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치하에서 ‘브레드위너’가 된 남장소녀의 시간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포스터 이미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포스터 이미지

1.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되어버린 아프가니스탄의 현실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은 완벽하게 재기한 탈레반과 형식적 평화협상 후 지난 20년간 2조 달러의 군비와 연인원 80만 병력을 쏟아부었던 땅에서 철수 중이다.

지난 7월 2일, 미군의 최대 전략거점이던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야반도주’라는 표현까지 붙을 만큼(AP 통신 발) 구체적 시각도 아프간 군에는 통보하지 않은 채 빠져나가는 상황이 외신에 보도되어 큰 충격을 주기도 한 상황. 탈레반의 공식 발표대로라면 이미 전 국토의 85%를 자신들이 차지한 상황이라 공언할 정도다. 미국의 후견으로 수립된 중앙정부는 현재 수도 카불조차 건사하기 어려워 보이며 미군의 완전 철수 후 길어봐야 6개월이 한계라는 각국의 관측이 횡행한다. (구소련 철수 후 친소 정권은 3년은 버텼다)

탈레반의 재집권에 대비해 지역과 종족별로 할거하는 군벌들은 긴박하게 재무장 중이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이들의 세력은 형편없이 줄어든 상태라 현재 탈레반의 제일 큰 적은 다예쉬(흔히 IS라 부르는!) 세력이라 한다. 둘은 미군이 떠난 아프간의 패권을 잡기 위해 지금도 치열하게 전쟁 중이다. 그나마 온건 무슬림 세력과 근본주의 세력이 충돌하던 아프간 내 패권 경쟁은 이제 극단주의 VS 더 극단주의 세력의 각축으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꼴이 되어버린 셈이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여기에 대해선 다양한 논의와 입장들이 교차하며 충돌한다. 1970년대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부터 반세기 동안 이어진 외세의 개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구소련은 친소 정권을 확립하기 위해 무력 침공을 단행했고 냉전의 한복판에서 반대편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 궁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동맹을 그러모은다.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비밀공작을 통해 미국이 주도한 작전은 중동 이슬람 산유국들의 자금 지원으로 (소련제를 카피한) 중국의 무기를 활용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의 정보기관이 합심해 실행된다. 막대한 무기와 자금 지원에 힘입어 무신론자들인 외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한 아프간 무장 세력들을 후세에 ‘무자헤딘’이라 부르게 된다.

소련의 붕괴 후 친소 정부를 붕괴시키는데 성공한 무자헤딘은 정권을 잡지만 반외세라는 공통점 외엔 이합집산이던 이들은 군벌로 쪼개져 내전을 시작한다. 그런 혼란에 염증을 느낄 때,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슬림 근본주의 청년들이 ‘탈레반’이라 칭하며 신흥세력으로 등장한다. (‘탈레반’이란 명칭 자체가 학생을 뜻한다) 이들은 순식간에 부패와 분열로 약화된 기존 무자헤딘 세력을 격파하거나 제휴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다. 근본주의 세력의 폐단이 뚜렷했지만 이때만 해도 냉전이 종식된 후 서방 각국은 아프간의 현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2001년 9월 11일 이전까지는.

9.11 사건을 일으킨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은 탈레반의 비호 속에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 은둔했고, 미국은 복수를 다짐하며 아프간 전쟁을 개시한다. 탈레반은 미국의 군사력과 틈을 노리던 기존 군벌들(‘북부동맹’이라 불리던)의 협공으로 쉽게 격퇴되고 산악지대로 쫓겨난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 더 개방적이고 서구 친화적인 정권이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힘을 과신한 나머지 이라크 침공으로 양면전쟁을 개시했고, ‘강대국의 무덤’으로 불리던 아프가니스탄은 그 이유를 증명하기 시작한다.

정복은 쉬우나 통치는 어려운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조건과 반외세 성향은 기존에 소련을 대상으로 저항하던 무자헤딘의 총부리를 미국으로 향하게 만들었고 지속된 전쟁은 자국 내 개혁 대신 극단화된 무슬림 대 외세로 구도를 뒤틀어놓는다.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그 20년간의 내전 결과가 현재의 상태다. 반외세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런 결말이 강대국의 오만이 낳은 필연적 결과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미국은 (많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철수하면 그만이다. 그 자리에 남겨진 건 전쟁으로 황폐해진 아프가니스탄과 극단주의 세력과 군벌이 할거하는 ‘실패 국가’의 현실이다. 적어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 IS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라크나 시리아에서 패퇴한 IS 부류의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간으로 몰려들면서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이 땅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으로 치닫는 중이다.

아프간 전쟁은 수많은 난민을 낳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떠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대한 관심은 희박하지만, 그곳에는 분명 수천만의 사람들이 지금도 험난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터. 탈레반 치하의 수도 카불에서 살아가는 남장소녀 파르바나와 가족의 애환을 담은 장편 애니메이션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은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에 속한다.

 

2. “브레드위너”가 되어야 했던 소녀의 애환

 

이미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해외에선 호평을 받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은 국내에선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되는 중이다.

