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장녀일기”
[서평] “장녀일기”
  • 박지영
  • 승인 2021.06.27 1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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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때부터 착한 딸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것이 이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착한 누나, 착한 딸이 되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연기가 미숙했던 탓에 금방 눈치를 챘다. 그래서 그냥 막 가자고 노선을 바꾸고 지금의 어정쩡한 누나, 매사 불만인 딸이 됐다. (p51)

 

책 선물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지역 출신 작가가 쓴 책이라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하얀 무광 표지에 네임펜으로 쓴 듯 삐뚤빼뚤한 표지 그림과 제목, 핸드메이드 느낌의 앙증맞은 크기는 연필로도 줄 한 줄 허용하지 않고 소장 가치를 불러온다.

이 책은 자신보다 남동생을 더 사랑한다고 믿는 엄마, 술 주정까지 닮아가는 아빠, 시니컬한 동생, 날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병아리 같은 작가의 가족 관계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에는 흔한 ‘맏이, 장녀’의 일기이기도 하다.

 

 

네가 왜 자꾸 이런 거에 눈물이 나는지 알아? 기대를 해서 그래. 나는 이제 기대가 없어. 그래서 안 울어. (p29)

8살 때부터 착한 딸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것이 이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착한 누나, 착한 딸이 되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연기가 미숙했던 탓에 금방 눈치를 챘다. 그래서 그냥 막 가자고 노선을 바꾸고 지금의 어정쩡한 누나, 매사 불만인 딸이 됐다. (p51)

 

장녀인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언제나 동생들로부터 시작된다.

출산하러 간 엄마를 보러 병원에 갔는데 아빠가 인큐베이터 속에 못생긴 아기가 내 동생이라고 알려줬다. 괴물처럼 보이는 저 아기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막냇동생은 침을 너무 흘려 자주 손수건으로 닦아줘야 했다. 그렇지만 터울이 길어 그것도 사랑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그래서 많이 안아주고 업어줬다.

이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결혼하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누나이고 언니로 남아있을 뿐 장녀는 나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부모님은 성차별도 없었고 장녀 역할은 강요도 하지 않으셨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빠는 맏이가 서울 가면(서울로 대학을 가면) 동생들도 따라간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그 말에 서울 어느 반지하 방에서 동생들 밥 해먹이고 대학 다니는 내 모습을 정말 자연스럽게 상상했었다. 물론 부모님의 공부 잘하는 딸에 대한 기대였을 뿐. 내가 서울로 가지 못하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부모 부재일 경우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의무가 강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남보다 더 무거운 경제적 의무를 졌다. 그리고 장녀들은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의무에 집착하다 보니 겉으로 굉장히 독립적으로 보인다.

오은영 박사는 맏이들의 특성인 ‘허구의 독립’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도하게 부모님을 봉양한다던가, 이런 행동은 어릴 때 채우지 못했던 결핍을 부모 옆을 못 떠나면서 채우려는 것이다. 그래서 채워지지 못한 결핍을 중요한 대상자에게 끊임없이 채우고 싶어 한다.”

 

‘왜 동생은 꿀꿀이고, 나는 이름이냐고.’  (p30)

나는 엄마의 타인이므로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난 엄마를 탓하는 게 제일 쉽고 그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서로 지독하게 미워하면서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p19)

”아빠, 데리러 와 줄 수 있어?“ 하고 묻자마자 눈물이 났는데, 참느라고 통화 내내 숨을 헐떡거렸다. 일단 눈물을 참은 이유는 내가 이 나이 먹고, 혼자 산 지 3년 차인데 여전히 요런 비상시에 쫄아버리는 애새끼라는 것을 표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p58)

 

박완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쓰는 일도 부끄럽지만 읽히는 것 또한 부끄럽다, 자신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람도 만나면 부끄럽다 못해 싫어진다고 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며 솔직하게 쓰자면, 작가는 장녀 콤플렉스를 탑재하고 아빠에게 동생에게 엄마에게 징징댄다. 서러울 때 쓰는 일기는 나중에 읽어보면 오글거린다. 그럼에도 일기를 통해 솔직 담백하게 쭈글한 자신을 공개한다.

 

이 책에는 쓰고 있는 ‘나’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관계’에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가득하다. 제목은 장녀의 일기지만. 나에게 집중된 글쓰기가 나를 해독하는 역할을 충분히 보여준다. 성장일기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귀중한 무언가가 들어 있다. 허탈하고 소탈하고 솔직하고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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