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 전성시대, 무연사회(無緣社會)의 초상

 

1. 수면 아래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거대한 변환’

 

통계청에서 발간한 ‘2020 통계로 보는 1인 가구 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기준 1인 가구 비중은 전체 가구의 30.2%에 달한다. 10가구 중 3가구가 1인 가구인 셈이고 전체 가구 구성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 가족’의 형태, 4인 가구는 2위로 밀려났으며 2인 가구의 비율도 만만찮게 늘어나는 중이라 한 세대 뒤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 모델이 병립하는 사회로 들어설 게 명백한 상황이다. 하지만 언제나 변화는 수면 아래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 중이고,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적 대비는 늘 지각하게 마련이다.

또 다른 고정관념 또한 무너지고 있다. 흔히 미혼/비혼 20~30대가 1인 가구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란 사회적 시각 또한 통계는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전 연령대에서 1인 가구는 고루 증가하고 있으며 20~30대 못지않게 50~60대가 성별 구분 없이 가파른 증가세를 보인다. 또한, 1인 가구는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대도시 주거정책과 도시계획에서 핵심적인 고려 사항이 된 지 오래다. 전체 가구의 주거형태에서 자가 주택 비율이 50% 전후인 데 반해 1인 가구의 경우 보증금 있는 월세 13평형 이하 비율이 과반을 넘고 있었다. 연간 소득 역시 3천만 원 이하가 8할에 가까웠다. 주거와 노동 정책 방향과 직결되는 것으로 시사점이 큰 통계 결과라 하겠다.

 

항상 문화예술은 그 사회의 예리한 첨단을 포착하고 반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1인 가구 증가로 인한 사회적 변화 동향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에서 소재와 배경으로 조명되는 중이다. 1인 가구 증가와 가장 밀접한 20~30대 창작자들이 다수이기에 그중 독립영화는 그 변화를 피부로 민감하게 느끼며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상을 담아내는 중이다. 그 가운데 2021년 5월 19일 개봉해 독립영화로는 적지 않은 관객인 ‘마의 1만 명’을 넘어선 <혼자 사는 사람들>은 해당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평단의 준수한 평가와 대중적 호응을 함께 얻은 주목해야 할 시도이다.

 

2. 세밀화로 그려낸 듯한 1인 가구 라이프

2015년, 일본에서 50세로 고독사(무연사)한 남성의 사연이 보도된 바 있었다. 고독사란 용어가 제일 먼저 정착될 정도로 보편적 사회문제가 된 일본에서 이 사례가 특히 이목을 끌게 된 이유는, 고인이 6톤이나 되는 성인 잡지 더미에 깔린 채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 일각의 선입견과 달리, 그는 한때 유명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혼자 살면서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연락하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었다. 유일한 친구이자 취미가 성인 잡지 탐독이었고 마지막을 함께한 것도 역설적으로 성인 잡지였던 셈이다.

고인의 집은 아담한 아파트였지만 시신은 한참 뒤에 발견되었다. 그가 깔린 잡지 종이가 악취와 체액을 흡수해서 집 밖으로 티가 안 났기 때문이다. 백골만 남긴 채 피부나 체액이 잡지에 흡수된 상태라 폐기된 잡지를 태우는 게 곧 화장 의식이 되었다고 전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국내에도 보도될 정도로 일본 사회 내에서 반향을 일으켰던 해당 사건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전개되면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갈등과 변화가 섬세하게 결합하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2_1. 줄거리 개괄

주인공 진아는 신용카드 상담사다. 직장에서는 최고 실적을 내며 누구보다 많은 상담을 해내지만, 점심은 항상 혼자 먹고 친구나 이웃과의 교류도 없다. 진아는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생활에 나섰다. 어머니는 최근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바람났다가 말년에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온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쁘다.

