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와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의 접속

 

"부활의 노래" 스틸 이미지
영화 <부활의 노래> 스틸 이미지

1. 5월 광주를 다루는 영화들의 경향성 잡담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나오듯 외신기자들에 의해 반출된 뉴스 영상을 활용한 “광주비디오” 형태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최초로 광주의 진실을 접할 수 있었다. 해외 뉴스 다큐멘터리에 조악한 한글자막을 붙이거나, 혹은 그중 사건의 진상을 충격적으로 전하려는 목적으로 극적 장면을 부각한 영상들. 1980년대 초반부터 이런 영상들은 대학가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10여 년간 나름대로 유용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극영화로 해당 소재를 다루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파업전야>로 알려진 영화집단 “장산곶매”의 첫 번째 작업인 <오! 꿈의 나라>(1989)나, 상업영화로선 초창기 시도라 할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1990) 같은 작품이 주요한 배경으로 5월 광주를 다뤘다. 이런 흐름은 이정현의 데뷔작인 <꽃잎>(1997)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영상물은 SBS 창사특집 24부작 드라마 <모래시계>(1994)였다. 주인공들의 유년 시절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주요 단락에서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이 재현되고 공중파를 통해 전 국민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련 활동을 하던 이들이 아니라면 상당수가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으로 이미지화된 광주를 접하게 된 셈이다.

 

"모래시계" 드라마 이미지
영화 <모래시계> 드라마 이미지

그리고 어쩌면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80년 5월 광주의 이미지일 것이다. 죽을 것을 알고도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하는 조직폭력배 출신 시민군과, 진압군으로 참가해 양심에 고뇌하는 대학생으로 분한 두 주인공의 이후 인생 행보에 결정적 전환점인 만큼 공들여 연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1세기 들어서는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다큐멘터리 작업들이 눈에 띈다. 김태일 감독의 <오월애>(2010)는 그동안 거대 서사에 가려졌던 이들을 조명한다. 빵과 음료수를 나누던 구멍가게 주인, 시민군을 태워주던 버스와 택시기사들, 주먹밥 만들던 시장 상인들을 찾아 그날의 기억을 민중의 역사로 재구성한다.

강상우 감독의 <김군>(2018)은 이미 역사적 규명과 평가가 끝난 5월 광주를 온갖 음모론을 동원해 깎아내리고 훼손하려는 이들의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되는 레퍼토리와 북한군 침투설에 등장하는 ‘제1광수’의 실체를 찾는 여정을 담아 시의성 있는 사회적 개입을 목표하며 반향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작업이다.

<화려한 휴가>나 <26년>처럼 이제는 상업영화에서도 성공을 꿈꾸며 80년 5월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다큐멘터리계에서 미시사와 민중사로 연결되는 다양한 모색에 비하면 좀 더 예전의 거대 서사와 그에 기반을 둔 스펙터클 연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2021년 4월 말 개봉한 상태다. 지금 소개할 <좋은 빛, 좋은 공기>다.

 

2. “두 도시 이야기”로 연결하는 접근법

영화를 만든 임흥순 감독은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수상한 미술작가인 동시에 이제는 중견 급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미술과 영화 두 영역을 오가며 사회적 의제에 기반한 작업을 해온 감독은 4.3을 다룬 <비념>(2012)과 과거 구로공단 여성 노동에 주목한 <위로공단>(2014) 등을 선보였다. 감독의 이번 주제는 5.18 광주와 ‘더러운 전쟁’을 겪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결이다. 즉 “두 도시 이야기”인 셈이다. 빛고을이라 불리는 광주의 유래는 “좋은 빛”이다. 지구본으로 거의 정확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이름은 이탈리아 옛 지명에서 유래한 “좋은 공기”다.

