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자 어머니이자 여성으로서의 고백

 

"까치발" 메인 포스터 이미지
영화 <까치발> 메인 포스터 이미지

1. “까치발”의 습격에 직면했을 때

 

<농가일기>, <땅의 여자> 등의 작품으로 독립 다큐멘터리계에서 주목받던 감독은 결혼과 출산, 육아로 흔히 말하는 ‘경력단절여성’이 된다. 조산 때문에 걱정했던 딸 지후는 ‘까치발’로 걸음을 하는 것 외에는 별문제 없이 잘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까치발’만 뺀다면.

한동안 걱정하지 않았던 까치발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병원에 간다. 간단하게 봤던 까치발은 알고 보니 뇌성마비나 자폐 증세의 전조일 수 있다고 한다. 감독은 겁이 덜컥 난다. 한 살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인데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게 마치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해 이렇게 된 것만 같다. 혼전임신이 문제였던 걸까? 바깥일도 별로 안 하고 육아에 전념하다시피 했는데 온전히 더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것 때문일까? 감독은 딸을 데리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찾아보고, 같은 증상을 가진 자녀의 엄마들 모임에 참석해 교류하며 이것저것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해 봐야 확인되는 대목이 대부분이다.

감독은 점점 초조하고 쫓기는 기분이 든다. 뭐 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럴 것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럴 것 같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한국 사회에서 ‘엄마’란 존재가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양육의 무한책임. 그 무거운 어깨의 짐 때문에 감독은 점점 불안해지고 그 결과는 자기에 대한 혐오와 가족에 대한 가시 돋음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감독은 덜컥 겁이 나고,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원인을 찾아 나선다. 권우정 감독의 <까치발>은 그 과정에 대한 (너무) 정직한 기록이다.

 

2. <까치발>을 보는 시선 : 딜레마와 포커스 사이에서

<까치발>은 딜레마와 포커스가 결정적인 영화다. 만든 이와 보는 이 양자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다. 이 중에서 딜레마는 좀 더 감독 본인의 상황과 선택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포커스는 관객이 어떤 기준과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지만, 그 영화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관객이 오로지 취사선택할 문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를 본 관객은 감독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이해나 공감과 함께, 스스로의 경험과 입장에 따라 만든 이의 선택과 태도에 대해 응원하거나 단죄할 자유도를 가진다. 그 시선은 자유롭게 열려 있다.

 

"까치발" 스틸 이미지
영화 <까치발> 스틸 이미지

2_1. 감독이 처한 “딜레마”

우선 이 영화는 후반까지 내내 숱한 딜레마들이 서로 나열되고 교차하며 파열음을 낸다. 감독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동시에 지닌다.

① 다큐멘터리 연출자로서의 입장

감독은 원래 육아일기를 영화화하려 했을 테다. 본인이 처한 현재 조건에서 사적인 삶과 공적인 작업을 조합하기 좋은 테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까치발”은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여기에서 감독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테다. 새로운 주제로 싹 다 교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재정비할 것인가? 감독은 변화된 상황을 감수하고 작업을 이어나갔지만, 그 심리적 부담은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엄중했다. 촬영에 대한 욕망은 수시로 금기와 유혹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감행하게 만든다.

② 어머니로서의 입장

그런 딜레마의 핵심은 ‘어머니’라는 위치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어머니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한다. 감독과 주부라는 이중의 위치에서 둘 다 잘 해내야 하는 부담감은 부정적 에너지로 변환되어 양 어깨에 내려앉게 마련이다. 잘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 아이가 아픈 것 같은데 어릴 때 포착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 아무리 주변에서 협력한다 해도 결국 혼자 짊어져야 하는 무게감은 당사자 외에는 올곧게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 부담을 배출하는 통로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③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어른이’로서의 입장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과중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20~30대라는 사회 초년생의 입장은 그 모든 준비를 다 마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둘 갖춰나가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그런 틈을 줄 생각이 없다. 일과 육아의 양립은 보통 난제가 아니다. 그런 와중에 예전의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으로 성장한 오늘날의 ‘엄마’들은 ‘어른’이 될 기회 없이, 성숙이나 미성숙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아직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치지 못한 상태로 그 무한책임 앞에 강제로 노출된다. 결혼 전처럼 부모에 의지할 수도, 파트너와 대화할 시간도 충분하지 못한 입장에서 이는 오직 자신만의 문제가 된다.

이런 여러 입장이 교차하는 가운데 영화 속 상황은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자기혐오로 보일 만큼 파괴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감당을 도저히 못 하는 상황이 되면 스스로 살기 위해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가진다. 그 와중에도 영화 연출을 향한 욕망을, 감독의 대행자인 카메라는 수시로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감독은 이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까치발" 티져 포스터 이미지
영화 <까치발> 티저 포스터 이미지

2_2. 관객을 시험하는 “포커스”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겠지만 특히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까치발>은 자신이 이 영화를 보는 기준인 포커스를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일 테다. 적지 않은 관객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영화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감독은 집요하게 남편과 가족이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순간에도, 조금 더 감정이 격해지면 호소하거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들이대곤 한다. 조금 과잉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사진/영상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총구의 기능과 닮은꼴로 보이는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정반대로 소중한 이들을 드러내 가면서 자신의 치부 또한 스스로 폭로하는 감독의 각오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법하다. 이 점은 전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선택해야 할 부분이다.