그녀는 직장에선 헤드폰을 끼고 상담에 응할 뿐 동료와의 협력이나 유대관계를 맺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다른 상담사들이 진상 고객의 폭언 때문에 고통받는 와중에도 진아만이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 중이다. 매뉴얼대로, ARS 보이스 마냥 그녀는 완벽하게 회사가 바라는 역할을 소화하는 중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하며 그 순간부터 일상에선 이어폰을 외부와의 장벽처럼, 자신을 지키는 방패처럼 착용하고, 출퇴근길에선 늘 스마트폰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다. 귀가 후에는 텔레비전 화면만 응시한다. 바로 자발적 ‘홀로’ 족이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과거 자신의 사수였던 팀장이 신입 수진을 교육시키라는 지시를 내리자 마지못해 받아들이지만 정말 내키지 않는다. 일이 서툰 데다 자신에게 자꾸 가까워지고픈 수진이 진아는 그저 귀찮을 뿐이다. 그녀의 퇴근길에 늘 쭈뼛쭈뼛 인사를 걸어오는 이웃집 남자도 불편할 따름이다. 다시 혼자된 아버지가 별일 없이 걸어오는 전화도 짜증이 날 뿐이다. 달팽이나 소라게가 짊어지고 있던 요새 안에 틀어박히듯 진아는 현재의 고립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늘 외면해오던 이웃집 남자에게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난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진아가 지켜왔던 견고한 일상에는 계속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새로 옆집에 이사를 온 이웃은 진아의 냉대와 외면에도 특유의 붙임성을 선보이며 균열한 틈을 계속 벌린다. 자기 일은 완벽해도 누굴 가르치고 책임지는 데에는 소질이 없는 진아는 수진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고,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고를 펼치는 수진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진아는 과연 어떻게 자신의 삶을 지켜낼 것인가가 영화의 관전 초점이 되겠다.

 

2_2. 모두 ‘홀로’족이야!

<혼자 사는 사람들>의 주요 등장인물은 전원 혼자 사는 사람들, ‘홀로’족이다. 진아는 20대 후반 여성, 신입 수진은 춘천에서 서울로 상경한 갓 20살 여성, 이웃집 남자1은 20대, 이웃집 남자2 성훈은 30대로 설정된다. 다시 혼자가 된 진아의 아버지는 60대다. 모두 자의건 타의 건 1인 가구로 살아간다. 진아와 이웃집 남자 1은 자의에 의한 ‘홀로’족이다. 반면에 수진은 구직을 위해 이주하면서 강제 1인 가구가 되었고, 이웃집에 이사 온 성훈은 사건 때문에 시세보다 헐값이 된 집을 기반으로 2인 가구 혹은 그 이상을 꾀한다. 아버지 또한 어머니와 2인 가구로 말년을 지내다 떠나보낸 뒤 외로움에 교회 다니기 시작한 비자발적 1인 가구다. 각자 동기와 배경이 다르기에 이들의 1인 가구 라이프는 제각기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진아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하고 가장 외견상 멀쩡해 보이는 평균적 ‘홀로’족이다. 직장에선 능력을 인정받고 자기 관리도 철저하다. 속된 말로 ‘요즘 세대’의 전형 같은 느낌이다. 수진은 사회초년생의 평균적인 모습을 실제 배우 이미지와 잘 연결해 표현한다. 수진은 아직 모든 게 낯설고 힘들지만, 진아와 친하게 지내려 어설프게 노력한다.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는 진아의 점심 식사해에 억지로 동행하고, 목 관리용 청정제나 커피도 챙겨온다. 수진은 진아의 안티-테제에 가까운 인간형으로 설정되었다. 어쩌면 수진은 그동안 그녀가 잊고 지내던, 어쩌면 무형의 갑옷으로 무장하기 전 진아의 원형질에 가까워 보인다.

옆집에서 차례로 거주하는 두 남자도 퍽 대조적이다. 첫 번째 거주인은 전형적인 은둔형 외톨이에 가깝다. 아마 선입견 상 ‘히키코모리’의 전형일 테다. 그의 과거나 구체적 정보는 소개되지 않지만, 마음의 상처를 안고 누군가와 교감하고 싶지만 두렵고 서툰 존재로 묘사된다. 그가 불의의 사고로 떠난 뒤 영화에서 몇 안 되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진아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정말 귀신인지 혹은 진아의 죄의식이 투영된 것인지 알 순 없지만, 후반부 진아가 겪는 혼란에 가장 결정적 요소가 된다.