 

"작은 빛, 작은 공기" 스틸 이미지

아름다운 이름과 대비되는 동 시기의 슬픈 역사를 가진 두 도시에 대해, 감독은 관련 주제를 다룰 때 익숙하게 등장하던 공식 서사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현재 남은 숙제인 실종자 문제, 미래 과제가 될 기억과 추모의 방법론을 중심에 두고 두 공간의 공통분모를 집적해 가며 두 시간 가깝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2_1. 공간의 정치학

우선 ‘공간’이다. 영화에는 몇 곳의 장소가 등장한다. 광주는 80년 5월의 흔적을 간직한 구 전남도청과 국군 광주병원, 그리고 고대 유적을 찾아내듯 진행되는 유해 발굴 현장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군부의 백색 테러 당시 전국에 340곳이 넘었다는 비밀 수용소 가운데 발견되어 기억 공간으로 보존된 ‘클럽 아틀레티코’ 수용소가 소개된다. 광주의 시가전 흔적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계엄군 병력과 헬기 사격 탄흔으로 남아 있음도 소개된다. 이제 일상 속 풍경이 된 그 미시적 공간들은 간단한 표지판과 함께 역사의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서 총알 세례를 받았던 이들의 일부는 희생자가 되었고 다행히 총에 맞지 않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1980년 5월의 일부로 간직되고 있다.

클럽 아틀레티코는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음침하고 거대한 건물이 아니다. 시내 한복판 군대의 창고 지하에 가건물 형태로 존재했던 공간이다.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우리네 5공이 스포츠로 우민화 정책을 행했듯 쿠데타 직후에 국민의 관심을 분산시키고자 월드컵을 돈으로 매수하다시피 유치했다. 바로 그 1976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경기장의 함성이 들렸다 해서 해당 수용소는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일상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데도 자신의 존재조차 밖으로 알릴 수 없는 고립의 정서를 겪었을 희생자들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 공간을 관리하는 단체는 이곳이 ‘기억을 보존하는 공간’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당시 갇혀 있던 이들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가운데 끊임없는 고문과 강간이 자행되던 그곳에서 느끼던 다양한 체험을 현장을 방문한 감상으로 전하기도 한다.

다시 광주로 돌아온다. 5.18 당시 공무원에서 계엄군, 시민군, 다시 계엄군으로 몇 차례나 차지한 이들이 바뀌었던 격동의 한복판 구 전남도청을 둘러싼 쟁점이 상세히 소개된다. 전남도청이 이전하면서 문화공간으로 재개장된 구 도청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원상 복원을 주장하는 이들은 농성 중이다. 그들의 인터뷰와 함께 카메라는 이제 학생들의 견학 공간이 된 구 도청 내 풍경을 보여준다.

체포된 시민들을 가두고 고문하는 동시에 태반이 부상자였던 그들을 치료도 했던 국군 광주병원 또한 이젠 본래 용도에서 벗어나 폐건물이 되어 있다. 현재 광주 비엔날레 기간 특별 전시장으로 활용되는 것 외에 향후 이 공간을 어떻게 이용될지는 여전히 논의 중인 상태다. 아르헨티나의 무수한 비밀시설 실태는 여전히 그 위치와 전모가 밝혀지지 못했다.

 

2_2. 실종의 정치학

다음은 실종자 문제다. 특히 해당 이슈는 <좋은 빛, 좋은 공기> 이전에는 집중적으로 조명된 바 없는 지점이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광주의 진실을 묻기 위한 청문회 이후 여전히 실체적 진실 규명이 남아 있지만, 일정한 실체가 확인된 광주의 경우 실종자 문제는 늘 주변부에 머물러 왔던 의제다. 희생자가 비교적 세세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년 5월을 다룬 기사나 문학 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 당시 주거나 신원이 불분명한 참여자들의 경우는 가족이 없거나 이후 행적이 확인되지 못해 제대로 집계되지 못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여전히 65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가 실종 처리되어 미해결로 남은 상태다.

카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희생자 문제와는 결이 다른 실종자 문제를 안은 가족들의 고통과 소망을 들려주고 그 문제의 심각성과 의미를 진단한다. 생사가 분명한 희생자들은 국가보상의 대상으로 공인됨은 물론 가족이 비록 슬픔을 떠안지만,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한 가운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동력 또한 제공한다.

