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현재와 미래를 영화로 예언하다

"Ten Years" 영화 포스터 이미지
영화 <Ten Years> 포스터 이미지

1. 2019년 이후 홍콩의 현주소

 

2021년 6월 24일, 홍콩(과 대만)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신문 ‘빈과일보’가 폐간 소식을 알렸다. 마지막 호 신문은 100만 부가 전량 소진되었다. (홍콩 인구는 2020년 기준 755만 명이다)

1995년 지오다노 창업주인 지미 라이에 의해 창간된 빈과일보는 스포츠와 연예 지면 비중이 높은 올 컬러 신문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순식간에 거대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다. 홍콩에서는 언론 트렌드를 바꿔놓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졌던 매체다. 그런 신문의 (중국 정부의 외압에 의한) 폐간 소식에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EU 집행위원회 등의 중국정부를 향한 비난 성명이 잇달았다. 중국 정부는 내정간섭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격렬한 논란의 이유는 왜일까? 빈과일보가 홍콩의 ‘반중’-‘민주파’ 입장을 대변해 왔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28일,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직후부터 거듭된 사주 지미 라이와 신문에 대한 탄압은 결국 빈과일보 폐간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은 ‘올 것이 왔다’는 입장이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홍콩 최대의 미디어 그룹조차 정부의 노골적 탄압에 자진 폐간을 선언할 정도이다. 다른 비판적 소규모 언론이나 출판사에 대한 탄압이 어느 정도나 일상적으로 노골화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 나선 이들이 우려했던 ‘일국양제’ 붕괴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일국양제란 홍콩의 중국 본토 귀속과 함께 당시 홍콩의 정치 체계를 존중해 공산당 일당체제의 중국 대륙에 대해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한 중국과 영국 간의 합의다. 본래 1997년 반환 당시 50년간 이를 존중하기로 했지만,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상 유명무실화한 것이다.

이는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카오도 여기에 포함되며 멀게는 양안관계, 즉 중국과 대만 간의 미래 통합 추진과도 결부된 문제다. 대만은 중국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현재 홍콩의 정치 상황을 근거로 대고 있다. 중국-대만 긴장 관계는 홍콩의 현황에서 바로 파급되는 위기인 것이다. 중국 정부는 여기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전부 밀린다는 위기감에 빠진 것 같고, 대만은 물론 중국 위협론에 긴장한 주변국은 중국의 일방주의 노선으로 미-중 패권 대결에서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진영논리에 휘말려 신 냉전 구도가 아시아 전체에서 심화하는 상황이다. 홍콩은 홍콩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Ten Years"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Ten Years> 스틸 이미지

2. <10년 Ten Years>가 그려내는 10년 후 홍콩

 

실은 이런 상황이 이미 2015년에 영화로 예견된 바 있다. 마치 예언서 같은 옴니버스 영화 <TEN YEARS>는 10년 후 근 미래의 홍콩을 상상하는 5편의 단편 옴니버스로 구성된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동아시아 각국(홍콩, 대만, 태국, 일본편)에서 <10년>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로 각자 자국의 근 미래를 상상하는 옴니버스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홍콩 편은 그중 첫 번째로 등장했다.

<TEN YEARS>는 디스토피아 분위기가 충만한 가상의 미래 이야기다. 15~20분 전후 개별 에피소드가 각자 독립된 이야기를 펼치지만, 그 전반적인 정서는 2014년 우산혁명의 기운과 그 직후 개시된 억압의 그림자로 서로 연결된다. 현실에 기반을 둔 가상의 판타지 설정 속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2_1. <엑스트라>, 홍콩 안의 수많은 지층들

<엑스트라>는 흑백 화면에 3개의 동시간대 풍경이 교차하는 스릴러다. 야당 정치인의 노동절 행사 현장 VS 바로 행사장 인근에서 벌어지는 높으신 분들의 정치공작 논의 밀실 VS 공작의 실행을 맡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평행 시간대에서 종횡으로 겹쳐진다.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테러를 조작하는 고위층 배후는 돈과 신변 안전을 미끼로 본토와 서남아시아 이주자들을 이용한다. 행사장 바깥에선 이주노동자 살해를 규탄하는 동료들의 작은 시위가 펼쳐지지만, 그 너무나 미약한 투쟁에는 행사장 주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 관련 외신 뉴스에서 접하던 풍경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비무장 민주화 시위대에 느닷없이 달려들어 폭행하던 괴한들의 존재에 경악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홍콩 행정부와 경찰의 비호를 받는 삼합회 조직폭력배들이란 설명이 따라붙었지만, 과연 저들은 무슨 의도로 저렇게 대낮에 폭력을 자행하는 걸까? 왜 특정지역에서 저런 일들이 발생하는 걸까? 조금만 심층적으로 들어가 본다면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홍콩은 작은 도시국가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구성 지역은 몇 개의 갈래로 나누어진다. 가장 유명한 지역은 중심부 홍콩섬으로 구성된 ‘센트럴’, 그리고 구룡 반도와 ‘신계’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미개발 지역에 속한다. 영어와 광동어가 통용되던 지역에서 표준 중국어가 구사되는 비율이 높아지고, 홍콩인과 본토 출신 인구의 비율 변화가 확인된다. 선거 결과를 봐도 판이하게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 상대적으로 본토 출신이 많고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중앙정부나 행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비율이 높은 셈이다.