어머니로서의 태도는 아마 가장 많은 이들이 심각하게 긴장하며 고민할 측면일 테다. 딸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앞으로 계속 개선되지 못하고 이 상태로 머물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는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라도 완전한 공감에 도달 불가능할 영역이다. 엄마는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것 같다고 일 순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한국에서 엄마란 그런 사회적 존재다. 다양한 내/외부적 조건에서 모성의 책임감은 사회적 시선과 자연적 의무가 과도한 하중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그런 중력은 어느새 자기혐오와 연민, 그리고 ‘정상’성을 향한 집착으로 부정적으로 변이된다.

그 일련의 과정은 아이에겐 이해 불가의 상황이다. 왜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나에게 저러는 걸까? 심지어 적지 않은 경우에 그런 딜레마는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강압과 폭력적인 면모로 비친다. 병원에서 젊은 엄마가 말을 안 듣는 아이를 진땀을 빼며 달래다 느닷없이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그 순간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영화 속 몇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쉬울 테다. 어머니는 성자도 천사도 아닌, 그 자신 또한 완전과는 거리가 먼 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어머니는 동시에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다. 딸이었을 때 감독은 많은 기대와 함께 엄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은 여느 자식들처럼 그 기대를 배반(!)하며 자랐다. 그 절정은 속도위반 결혼이었고, 가족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순간이었다. 그런 경험을 깊이 간직한 누군가의 딸은 자신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을 어깨 위에 상시 짊어진 격이다. 그 중압과 정신적으로 초조하게 쫓기는 순간들은 자신의 아이를 온전한 주체적 자아로서가 아닌, 자기 욕구를 투영하고 완성하려는 객체화로 추락하는 결과를 맞는다. 그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의 파괴적 순간을 영화는 수시로 소환한다. 그래서 <까치발>의 특히 중반은 견디기 힘들 때가 적지 않다.

 

"까치발" 스페셜 포스터 이미지
영화 <까치발> 스페셜 포스터 이미지

3_1. 위기의 극점에서 극복을 위한 전환점으로

그런 위기가 극점에 다다랐을 때(관객 또한 지쳐 떨어질 순간에), 감독은 혼자만의 짐으로 짊어졌다간 큰일 나겠구나! 각성한 것 같다. 처음에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엄마들을 만나 조언도 듣고 대화하며 정보도 참고한다. 물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결국 관건은 복합적 면모를 띈 모순 덩어리의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과중한 강박을 내려놓는 데 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인 셈이다.

감독은 누군가의 딸로서 자신을 낳은 존재와 대면한다. 어릴 적 추억들을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그저 과거 회상이 아니라 지금껏 서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생각이 달라 해석도 달랐던 사건들, 이제야 말하게 되는 속내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후련하게 끄집어 내놓으면서 약간의 오해가 풀리고 서로의 진심도 소통하게 된다. 완벽하게 모든 걸 잘하려는 중압에서 스스로 부족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많은 짐을 벗을 수 있다.

그렇게 감독은 가족의 파국적 위기와 자아의 붕괴 우려 앞에 필사적으로 자가 진단과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의외로 해법은 간단한 것들이다. 파랑새가 멀리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7살에 격랑의 시간을 보낸 딸 지후는 여전히 까치발로 총총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은 이제 지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정하지 않는다. 까치발이건 아니건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어둠의 장막은 걷히고 불투명할지언정 미래가 눈앞에 열린다. 그렇게 그 지난했던 혼란과 고통의 시간은 견디고 버텨낼 힘과, 더 나아지려는 모색을 위해 숨 쉴 틈을 내는 데에는 도착한다.

 

3_2. 영화가 완성된 후 무대에 오르기 직전

그렇게 감독(과 가족)은 오랜 고통과 시련을 딛고 영화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어머니는 아이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이 품고 있던 불순물을 일정량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누군가의 딸은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조금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감독으로서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목할 만한 작업을 결과물로 내놓았다. 어머니가 되어보기 전에는 온전히 체득하기 어려운 정서가 낯설게 다가서는 부분이 <까치발>에는 여전히 일정 부분 남아 있다. 그리고 때로는 보기가 너무 힘들고 괴로운 장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영화를 보고,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면 주변과 나눌 만할 가치와 의미는 충분히 채워낸 기록이자 강렬한 체험의 영화가 관객과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공적 활동 분투기를 담은 기록으로 <학교 가는 길>을 얼마 전 소개한 바 있다. <까치발>은 <학교 가는 길>이 그 시련을 돌파한 엄마들이 자녀들의 정당한 사회적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스스로 ‘투사’가 되기를 마다치 않는 전 단계에서 어떤 개인적 사투를 겪으며 단련되는가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담아낸 작업이다. 그렇기에 상호보완적 관계로 두 작품을 연계해서 감상한다면 어떤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추천하는 바이다.

 


작품 정보

 

까치발 Tiptoeing

2019, 한국, 다큐멘터리, 가족·여성·장애

2021.6.3. 개봉, 78분, 12세 관람가

감독 권우정

출연 권우정, 정지후, 정인섭, 신유진, 우진아

제작 다큐이야기

배급 시네마달

2020 가치봄영화제 대상

2019 전주국제영화제

201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19 제주여성영화제

2019 광주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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