 

"작은 빛, 작은 공기" 스틸 이미지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이미지

하지만 모든 게 불분명한 실종자는 공식적인 희생자에서 소외되거니와 가족들의 시간 또한 1980년 5월에 멈춰지게 만든다. 실종자 가족은 끝나지 않는 상실감 속에 갇힌 채로다. 이들에겐 미래가 다가올 수 없다. 실종자 가족들이 전하는 가족의 붕괴와 정서적 고립은 그동안 간과되어온 해당 사안에 대한 경각심을 바짝 조여온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실종 문제는 광주와는 차원이 다르다. 광주를 고립시켜 본보기로 삼은 신군부의 의도와 다르게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는 일상화된 테러를 통한 공포와 반대세력의 이유 불문한 말살을 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더러운 전쟁’으로 훗날 역사에 남은 전국적 백색 테러를 장기간 자행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대도시에서 특히 심했던 국가적 차원의 탄압이 벌어짐은 물론, 일국적 스케일을 가뿐히 뛰어넘는 규모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거기에는 중남미 좌파세력 척결이라는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상과제로 내건 미국 정부와 CIA의 지원이 든든하게 뒷받침되었다. 유신독재와 여러 마찰을 일으키던 민주당 지미 카터 정권 때나 소련과 강경한 대결 정책을 이끌던 공화당 레이건 정권 때나 미국의 안마당인 중남미 정책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또한 인접 국가의 우파 독재 정권들은 공고하게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민주인사들은 국외 탈출이나 망명 역시 거의 불가능했다. 옆 나라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그 잔혹성과 피해 규모에서 막상막하를 이후던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시기였고, 브라질과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 주변 모든 나라가 합세한 가히 대륙적 차원의 봉쇄망 속에서 탄압은 거리낌 없이 진행되었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 여러 나라에는 나치 전범들이 대거 숨어들었다. 유럽 대륙에서 남미로의 전범 탈주를 지원하는 ‘오데사 루트’라는 탈출 경로가 운영될 정도였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독일계 백인 이민자가 많던 해당 국가들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남미 독재자들에 의해 비호를 받고 중용되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반대자를 고문하고 학살하는 노하우를 갖고 있던 이들 나치 전범들은 특히 정보기관과 군대의 기술고문으로 활용되었고, 그 결과는 ‘더러운 전쟁’에서 차원이 다른 비인간성과 잔혹함으로 증명되었다.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1976~1983년 군부독재 기간의 실종자 대부분은 말 그대로 어느 날 ‘증발’해 버렸다. 이들은 지극히 소수를 제외하곤 돌아오지 못했다. 비공식 납치나 무단 체포의 형태를 주로 취했기에 생사는 물론이거니와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중 절반은 심지어 산 채로 대서양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전한다. 영화는 당시 집단적 살인행위에 사용된 비행기를 찾아내고 그를 바탕으로 살해에 가담한 비행사들을 추적하는 활동가들의 경험을 인터뷰를 통해 전달하기도 한다. 1만여 명이 넘는 수장된 희생자 중 1%만이 해변으로 시체가 떠밀려와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수용소가 내륙에 위치해 바다 대신 근처에 암매장된 이들의 유해 또한 여전히 대부분 찾아내지 못한 상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무더기로 임시 매장되거나 개별적으로는 신원 불상자로 공동묘지에 서둘러 매장되는 바람에 신원을 대조해 확인하기도 어렵다. 유전자 감식이라는 기법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나를 언급하며 그동안 실종자 가족들에게 실종자의 사망 확인이라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 했던 활동가들의 담담한 회고는 심리적 파고를 불러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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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이미지

2_3. 독재에 당당히 맞선 여성들

그런 참상이 선정적이지 않게 소개되는 가운데, 감독은 실종자 가족들의 노력과 헌신을 집중 조명한다. 광주의 실종자 가족 모임 인터뷰도 소중한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그 위상과 공헌에도 불구하고 국내엔 덜 알려진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의 증언이 눈에 들어온다. 과거 80년대 감옥을 메우던 ‘양심수’ 가족들로 구성된 민가협의 투쟁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테다.

1976년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군사독재가 서슬 퍼렇던 시절,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끌려가 사라질 수 있던 시간에 모두가 그 기세에 납작 엎드려 있을 때, 광장에 나선 용감한 이들이 있었다. 실종자의 가족들은 일체의 집회가 금지된 가운데 과감히 자신들의 표식으로 흰색 수건을 두른 채 광장에 나선다. 대학생도 노동조합도 정치인들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성들이 주축이 된 첫 번째 목요일의 행동에는 14명이 참여했다고 전한다. 경찰은 이들이 미친 여자들이라며 비웃고 해산에 나서지도 않는다. 이때 그녀들은 자신들이 드디어 운동의 공간을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바람은 장기 지속할 것만 같던 군사독재를 밀어내고 7년 후 민주화를 이끄는 출발이었음은 이제 역사적으로 공인된 바다.