또한, 홍콩인들의 중장년 세대와 청년 세대의 본토에 대한 정치의식도 차이가 큰 편이고, 특히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영국계(영국, 호주, 캐나다 등) 백인 홍콩인 비율이 드물지 않다. 또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수십만의 (가사노동 등에 종사하는)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해 건설 등 일용직에 종사하는 인도나 파키스탄계 이주노동자들도 적지 않은 숫자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다국적-다문화 도시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며, 영주권이 곧 시민권이고 지리적 위치 때문에 실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그렇기에 <엑스트라> 에피소드에서 정치 테러의 행동대원으로 등장하는 두 삼합회 말단 조직원이 서남아시아계와 중국 본토 출신으로 묘사되는 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연출이다

마침내 운명의 행사 시간이 다가온다. 더 높은 곳의 지시를 기다리는 고위층의 정치적 계산이 시시각각 변하는 와중에 두 행동대원 끄나풀은 지금까지 각자의 삶을 회고하고 이번 한 건 잘 해내면 뭘 할지 궁리하며 두려움을 달랜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_2. <겨울매미>, 박제가 된 홍콩을 아시오?

 

"Ten Years"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Ten Years> 스틸 이미지

두 번째 이야기는 <겨울매미>다. 권태롭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가득한 에피소드다. 여자와 남자가 외딴집에 있다. 둘은 마치 사라져가는 홍콩을 박제하듯 이것저것 표본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중이다. 이 단편은 구체적인 배경 설명이나 특별한 주제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은 이제는 소실될 운명의 잡동사니들을 구해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의 평범했던 홍콩 가정집을 보존하려는 것처럼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명시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진 않지만) ‘과거 홍콩의 평범한 일상’을 박제화해 보전하려는 것 같은 이들의 시도는 기괴한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마지막 홍콩인’을 거기에 포함하자는 것이다. 이 괴이한 결말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치닫지만 2014년 우산혁명의 좌절 이후 일각에서 느꼈을 절망감의 발로를 은유하는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_3. <방언>, 언어 제국주의는 멀리 있지 않다.

세 번째 이야기는 <방언>이다. 본토 표준어 사용을 강제하며 홍콩에서 널리 쓰이는 일상어 ‘만다린’, 즉 광둥어 사용을 배척하는 근 미래를 배경으로 주인공 택시기사가 하루 동안 겪는 수난 이야기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택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주인공의 과거 회상과 함께 이제는 표준 중국어, 소위 ‘북경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풍경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홍콩의 지역 자치가 무너져가는 상황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낸다.

영어와 표준 중국어 사용 압력을 등치 시킴으로써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위상을 중국 본토 정부가 대체했다는 등식을 구현해 억압자로서의 중국 정부와 수난당하는 홍콩 현지를 대비시키는 메시지가 강력하다. 이를 적절한 풍자극으로 풀어내기에 관람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표준 중국어를 배우려고 주인공은 무진 애를 써보지만 쉽지 않고, 손님이 몰리는 공항이나 터미널에는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각박해진 인심은 광둥어 외엔 구사하지 못하는 손님이 자신을 선택해도 다른 기사가 고발해버리는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만든다.

이런 표준어 구사의 압박은 중국 공산당 정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대만 또한 본토에서 밀려난 국민당 정부가 기존에 대만에서 쓰이던 대만어 방언의 공식 사용을 금지하고 표준 중국어 사용을 강제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에 대한 지역주의 저항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우리에겐 막연히 하나의 중화권이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기준과 경계의 자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Ten Years"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Ten Years> 스틸 이미지

