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에서 오르는 한라산 ⓒ이현정

드디어 새벽녘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출발한다. 싸한 공기층은 분명 새벽임을 각인시키는 듯하다. 아니 여름을 시작하지만 아직 수줍게 데워진 탓일까. 춥고 차다. 겉옷을 꺼내 입고 부산을 떠는 내 몸과 달리 고쳐 멘 등산화 끈은 의기양양하기까지 하다. 휘휘 저으며 나부끼는 승리의 깃발을 깃대에 고정시킨 듯 말이다. 발등은 으스대고 있는걸.

벌써 고지는 꽤 올랐다. 1100고지를 지났기에. 육지의 숲이었다면 아고산지대를 훌쩍 오른 셈인데 말이다. 우리는 숲으로 들어섰다. 좁은 숲 사잇길로 천천히 오르고 있다. 반갑게도 오래전 눈에 익은 나뭇잎들과 풀잎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좀딱취, 떡윤노리 등등. 한라산 식물만을 보기 위해 찾은 건 6년 만이다. 가슴 깊숙이 덫을 놓은 지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아니 한라산이 늘 덫을 놓고 있었는지도. 그 새 잊을까 말이다. 한라산의 식물들을.

 

세바람꽃 ⓒ이현정
능선을 거의 오를 때쯤 만난 세바람꽃 ⓒ이현정

조바심으로 며칠을 전전긍긍했었지. 적어도 제주에서 지내는 이틀은 목이 말라 갈라지고 깊게 팬 주름이진 내 가슴에 단비와도 같은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그저 놓칠세라 눈빛은 잎새를 따라 흐르고 흐른다. 마침내 알싸한 겨자소스의 톡 쏘는 입맛처럼 눈동자에 번쩍 쏘는 맛이 돈다. 그것은 많은 열매들 사이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던 지난날을 그리움처럼 붙잡고 있는 작고 작은 세바람꽃이 드디어 덫에 잡혔던 것이다. 내 눈길의 덫 말이다.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맨 아래 어두운 공간에 여린 몸체를 허느적허느적 거린다. 희미하게도 서 있는 작은 아이가 포착된 것이다. 져가는 아이지만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진다. 그러게 말이지. 능선으로 오르며 빛에 찌푸려지는 한쪽 눈틈으로 더욱 눈부신 아이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으나 연신 터져 나오는 나지막한 환호라 여겼지만 말이다. 꽤 주변을 놀래 킨 것 일게야. 두툼한 내 입술 밖으로 마구 퍼지는 기쁜 부르짖음이 말이야. 함께 하신 선생님들은 갸우뚱거린다. 피어있는 세바람꽃은 어느 틈엔가 쏟아지는 빛 아래 흰 몸체를 즐렁이고 있었고 이미 수많은 꽃이었다가 열매로 가득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다시금 새로운 생을 준비하고 있는 세바람꽃의 열매 말이다. 연녹색 빛깔의 뾰족 둥근 작은 그림자들은 한라산의 애처로움 한 조각으로 다시 남는다. 다시 생을 살기 위해서 무던히도 많은 애를 써야 하니 말이다. 그뿐인가. 우리들에 의해 기후는 점점 더 변화무쌍해졌다. 요행도 바라야 할 것이니 안타까움의 조각은 더 큰 조각이 되었다. 아직 능선을 걸으며 흰빛 휘날리는 아이들이 많이도 보인다. 흰그늘용담, 마가목, 산개벚지나무 등등의 아이들은 두근거림의 또 다른 조각들이 되어버린다.

 

세바람꽃과 거의 떨어진 연녹색 열매 ⓒ이현정
흰그늘용담 
마가목 ⓒ이현정

이 많은 조각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여기로 이끄는 덫이었다. 기꺼이 이 덫에 갇혀도 상관없는 것이다. 난 헤매어 본 적이 없었기에. 한라산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수많은 덫을 가지고 있다. 그 덫으로 많은 것을 잃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한라산은 행복한 덫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아직도 앞으로도 말이다.



 

글 / 이현정 경주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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