군사독재 세력은 자신들의 총칼로 표상되는 무력이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의 열망과 의지를 우습게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민을 우중이라 무시하기에 이들은 주요 지도자들을 가두고 평범한 이들을 선동할 남성 활동가들을 제거하면 자연히 자신들에 대한 저항은 사라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작은 빛, 작은 공기" 스틸 이미지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이미지

하지만 80년 5월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절반은 여성이었고, 시민들을 선무하거나 선동을 조직하고, 물품을 보급하는 등의 핵심 역할 또한 여성들이 맡은 사실이 하나둘 이후에 확인된 바 있다. 총을 든 남성 시민군만이 항쟁을 상징하는 건 온전한 평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군부의 무법천지에서 오월 광장 어머니회가 처음으로 확보한 대도시의 시위 거점을 중심으로 모여든 이들의 지난한 투쟁이 겁에 질린 시민들의 재집결과 군부의 초조함을 불러오는 나비효과를 일으켜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군사독재 정권은 좌파 척결과 경제성장(어딜 가나 구호가 비슷한 것 같지 않은가?)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와 레오폴드 갈티에리의 7년간 독재 정치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아르헨티나의 경제구조 파탄에서 가장 결정적 시기라고 평가받는다. 당시 레이건과 대처리즘에 영향받아 무분별한 공공부문 민영화와 외자 유치를 단행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급기야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은 쇠락했다고 하나 강대국의 일원이던 영국을 상대로 포클랜드 전쟁까지 도발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고자 제 무덤을 판 끝에 패전과 함께 붕괴한다.

수만 명의 자국민을 마음대로 학살하면서 영구독재를 꿈꾸던 이들은 7년을 버티지 못했고, 민선 대통령 알폰신은 과거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가두듯 군부 세력 숙청을 단행한다. 하지만 실제 학살과 고문을 수행한 말단 하수인들과 군부 전체에 대한 진상조사와 처벌은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3. 끝나지 않은 현재적 상실

그렇게 수십 년은 갈 거라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군사독재자들은 채 10여 년도 견디지 못하고 몰락했다. 그들이 남긴 상처와 후유증은 사회 전체에 심각한 문제를 남겼다. 정치경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부당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삼았던 이들의 상처와 남은 가족에게 안긴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실종’이라는 개념이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에 대해 본격 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은 빛, 작은 공기" 스틸 이미지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이미지

3_1. 실종의 또 다른 형태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 실종자를 찾고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다양한 관계자들의 노력을 소개한다. 법의학자와 고고학자, 언론인, 관련 의제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각자 영역에서 고군분투하는 활동을 소개하는 부분에선 업무 과정에서 자신도 감정 소모에 빠져들 위험에 노출되는 이들의 헌신과 의지가 절절하게 확인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끔찍한 진실이 소개된다. 실종자와 가족들에게 가해진 반인륜 범죄가 아마 국내 제작된 영화들 중에는 최초로 비중 있게 언급된다. ‘더러운 전쟁’ 당시 납치된 민주화 인사 중 여성들은 고문 외에도 일상적 강간의 대상이 되었다. 체포된 임산부 또한 강제 출산이 이뤄졌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의 어머니는 곧바로 살해되었고, 그 아이들은 빨갱이로부터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군인이나 친군부 인사들에 강제로 입양되었다.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조치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강간을 통한 강제 임신과 출산이 권장되었고, 반대세력의 2세들이 잠재적 적대세력이 되는 걸 막고 자기편으로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

빨갱이의 씨를 말리고 대신에 우월한 자신들 군부독재 세력의 수를 늘리기 위해 여성에 대한 강간을 정당화하는 궤변의 탄생이다. 그리고 실제로 집요하게 실행되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당시 독재자들은 공히 시민을 대상으로 내전을, 그것도 섬멸전의 형태로 벌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는 눈이 더 많았던 한국의 경우 사회 전체적 억압과 감시와는 별개로 아르헨티나처럼 든든한 인접국과 미국의 공조 및 비호는 없었기에 이 지경까지 안 갔을 뿐이다.