2_4. <분신자살>, 페이크 다큐 형식의 정치 논쟁

네 번째 에피소드는 <분신자살>, 제목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다. 2014년 우산혁명 평가와 2019년(부터 계속 이어지는) 민주화운동 투쟁 방향에 대한 평가 및 전망을 다루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스타일 기법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엑스트라>가 범죄 스릴러 장르물 구조에 정치적 음모를 녹여냈다면 <분신자살>은 탐사보도 뉴스 다큐 형태를 차용해 홍콩 민주화운동의 정치적 쟁점과 운동 방식 논쟁을 치열하게 벌인다. 특히 80~9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에서도 논쟁이 되었던, 약자의 최후 투쟁 방법론으로서 단식과 분신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는 논의 수위가 꽤 깊다. 그리고 2014년(과 2019년)의 투쟁 방향에 대한 평가가 쭉 진행된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내부적으로 사그라져 들어가는 운동의 동력을 어떻게 유지할지 갑론을박 중이다. 본토 정부와 협력하는 친중 정당과 행정부는 시간을 끌면서 운동 세력과 시민들을 분리하려 다양한 시도를 펼치고, 장기화된 투쟁에 지치는 이들이 늘어간다. 홍콩의 민주화와 자치 보장을 국제적 쟁점화하기 위해 일각에선 (과거 반환 협상의 일각이자 식민 종주국이던 영국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시위와 투쟁을 펼치자고 주장한다. 그를 위해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고 희생자가 나온다. 어느 날 분신 시도가 대사관 앞에서 발생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퍼진다.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와 상황을 판단하려는 운동 세력들의 고심이 팽팽하게 대치하며 긴장감을 끌고 간다. 실제 다큐멘터리를 보듯 정치학자의 논평을 비롯해 여러 입장이 소개되며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고민을 던지는 긴장감 높은 에피소드다.

2_5. <현지 계란>, ‘로컬’의 영역을 고민하다

마지막 이야기는 <현지 계란>이라는 제목을 가졌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방언>과 일맥상통하는 주제다. 머지않은 미래의 홍콩에선 “현지”라는 글자가 검열 대상이다, 거리 곳곳에선 과거의 홍위병을 연상시키는 소년단이 실행 부대로 돌아다닌다. 완장을 찬 아이들은 제대로 내용도 모른 채 상부 지시에 맹종하며 불온서적이나 문구를 검열하고 다닌다. 그 기묘한 풍경은 과거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한 직설적 비유다. 다양한 사상과 그 기억 체계로서의 책을 불태우는 묘사로 유명한 래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이나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시대가 도래된 것과 같다. (과거에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나치 독일의 비독일적 학문에 대한 금서 소각 풍경처럼)

현재도 분리주의나 자치권 요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입장을 비꼬듯 본 에피소드 속에서 “현지”라는 단어는 금기어 그 자체다. 등장인물 중 슈퍼마켓 주인은 소년단 아이들에게 홍콩 지역에서 생산된 유기농 달걀을 그럼 뭐라고 표기하면 되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아이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가게 주인은 인근 지역에서 길러진 검증된 먹을거리를 취급하고 싶었을 뿐인데도 그의 납품 원칙은 반체제적인 게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슈퍼마켓 주인의 어린 아들 또한 소년단의 일원임에도 소극적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는 장면이나, 검열을 피해 수집된 금서를 보관 및 유통하는 비밀 지하서점의 존재, 로컬 푸드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슈퍼마켓 주인의 태도 등이 2014년 우산혁명의 의기가 아직 남아 있음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마무리 에피소드로 잘 어울리는 구색인 셈이다.

 

3. 예언서에 등극한 <10년 Ten Years> 활용법

우리의 과거 독립영화 유통방식처럼 본 작품은 단관 개봉으로 시작해 입소문을 타고 공동체 상영 등으로 바람몰이를 하면서 상영관 확대를 통해 장기 상영이 이뤄졌다. 그리고 홍콩에서는 영화상을 휩쓸고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본 작품이 담고 있던 10년 후 근 미래 홍콩의 풍경은 채 5년도 되기 전에 절반 이상 현실화되어 버렸다. 홍콩 보안법 논란은 2019년 민주화 투쟁을 낳았고, 영화 속에서 벌어지던 음모와 탄압은 현실에서 더 극단적으로 구현되었다. 그리고 현재 홍콩의 정체성과 전망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첨예해졌다. 상상력은 그렇게 현실로 탈바꿈했고, <Ten Years>는 일종의 예언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든 의도가 무기력한 좌절을 예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두 개의 문장으로 끝난다.

 

“이미 늦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영화가 소개되고 4년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적 체험의 차원에서도 본 작품을 둘러싼 상황은 참으로 기이한 그림이다. 2014년의 에너지와 반성이 농축된 <Ten Years>는 아마 앞으로 10년 후에도 홍콩의 현실과 미래를 논할 때 다시 호출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아쉽게도 홍콩의 현재 상황을 안방에서 접할 수 있는 영상물은 극히 드물다. 다행히 <TEN YEARS>과 함께 홍콩 민주파 주요 인사인 (1996년생) 조슈아 웡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산 혁명-소년 VS 제국>(2017)가 각각 현재 국내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2014년 우산혁명 직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지만 홍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기 위해 충분한 자료와 고민을 제공해 줄 것이다.

 

"Ten Years"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Ten Years> 스틸 이미지

 


작품 정보

 

10년 Ten Years

2015, 홍콩, 드라마, 근미래, 옴니버스, 사회·인권, 101분, 15세 관람가

감독 키위 초우, 궉 준, 구문걸, 윙 페이 팡, 우 카-룽

국내 배급 넷플릭스

2016 홍콩 금상장영화제 작품상

2016 홍콩 평론가협회상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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