그가 떠나고 새로 단장된 공간에 그저 시세보다 무척 저렴하다는 이유로 입주한 성훈은 전 거주자와는 정반대의 유형이다. 그는 전통적인 가족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픈 소망이 있다.(하지만 흔히 남에게 참견하는 유형은 아니다) 그는 이웃이면 인사는 하고 지냅시다!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인의 포지션을 취한다. 이사 중 실수로 진아가 퇴근 후를 의지하는 TV 선을 건드리는 바람에 따지러 오자 곧바로 사과하고, 왜 자신이 입주한 집이 시세 이하 저가격인지 확인한 후에는 생면부지의 전 거주자를 위해 제사도 차려준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이미지

영화 속 가장 고령의 1인 가구인 진아의 아버지는 비자발적 1인 가구다. 젊은 시절 아내와 딸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다 늘그막에 무일푼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노후를 조신하게 보내려 했지만, 그 꿈은 얼마 가지 못했다. 외로움에 지치고 유일한 혈육인 딸과도 소원하다 보니 신앙보다는 사람이 고파 교회에 다닌다. 아마 노년 1인 가구에 대한 고정관념에 가장 부합되는 캐릭터일 테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동안 독립영화에서 주로 다루던 1인 가구의 양분된 유형, 20~30대와 60~70대를 한데 통합하고, 자발적 1인 가구와 비자발적 1인 가구를 아우른다. 그런 스케일이 영화의 시야와 세계관을 돋보이게 만든다.

 

3. 영화 속 설정들에 대해

<혼자 사는 사람들>은 사회적 변화를 소재와 배경으로 삼는 작품이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관계성과 변화의 매개로 면밀히 활용하는데 가깝다. 감독이 생각하는 결론을 관객에게 주장하거나 호소하기보단 관객 스스로 성찰하는 데 영화가 일조하기를 원하는 태도다. 그렇지만 사회적 추세라 해서 무조건 1인 가구가 대세라고 강변하거나 영화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고독사 문제를 동정적으로만 바라보진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추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감성적 연민과 함께 이성적 진단을 겸비하는 중용의 태도를 놓지 않고 견지한다. 이는 감독의 기본 설정이 무척 탄탄한 토대 위에서 준비되었기 때문일 테다.

 

3_1. 영화 속 ‘고독사(무연사)’와 ‘인간 증발’ 문제

우리는 통념상 여전히 고독사의 대상을 거동이 불편한 노인으로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꽤 다르다. 서울에서 청년세대 고독사는 강남 3구가 제일 비중이 크다. 서로 폐 끼치지 말자. 없는 듯 지내자. 시끄러운 소리 안 내는 이웃이 좋은 이웃이라는 문화가 보편화하기 때문이다. 마치 코끼리가 늙고 병들면 ‘코끼리 무덤’으로 가 죽는다는 전설처럼, 그곳엔 상아가 산처럼 쌓여 있을 거라는 식민주의 시절의 전설이나, 길고양이가 아프면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서 죽는 것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길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는 이들에게 특히 이런 경우가 두드러진다.

노인들의 경우에도 경제력이 받침이 될수록 자녀 세대와 따로 사는 경우가 늘어나는 중이다. 그래서 자녀가 거실이나 안방에 CCTV를 설치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도 이런 세태가 이야기 전개에 꽤 중요하게 작용한다. 진아는 성년이 되자 곧바로 독립해 어머니를 홀로 두고 집을 떠났다는 설정이다. 늙고 병든 어머니가 못내 마음에 남은 그녀는 거실에 CCTV를 설치해 수시로 화면을 확인하는 것으로 미안함을 넘기며 살아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어쩌면 증오하는 대상일 텐데도 아버지를 관찰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굳이 전달하진 않는다.