 

"작은 빛, 작은 공기" 스틸 이미지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이미지

실종자 가족들은 이중의 실종을 당했다. 아들과 딸, 아버지와 어머니, 남매를 잃은 슬픔에 더해 언제 출생했는지도 모를 혈육 또한 실종된 셈이기 때문이다. 자료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을 찾기 위한 고생은 엄청났다. 약 500여 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미 성인이 되도록 강제 입양한 군인 가족을 친부모로 알고 보수 반공 교육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과 재회하기란 지극히 조심스러운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중 100여 명 정도가 실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끔찍한 진실을 대면한 아이 중 자살하거나 납치범인 양부모들을 살해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한다) 영화는 그 지난한 시간을 거쳐 가족을 찾은 이들의 귀중한 증언을 소개한다. 먹먹한 가운데 치유를 위한 노력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다.

3_2. 상실을 치유하고 미래를 향해

그런 잔혹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가 이 영화의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터 역사적 사실 소개와 활동가와 유가족들 인터뷰 사이에 두 도시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워크숍 과정이 단계별로 소개된다. 광주 지역의 10대 학생들은 해당 도시에선 어느 정도 확립된 교육 내용을 넘어 좀 더 능동적으로 역사가 된 기억을 어떻게 수용하고 계승할 것인가에 대해 배워나간다. VR(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구현되는 이미지로 마치 자신이 그 공간에 위치하는 것처럼 3D 체험을 해보거나 색다른 방식으로 역사 공간을 방문하고 퍼포먼스 방식으로 사건을 재현하는 등의 활동이 펼쳐진다.

아르헨티나의 청소년들은 왜 그런 참극이 일어나야 했는가에 대한 역사 해석 이해도가 더 높아 보였다. 한국에서는 상당 기간 광주로 한정된 지역적 체험으로 간주하던 5.18에 비해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더러운 전쟁’은 명실상부한 전국적 체험이었고, 실제 본인의 가족 중 당사자가 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보다 생생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를 체험하지 않은 미래 세대에게 과거의 진실과 의미를 전할 때 어디에 방향과 초점을 둬야 할 것인가? 문제에 대해 광주 현지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 ‘공식화’된 추모행사의 풍경과, 지금도 여전히 매주 목요일마다 오월 광장에 자리한 아르헨티나의 풍경이 묘하게 교차하며 상반된 풍경을 선사한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광주가 묘하게 남성의 얼굴로 보인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4. 광주를 기억하고 확장하는 영화의 미래

 

"작은 빛, 작은 공기" 스틸 이미지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이미지

두 시간 안 되는 시간 동안 실로 방대한 내용과 정보가 임흥순 감독의 장기인 미술적 접근 방식과 교차하면서 다양한 장치로 표현된다. 광주 추모 공간 옆 두꺼비 산책로에서 목격할 수 있는 두꺼비들의 풍경과 짝을 이루듯, 부에노스아이레스 옆을 흐르는 거대한 라플라타 강의 올챙이 무리가 등장하는 장면이 특히 상징적으로 뇌리에 남는다. 올챙이들은 곧 새끼 개구리로 자란다. 그리고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들이 바다로 목숨 건 이동을 하듯 물가로 대장정을 펼친다. 그 가운데 낙오한 무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 첩첩이 쌓인 사체들과 마침내 습지에 도착한 생존 개체의 대비가 마치 희생자들의 생과 사의 갈림길처럼 묘사된다. 과거의 역사에서 희생당한 이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경계를 은유하듯.

또한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화된 공간에서 연극 퍼포먼스처럼 삽입되는 풍경들은 시공간의 동시성을 적절히 제공해 보는 이로 하여금 풍부한 감상을 가져오게 만든다. 감독이 곳곳에 심어놓은 그런 장치들이 꼬리를 물고 출현한다. 온전히 그 궤도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크게 두 눈을 뜨고 응시하는 순간, 미래의 광주를 다루는 새로운 방향성의 접근으로 하나의 전범이 될 만한 작업이 우리 앞에 도착해 있다.

 


작품 정보

좋은 빛, 좋은 공기 Good Light, Good Air

2020,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인권·여성

2021.4.28. 개봉, 12세 관람가, 110분

감독 임흥순

출연 오월어머니집, 오월광장어머니회, 광주-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교류 워크숍 참여 청소년 외

제작 반달

배급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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