않겠다. 하지만 그해 선보인 여러 편의 작품들은 굳이 상처를 억지로 헤집어 후벼내지 않고도 슬픔을 슬픔답게 묘사했고, 주저앉은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의지가 돋보였다. 그런 작품 중 하나로 <미열>이 있었다.

 

"미열"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미열> 스틸 이미지

2. <미열>의 정갈한 단막극

새롭게 이사한 집에서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짐 정리에 여념이 없는 은주에게 9년 전에 일어났던, 이제는 잊고 지내던 사건이 소환된다. 과거의 일을 모르는 석호는 아내에게 닥친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고, 은주는 잊으려 노력했던 그날의 상처가 괴롭기만 하다.

<미열>은 상처의 치유를 쉽게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미 타인의 악의에 의해 개인의 삶에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겨졌다. 시간이 약이란 건 대개 그저 위로를 위해 던지는 말일뿐이다. 그게 그저 자연스레 세월이 지난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세상 누가 치유의 어려움을 논하겠는가. 상처의 치유는 지독히 힘든 과정이다. 대책 없는 낙관은 치유의 동의어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당사자의 장절한 노력과, 과거에 더 이상 갇힐 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미열> 속 풍경에선 한참 동안 가을장마와 소나기가 내린다. 아픔을 딛고 부부 사이에서 탄생한 생명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일궈나가는 도상에 선 은주와 석호에게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과거의 망령이 엄습하고, 둘 사이에서 의심암귀가 사악한 속삭임을 시작한다. 단편영화답게 <미열>은 부부에게 닥친 난관을 1박 2일의 시간 동안 간결하게 풀어나간다. 이들은 처음엔 “함께”, 그리고 “각자”, 다시 “함께”의 순서를 겪는다. 초반엔 함께였으되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에 휩쓸려 있었고, 각자의 시간 동안 둘은 혼란 속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감정을 추스르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하룻밤이 지나고 비가 그친 후 다시 함께 한 둘에게 절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현실 가족의 모습으로 공감대를 얻을 법하다. 내게 혹은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냉정을 유지하기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위기 속에서 의심이 싹트고 거리 두기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 속에서 은주는 생존을 위해 과거를 넘어서려 분투하고, 석호는 동반자의 편이 되어주기 위해 미혹을 떨쳐내려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운다. 그리고 둘은 비 온 뒤 땅 굳어지듯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관객에게 등을 내보인 채 전진한다.

단편영화는 큰 반전보다는 정교한 이야기 전개와 작품에 울림을 더하는 배경 등의 활용으로 승부를 걸게 마련인데 <미열>은 그런 점에서 부족함이 없다. 어렵게 장소를 구했다는 부부의 신혼집과 안락의자 소품은 비록 낡고 손봐야 할 것들이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의 보금자리를 상징한다.

반면, 영화 초반에 은주와 석호가 버릴까 말까 의견이 나뉘던, 결혼 선물로 받아는 놨지만 쓸 일 없던 식기 상자는 마치 주인공들이 딛고 넘어서야 할 과거처럼 결국 영화 후반 퇴장의 길을 걷는다. 그 대신 미뤄오던 서재를 만들기 위해 석호가 밤새 뚝딱 조립해낸 책장들은 부부의 미래를 일궈나가기 위한 준비다. 주인공들의 소소한 일상 풍경 속에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대부분 영화 전개의 복선이 되거나 등장인물들의 속내를 유추하게 해주는 활용도를 선보인다. 영화를 위한 준비가 탄탄하고 이야기 전개의 집중력이 빼어나기 때문일 테다.

 

"미열"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미열> 스틸 이미지

제목인 “미열”은 평균 체온보다 조금 높은 열을 뜻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하지만 분명 누군가에겐 힘들고 외로운 순간의 일이다. 영화의 핵심 배경이 되는 그 사건, 은주가 이제 겨우 잊을 만하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과거의 통증이 곧 미열인 셈이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비가 오거나 습기가 차면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주변에 곧잘 있는 것처럼, 영화 속에선 때늦은 가을장마가 줄기차게 내린다. 중반에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석호가 홀로 창가를 응시할 때 마치 수호요정처럼 등장한 가게의 중국인 아르바이트 직원은 그에게 중국어로 장마를 ‘우울한 비’라 부른다며 알려준다.

계절에 맞지 않게 청승맞은 초가을 장마는 사람의 마음 심란하게 만들지만, 일시적일 뿐이다. 그런 가을비처럼 과거의 사건은 은주와 석호를 붙들고 늘어지지만, 영화의 마지막 풍경처럼 비가 개고 파란 하늘이 돌아오자 이들은 관객이 목격할 수 있듯 뚜벅뚜벅 현재에서 미래의 삶으로 나란히 걸어간다. 그저 소소한 풍경일 수 있지만. 영화 내내 지난했던 고뇌의 과정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 고민이 빚어낸 마무리는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은주와 석호, 두 사람의 미래를 응원하게 만들 테다.

 

3. 확장된 세계관을 선보이는 <비밀의 정원>

감독은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미열>의 기본 골격을 유지한 채 주변으로 관계를 확장하는 세계관으로 장편 버전을 선보인다. 단편영화에 비해 3배 이상 커진 분량은 새로운 등장인물들의 출현과 함께 원래 버전에서 1박 2일간 벌어졌던 사건의 진행을 더 여유로운 호흡으로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비밀의 정원"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 이미지

은주와 석호 배역을 맡았던 한우연, 전석호 배우는 그대로 등장하지만 이름과 설정은 다소간 차이가 있다. ‘은주’는 ‘정원’으로, ‘석호’는 ‘상우’로 이름이 바뀌었고, 둘 사이의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상태다. 대신 정원의 동생으로 비밀의 열쇠를 쥔 소희가 등장하고 정원의 상처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이모 부부의 조력이 돋보인다. 전작에선 전형적인 친정엄마 캐릭터로만 등장했던 정원의 어머니 성격 또한 달라진 부분이 많다. 단편의 간결함 대신 장편의 서사 전개를 위한 감독의 고심 결과일 것이다.