1인 가구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은 일상적인 생활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사실 누구나 혼자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의 최후를 준비되지 않은 형태로 타인에게 보여주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1인 가구는 그걸 대비하는데 기존 전통적 가족 구성에 비해 무방비 상태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21세기 신종 직업으로 유품관리사나 전문청소업체가 등장하고 관련된 도서나 방송이 늘어가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 또한 주요 전환점으로 고독사 문제를 활용해 성찰할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하려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리 크지 않은 주거공간이 휑하게 넓고 심지어 비어 보이는 건, 진아가 몇 안 되는 살림을 모조리 침실에 방어수단처럼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 자랑하듯 내보이는 아기자기한 살림 도구와 인테리어 소품 같은 건 없다. 밥은 편의점 도시락이나 간편식, 물은 생수병을 그대로 벌컥벌컥 마신다. 후드 티와 츄리닝 차림으로 외출도 하지 않는 진아에게 살림살이는 별 필요가 없다. 그녀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지만, 영화 내내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신경을 쓰게 만드는 이웃은 옆집 남자가 살던 곳 외엔 전무하다.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젊은 여성의 입장에서 좌우로 확 트인 익명성의 도시공간은 어느새 공포와 불안의 존재가 되어간다. 이웃집 남자가 진아에게 무심코 한 마디 던질 때 그의 불안한 표정과 맥락이 모호한 말은 다른 독립영화에서라면 20대 후반 혼자 사는 여성 주인공에게는 범죄나 폭력의 징후로 느껴지기 일쑤다. 진아 또한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외면해온 측면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웃집 남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라지자 그때서야 그냥 정말 누군가와 한두 마디라도 교감하고 싶어 했음을 깨닫는다. 이 지점에서 다른 독립영화에서 관련 장면 묘사와 상당한 차별성을 띄는 게 본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는 무인도에서 농구공 윌슨을 만났고 말 상대가 없는 나머지 유일한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섬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윌슨과 주인공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에 주인공도, 그걸 지켜보던 관객도 왕왕 울었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주변에 넘쳐나는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타인을 경계하며 군중 속의 고독에 젖어 들어 살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연구하자면 수백 가지 이유가 등장할 테지만, 그 분석은 이 리뷰의 본령은 아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의 태도가 그저 현상에 대한 인정과 묘사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그런 세태에 대한 사실적 표현과 함께 여러 결로 나뉘는 1인 가구의 확대가 사회적 변화의 발로일 뿐 결론이 되어선 안 된다는 입장임은 명백하게 느껴진다.

 

3_2. 진아의 본심은 무엇일까?

진아는 의도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최소한의 접촉만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 태도의 출발점은 과연 어떤 원인과 배경을 갖고 있을까? 영화 속에서 그녀의 과거는 온전히 해설되진 않는다. 하지만 후반부에 그녀가 겪는 지독한 혼란은 찔러도 피도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진아의 견고한 갑옷이 실은 지독히 여린 심장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가 아닐까 합리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첫 번째로는 역시 이웃집 남자에 대한 연민이다. 그것을 증폭시키는 건 새로 이사 온 성훈이 (자신의 무사 안녕을 원하는 것도 있지만) 얼굴도 모르는 전 거주자를 위해 조촐하게 위로의 제사를 지내는 장면에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다. 진아가 아니라 성훈이 이웃에 살았다면 이웃집 남자는 그렇게 사라지진 않았을 거라는 인간이라면 지극히 보편적으로 느끼게 될 죄책감을 그녀 역시 지니고 있었을 테니까.

두 번째로는 그녀가 억지로 떠맡았던 신입 상담사 수진과의 관계다. 진아는 회사가 원하는 최고의 상담사다. 매뉴얼의 화신처럼 그녀는 3분 내로 거의 모든 상담을 자동응답기처럼 해결해낸다. 하지만 그녀의 대응은 이용자를 위한 해결책이라기보단 카드사의 면책 용도에 가깝다. 기계적으로 사과하고 역성을 들어주지만, 이는 ‘이쯤 해줄 테니 적당히 위로받고 떨어져라!’는 체면치레에 가깝다. 그녀는 자신은 충분히 할 만큼 했고 상대방도 더 바랄 게 없으리라 믿는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이미지

그런데 수진은 늘 전화를 걸어 황당무계한 문의를 하는 ‘타임머신 남’에게 공감하며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준다. 진아는 그런 수진이 당황스럽고, 타임머신 남의 감사에 난감해한다. 물론 회사가 바라는 건 당연히 진아의 대처다. 카드사는 타임머신 남의 고민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니깐.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교감할 때, 단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음을 깨달은 진아에겐 그동안 자신이 완벽하게 해왔다고 생각했던 일 처리가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게 만드는 결정타였던 셈이다.

주인공 진아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은 그녀가 타인에게 받아온 상처와 이별의 상실감을 회피하기 위한 보호막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 그것이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가 직면하게 된 방황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지 감독의 의도를 유추해본다. 물론 진아의 고민과 결론부의 변화는 전통적 가족 구성 형태로의 회귀와는 거리가 멀다. 아직 젊은 그녀는 다만 지난 몇 해 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을 점검하고 재정비할 휴식이 필요할 뿐이고, 외형상 이후의 삶도 별반 차이 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진단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미래의 진로와 방식의 속내는 이전과는 꽤 차이 날 것이다.