※ 원제이자 원작의 제목이기도 한 <The Breadwinner>가 현재 국내 스트리밍 중인 제목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이후로는 <브레드위너>로 통칭하려 한다. (브레드위너는 빵을 마련하는 자, 즉 ‘가장’을 뜻한다)

원작은 캐나다의 반전주의 페미니스트 작가 데보라 엘리스가 쓴 전 4권으로 구성된 동화 시리즈이다. (국내에 전 4권 모두 번역 출간되어 있다!) 탈레반 치하에서 옥중에 수감된 아빠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 파르바나와 그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이야기다. 소녀의 시선으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억압적 일상과 성차별, 오랜 전쟁으로 파괴된 사회 풍경을 세부적으로 묘사한다.

 

"브레드위너" 원작도서 이미지
<브레드위너> 원작도서 이미지

애니메이션 영화는 전 4권 중 1권과 2권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원작자는 실제 사실에 근접한 묘사를 위해 수개월간 파키스탄 국경의 아프간 난민촌에서 난민들과 함께 지내며 방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또한 그런 충실한 고증을 잘 활용해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을 2D로 옮긴 듯 묘사가 뛰어나다.

탈레반의 근본주의 정권 치하에서 이미 오랜 전쟁으로 황폐화된 나라는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최소한의 사회 유지를 위한 기능은 어찌 돌아가는 듯싶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성과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불합리한 차별과 함께 약자 아래에 더 약자를 설정해 보수적 남성들에게 기득권과 우월감을 보장하는 것으로 간신히 가동되는 탈레반 치하의 정권은 태생적으로 불평등과 비합리성을 깔고 유지될 수밖에 없다.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가자는 탈레반의 지배하에서 정작 무슬림의 덕목인 이웃과 약자를 돕는 전통은 사라진 세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10대 소녀 파르바나는 교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4남매의 셋째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과 결과물로서의 탈레반 정권은 그런 소박한 가족의 삶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파르바나의 아버지는 (외세에 맞선) 전쟁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 한쪽 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된 상태고 오빠는 부재한 상태다. 파르바나에게 (여성에겐 금지된 고등) 교육을 가르치는데 편견이 없었던 아버지 덕분에 소녀는 아프간에서 통용되는 양대 언어(파슈툰어와 다리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지만, 탈레반 세력은 금지된 교육을 시키고 불온서적을 갖고 있다는 죄목으로 아버지를 사상범 수용소에 감금한다.

그 순간 간신히 유지되던 이 가족의 생계는 무너진다. 여성은 반드시 가족인 남성과 함께 아니면 대외 활동을 할 수가 없게 규정된 탈레반의 통치 방침 때문에 아직 어린 남동생 자키 외엔 남자 어른이 없는 이 가족은 쌀이나 빵이 떨어져도 구입하러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된다. 거리의 상인들은 탈레반이 두려워 식료품을 팔지 않고, 탈레반 체제에서 완장을 찬 종교 경찰들은 거리 곳곳에서 여성이나 반대 세력을 색출하는 것으로 소일하기에 자칫 잘못했다간 태형을 당할 위기가 상존한다. 대체 어떡하란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불합리 속에서 파르바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남장을 하고 두려움에 떨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공포에 질린 채 거리로 나왔던 파르바나는 어느새 기이한 해방감을 느낀다. 남장을 하는 순간 그녀에게 닫혀 있던 가게의 문은 열리고 (불안하지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남장을 한 이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어릴 적 동창 샤우지아는 파르바나보다 먼저 ‘델로와르’란 이름으로 거리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 중이었다. 파르바나는 식구들을 위해 빵을 벌고 수감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위험과 난관으로 가득 차 있다. 남장을 하고 ‘오테시’(‘불’이란 의미)란 이름을 한 파르바나는 과연 가족을 지키고 아버지를 구해낼 수 있을까?

 

3. 미시사와 거시사를 연결하는 ‘극중극’ 구조의 매력

 

<브레드위너>는 파르바나 가족의 애환과 함께, 가족 내에서 구전되는 소년 술래이만의 모험 이야기를 통한 극중극 형식을 통해 풍부한 배경 해설과 주제 전달로 나아간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딸에게, 나중에는 파르바나가 남동생 자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비한 환상 동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작품이 가진 주제의식과 가정사의 비밀을 고스란히 은유하는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그전에 작품 초반부, 아버지가 카불의 모래먼지 가득한 좌판에서 두려움에 가득한 딸에게 들려주는 구술사부터 흥미롭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구술사는 그 자체로 간략한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와 역사 요약에 해당한다. 힌두쿠시산맥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산악 지역이지만 여러 문명과 민족이 교차하며 지나던 실크로드의 주요 교역로에 해당하던 땅, 아프가니스탄은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풍요와 함께 외세의 개입을 불러들이던 땅이다.