정원은 작가에서 수영 강습 코치로, 상우는 이탈리안 셰프에서 목공일로 업종이 변경되었다. 정원은 직업 특성상 풀장에서 상주하는데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녀는 자꾸만 수면 아래로 침잠하곤 한다.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상우나 엄마, 여동생과도 마음의 문을 잠그는 그런 태도는 결국 어느 순간 변해야 할 모습이다. 끊임없이 기본적인 사건의 발단은 단편과 동일하다.

정원에게 10년 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우연히 DNA 검사로 범인이 체포되면서 정원이 혼자만의 비밀로 묻어두던 사건이 상우에게 마음의 준비 없이 알려지게 된다. 정원은 잊고 싶은 과거를 상우에게 공유하기를 망설이고, 상우는 자신에게 진실을 공개하지 않는 정원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는다. 정원의 상처를 위로하며 그녀를 돌봐왔던 이모 부부, 특히 이모부는 그런 상우를 질책한다. 단편에서 둘만의 고민이던 사건이 장편에서는 확장된 가족관계를 통해 더욱 풍부하게 각자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그리고 기존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정원의 여동생 소희가 10년 전 과거의 비밀에 관객들이 접근하는데 길잡이 역할로 출연한다.

정원은 상우에게 묻는다. 자신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느냐고. 상우는 아니라고 하지만 꺼림칙한 감정과 의혹은 그의 표정 일말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물론 상우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오히려 그동안 언급 자체를 거부하던 정원의 토로는 영화를 보는 관객과 한국 사회 보편의 인식에 대해 던지는 질문인 셈이다.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 이미지

정원은 이모가 힘을 주기 위해 말하듯 ‘아무런 잘못이 없다.’ 성폭력을 저지른 범인이 잘못한 일인데도 정원은 그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났고, 오랜 세월 고통받아 왔다. 그리고 겨우 상처를 덮고 행복을 다시 꿈꾸던 순간에 망령의 저주처럼 그날의 기억이 부활해 버렸다. 다행히 정원을 돕는 조력자들이 있기에 빙빙 돌아 부부는 서로 위로하고 공감하며 이겨낼 단초를 만들어 가지만, 여전히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건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단편의 확장 성격이라면 <비밀의 정원>은 여기쯤에서 마무리를 지어도 족할 법하다. 하지만 제목처럼 비밀의 정원을 들러야 한다. 정원은 상우와, 그리고 여동생 소회와 함께 마침내 오랜 기간 돌아가길 거부했던 고향이자 사건의 발생지인 태안으로 향한다. 그 순간 영화의 후반부는 로드무비로 탈바꿈한다. 휴게소에서 벌어지는 작은 에피소드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정원의 마지막 진입 턱처럼 작용하며, 마침내 일행이 도착한 고향집에서 정원이 굳은 각오로 대면하게 된 ‘비밀의 정원’은 그녀가 품고 있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었다. 그 거대한 장애물을 향해 정원과 소희가 힘껏 밀어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을 취하는 순간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주인공이 택하는 삶의 자세로 온전히 승화된다.

결국, 과거의 아픔을 뒤로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망각만으로는 온전히 달성할 수 없음을 영화는 사려 깊게 주장하는 셈이다. 그 대신 진정한 미래를 향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단편에선 보여주지 않았던) ‘대면’의 순간이 영화에선 몇 차례 등장한다. 단호하게 10년 전 일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법정에 출석한 정원과 상우의 모습은 단죄와 함께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은 정원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존재를 직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스스로 돌아가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여정,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마지막 장애물을 정원과 소희 자매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저지르겠다며 힘차게 밀어내는 장면이 (장편 오리지널의) 결정적 대면의 찰나다.

우리는 흔히 피해자에게 상처를 잊으라고 자꾸만 이야기한다. 가해자를 용서해야 피해자가 살 수 있다고 현인 행세를 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 피해자를 염려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불편함과 죄의식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인지 가슴에 손을 얹어봐야 할 때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지긴 하지만 근본적 치유는 지독하게 힘들다. 주변의 위로와 조언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지만 결국 피해자 스스로만이 풀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극복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섬세한 위로의 공감을 던지는 감독의 시선은 단편 <미열>에서 장편 <비밀의 정원>으로 확장되어 극장에서 한참 관객을 만나는 중이다. 모두가 천하제일 불행대회에 출전한 것처럼 분노를 터트릴 때 이 영화가 던지는 사려는 주목할 이유가 충분하다.

 

 


작품 정보

 

미열 Mild Fever

한국, 드라마, 2017, 35분(29분), 15세 관람가

감독 박선주

주연 한우연(은주), 전석호(석호)

출연 오민애(엄마), 박승은(하늘), 온유가, 이호연, 윤성원, 김민엽

2017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쟁 최우수상

2017 아시아나 국제 단편 영화제 아시프 관객심사단상

2017 사람사는세상 영화제 대상

 

비밀의 정원 Way Back Home

한국, 가족·드라마, 2019

2021.04.08. 개봉, 110분, 12세 관람가

감독 박선주

주연 한우연(정원), 전석호(상우)

출연 유재명(창섭/이모부), 염혜란(혜숙/이모), 정다은(소희), 오민애(은숙/엄마)

제작 몬순픽쳐스

배급 필름다빈

2020 부산 평화 영화제 꿈꾸는 평화상

2020 평창 국제 평화 영화제 관객 특별상

2020 오사카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 재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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