 

3_3. 치밀한 배치와 적절한 연기의 시너지

주인공 진아를 맡은 배우 공승연은 독립영화에서 등장하리라 기대했던 배우는 아니다. 메이저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 출신으로 배우로 진로를 수정했지만, 늘 주류 공중파 드라마나 화장품 광고 등에서 얼굴을 알려왔던 스타급 배우다. 그랬던 배우가 지금껏 본인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던, 그리고 도전할 의사도 없어 보였던 저예산 독립영화에 도전한 것은 시도만으로도 평가해 줄 일이다. 그런데 연기가 배우의 ‘발견’ 수준이다. 이 배우가 이렇게 외모 말고 연기로 캐릭터에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그동안 품었던 선입견에 미안해질 정도다. 그 정도로 진아를 상상할 때 공승연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제외하고 생각하긴 어려울 정도의 호흡을 선보였다.

<여름밤>이나 <비밀의 정원> 등 수작 독립영화에서 주목받던 정다은 배우는 사회초년생 수진으로 본인의 첫 성인 연기 문턱을 성공적으로 넘었다. 맡은 배역은 그냥 보면 퍽 전형적인 캐릭터인지라 특색 없어 보일 위험이 컸지만 맡은 역할의 이미지를 극대화해낸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성훈 역의 서현우 배우와 진아 아버지 역 박정학 배우의 활약은 영화의 굴곡진 전환점들을 만드는 데 든든한 우군으로 손색이 없다. 시스템을 상징하는 팀장 역 김해나 배우도, 씬 스틸러를 톡톡히 해낸 곽민규 배우의 목소리 연기도 모두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제 몫을 다한다.

좋은 영화는 훌륭한 배우를 캐스팅해 적절한 배역을 맡기면 알아서 그들이 마음껏 날뛰며 완성해낸다는 이야기가 있다. 감독이 치밀하게 고민하고 오랜 노력 끝에 적재적소에 배치한 배우들은 그런 기대에 유감없이 부응한다. 심지어 이웃집 임대 건물주나 대사 한 마디 제대로 없는 상담사 동료들도 표정만으로 영화의 분위기에 일조한다.

공들여 설치한 소품들도 그 나름의 역할로 연기를 펼치는 듯 보인다. 재떨이, 이사할 때 남기고 가는 가구들, CCTV 화면, 진아가 즐겨 먹던 쌀국수까지 반복과 차이를 통해 그녀의 심경 변화를 표현해낸다. 감독이 적당하게 타협하거나 조급하게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오랜 시간 꼼꼼히 시나리오를 공들여 준비했기 때문일 테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4. 섬세한 사려와 선명한 주제가 어우러진 주목할 데뷔작

<혼자 사는 사람들>은 전반부에서는 지독하게 섬세한 톤으로 진아를 중심으로 1인 가구 세태를 영화적으로 풍부하게 재현해냈다. 그리고 중반 이후에는 진아 역 공승연 배우에게서 기대치 이상의 균열을 끌어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결말 또한 억지 해피엔딩이 아니라 아주 작은 수면 위의 전조로 현실에서 가능한 변화(들)을 제시하는 중용적인 마무리를 선보인다.

1시간 30분이라는, 장편영화로는 조금 아쉬울 법한 러닝타임을 허투루 낭비 없이 깔끔하게 활용한다. 마치 영화 초반 진아가 선보이는, 칼 같은 똑 부러지는 생활 패턴처럼. <혼자 사는 사람들>은 분명 시대를 초월하는 대작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숨 가쁘게 휙휙 바뀌는 현시대상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풍경화 또는 문학적 구현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 중 이 영화는 준수한 성취를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품 정보

 

혼자 사는 사람들 Aloners

2021, 한국, 드라마, 사회

개봉 2021.5.19., 91분, 12세 관람가

감독 홍성은

주연 공승연(진아) 정다은(수진)

출연 서현우(성훈) 김모범(옆집남자) 김해나(팀장) 박정학(아버지)

이선주(옆집주인) 주석태(정변호사)

목소리 출연 곽민규(타임머신남) 박성연(명세서녀) 정조은(고객2) 손예원(진상2)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배급 더쿱

2021 전주 국제 영화제 한국경쟁 배우상(공승연)

2021 CGV 아트하우스 배급지원상(홍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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