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 김천의 독립운동’



‘김천교육너머’ 소모임인 ‘김천지역 역사연구모임’(이하 역사모임)은 7월 10일 일제강점기 김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역사모임은 2019년 ‘김천지역 3·1운동과 개령 지역 독립운동가 김단야(태연)’ 공부를 시작으로 ‘김천지역 동학농민혁명’, ‘개령 농민항쟁’, ‘형평운동’을 공부하며 그 역사의 흔적을 찾는 현장답사를 병행했다. 올해 들어서는 ‘1920~30년대 김천의 독립운동’을 공부하고 그와 관련된 탐방을 계획했으나 김천지역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으로 계획이 미루어지다가 확진자가 0~1명 수준을 보여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탐방을 하였다.

이날 답사에는 고등학생을 비롯한 열 사람이 참여하였다. 김천문화원 주차장에서 만나 맞은편에 있는 금릉회관과 김천초등학교를 가장 먼저 보았다. 금릉회관은 금릉청년회관이라고도 불렀는데 우파 민족주의자로 초대 금릉청년회장이었던 고덕환이 주도적으로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 독서회와 야학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대중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시대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꼽히는 임종업이 졸업한 김천공립보통학교(현 김천초등학교)가 바로 옆에 있다. 임종업은 서울중앙고보 시절 김단야가 기획하고 권오설이 주동했던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으나 기소 유예로 풀려나 1930년대 좌파 독립운동가로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후에 친일로 돌아선 고덕환은 그 시절 대중운동 확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리고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졸업한 김천초등학교의 역사적 인물 기록에 임종업이란 이름은 없었다. 김천의 역사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글릉회관
일제강점기 금릉회관
현재 금릉회관(김천초등학교 맞은편)
현재 금릉회관(김천초등학교 맞은편)
김천초등학교( 김천보통학교)의 역사와 임종업과 황태성에 대해 듣는 시간
김천초등학교(옛 김천공립보통학교)의 역사와 임종업과 황태성에 대해 듣는 시간

일행은 황금동 교회를 거쳐 임종업 생가터를 찾아 골목길을 떠났다. 황금동 교회 최용수 장로와 김충한 조사, 한명수 조사 등은 3·1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으나 빌린 인쇄기를 돌려주는 과정에서 발각당하여 미수에 그쳤다. 임종업이 그의 평생 동지이자 처남이었던 황태성과 더불어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검거되었을 때 판결문에 나오는 주소는 황금정 7번지, 또는 77번지였으나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6·25전쟁 때 이 일대가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어 구획정리를 새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적도도 불타고 없어 새로 작성된 지적도로 대략 짐작되는 곳을 찾아가 보았다.

김천 독립운동가의 생가터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초기 고딕식 건물이 남아 있는 황금동 성당을 거쳐 남산공원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일제가 신사를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던 곳이다. 올라가며 고개를 점점 숙이도록 의도한 102개 계단에는 그때 세워놓은 석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공원 한쪽에는 의병 활동을 한 편강렬, 여중용 기념비가 있는데 그 옆에 김천 관리(군수 등)들의 공덕비를 함께 모아 놓았다. 김천의 자랑스러운 역사 인물로 후손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장소인 생가를 찾아 복원하거나 비석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김천에서도 안동처럼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생가를 복원하고 비석 등을 세우는 일을 하면 좋겠다.

 

남산공원 올라가는 계단에 남아있는 일제시대 석등
남산공원 올라가는 계단에 남아 있는 일본강점기 석등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여 김천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음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여 김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음.
남산공원 내-의병활동을 한 편강렬과 여중용 기념비
의병활동을 한 편강렬과 여중용 기념비가 남산공원에 있다.
편강렬과 여중용기념비와 나란히 있는 공덕비들
편강렬과 여중용 기념비와 나란히 있는 공덕비들을 모아 세워 둠

아픔을 간직한 남산공원 계단을 내려와 당시 김산군청을 둘러보았다. 금릉군과 김천시가 통합되기 이전 금릉군청으로 쓰다가 현재는 중앙공원이 조성된 곳이다. 일제하 경찰서와 헌병대가 있었던 김천경찰서는 율곡동으로 이전하여 아직 건물이 그대로 남아 정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그 옆 김천중앙초등학교는 그 시절 일본인과 친일파, 돈 많은 지역 유지들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이다. 김천에는 백여 개 학교가 있었으나 일제의 ‘1면 1학교 정책’에 따라 조선인 아이들은 김천공립보통학교(현 김천초등학교) 한곳밖에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김천중앙농협은 시청이 있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는 김산면사무소 자리였다. 지금은 노인복지회관 공사 중인 예전 법원은 단심 재판소가 있던 곳이다.

이렇게 일제하 신사를 중심으로 학교와 관공서가 촘촘히 있던 곳은 지금 남산동 일대이다. 여기서 평화시장을 거쳐 김천소년형무소 터를 찾았다. 지금은 아파트와 YMCA, 각종 상업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다행히 평화시장에서 형무소 정문을 기억하는 상인이 있어 정문 쪽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김천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통해 지금과 후손들이 김천의 역사를 바로 알고 기억하는 공부들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938년 김천소년형무소
1938년 김천소년형무소
김천소년형무소 정문으로 추정되는 곳
김천소년형무소 정문으로 추정되는 곳

박병주 해설에 김찬수 보충 해설로 둘러보며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역사가 나를 이해하고 지역사회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그 이름이 지워진 김천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운동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아 활동을 했다. 1930년대 일본 경찰에게 300여 명이 체포되는 놀라운 사건은 수많은 탄압과 침탈에도 불구하고 김천의 시민들이 벌인 대중운동의 결과였고, 그로 보면 김천은 당시 상당히 민족적인 의식이 강했던 곳으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9월까지 공부 모임은 쉬기로 했으나,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정리하고 김천 근현대를 계속 공부할 수 있는 모임으로서 이러한 공부와 답사, 발표를 통해 김천시민의 자존감을 높이는 작업이 계속되리라 기대하며 탐방을 끝냈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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