‘왕중왕’이라 불리던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으로부터 세계정복의 야망에 불타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고대 인도를 통일한 강성한 힌두 왕조들,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몽골 세력에 이어 근대 이후엔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에 이어 소련과 미국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의 패권을 거머쥐려 했던 거의 모든 세력이 한 번씩 거쳐 간 아프가니스탄 역사가 기가 막히게 짧은 시간 안에 환상적인 애니메이션 이미지와 함께 소개된다. 이 요약 부분만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면 거칠게나마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특징을 파악할 정도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황량한 사막 고원지대가 아니라 찬란한 고대 문명과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 또한 파르바나의 아버지가 들려주던 짧은 이야기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과거에 박트리아라 불리던 이 땅은 동서양 문명이 교류하고 합쳐지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그런 환상적인 이야기가 등장하는 배경이 탈레반 치하에서 황폐해진 수도 카불의 저잣거리라는 상황이 더 비극적이긴 하다.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스틸 이미지

소년 술래이만의 모험은 더 작품의 줄거리 전개와 직접 연결된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딸에게, 나중에는 파르바나가 남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 즉 천일야화에 나올 법한 내용이다. 마을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 코끼리 왕이 수하의 맹수들을 시켜 빼앗아간 1년 농사를 위한 씨앗 종자를 되찾으려는 소년의 모험 이야기는 처음에는 그저 고달픈 현실을 잊기 위한 최면제처럼 다가오지만, 후반에는 파르바나 가족의 고난과 통합된다.

소녀와 가족의 고난은 어느 순간에 전설 속 영웅 신화처럼 아프가니스탄 민족의 서사시로 변환되는 듯 느껴진다. 무슬림이 그 출발부터 강조하던 자선과 관용의 전통이 동화 속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주인공이 위기를 탈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에 자비심이 사라진 아프간의 현실과 탈레반의 강권 통치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탈레반이라고 해서 모두가 악마처럼 묘사되진 않는다. 파르바나 아버지의 학교 제자였음에도 앞장서서 완장을 차고 스승을 감옥에 집어넣는 데 일조함은 물론, 주인공과 가족, 친구들을 위기에 끊임없이 빠지게 만드는 악역 이드리스는 기나긴 내전으로 교육을 비롯한 사회 규범이 무너진 가운데 황폐화된 세대를 상징한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브레드위너’가 되어 역할을 해야 할 청년들은 증오와 욕망만 남은 채로 탈레반의 완장을 찬 채 횡포를 일삼는 것으로 자족할 뿐, 그 외에는 아무런 효용도 쓸모도 없어 보인다. 반면에 문맹이지만 자비심을 잃지 않은 탈레반 라자크는 그 대척점에 위치한 존재다. 그는 여러 차례 파르바나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준다. 탈레반이 절대 악은 아니며 아프가니스탄의 현실 속 일부라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이정표 역할을 담당한다.

관점에 따라 본 작품에 대해 아쉬운 부분을 충분히 지적할 수 있다. 막바지에 탈레반은 전쟁을 앞두고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처형하거나 어디론가 도주하기 시작한다. 도시 상공에는 전투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미국 주도의 공습과 전투의 전조다. 영화 내내 탈레반의 억압과 차별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현재의 난국에 책임이 있는 외세, 특히 상황을 악화시키고 뒷수습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문제점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작을 쓴 작가의 초점으로 봤을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쓴 작품에 복잡한 국제정치 문제를 전부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건 조금 과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설명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부분에서 짧지만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4. 현실의 ‘파르바나’들에게 닥치는 고난을 외면하지 않기

 

<브레드위너>는 탈레반 정권이 미국의 공습으로 무너지고 파르바나의 가족이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나는 재회의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원작자도 동화의 끝을 그렇게 맺고 싶었을 테다. 하지만 강대국의 원죄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지금도 반세기 넘게 진행 중인 내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그 땅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수많은 파르바나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강요한다. 구소련의 탓, 미국의 탓이 큰 점은 명백하지만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G7 회의에 초대받는 준 회원국이라고 의기양양할 게 아니라 국제적 문제에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가 한국 사회에서도 확산되어야 할 때가 한참은 지났다.

혹자는 외세 대 자주의 관점에서 탈레반의 승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외세 대 자주라는 구도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자주란 분명히 해당 사회 구성원들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선이어야 한다. 탈레반을 위시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를 촉발한 건 제국주의 열강의 부당한 개입과정임이 분명하지만, 그 원인을 진단하는 문제와 지금 당장 현실의 인권유린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구분되어야 할 테다.

평범한 한국 사회의 개인이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하지만 국내에 어렵게 문을 두드리는 아프간 난민을 과연 우리가 얼마나 관심 갖고 대해 왔는지 돌아보면, 한국 사회는 사실상 외면에 가까운 태도로 일관해 왔다. 하다못해 본 작품에서 묘사된 아프가니스탄 수난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보다 많은 이들이 접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도 필요하다. 선진국 반열에 끼어들었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책임을 나눠질 각오가 필요한 한국의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작품 정보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The Breadwinner

2017, 캐나다·아일랜드·룩셈부르크, 애니메이션, 93분, 12세 관람가

감독 노라 투메이

제작 안젤리나 졸리

배급 넷플릭스

2017 LA 비평가협회상 애니메이션상

2018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 심사위원상 및 관객상

2018 퓨처필름영화제 패뷸러스 앤 판타스틱 서포터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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