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진밭교에서 5차 침탈에 항의하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5월 14일 이후 1000여 명의 경찰병력이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소성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벽 6시까지 소성리로 달려갔고, 사드기지 건설 반대 집회를 하면서 경찰들의 폭력에 온몸이 피멍으로 물들었다. 소성리 주민들은 몸과 마음에 골병이 들어간다.

5월 18일 화요일부터 본격적인 미군 육로수송 군경 합동작전이 시작되었다. 2021년 소성리로 5번째 경찰 침탈이 있는 날이다. 개신교 진보단체 ‘예수살기’에서 소성리로 파견 나온 강형구 장로님의 거처(컨테이너)와 소성리책방 컨테이너 사이에서 평화지킴이들이 격자를 들고 나오다가 경찰들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격자 한쪽은 경찰이 잡아서 세우고 있을 때, 재빠르게 유영재 님이 격자 위로 올라탔고, 다른 몸 가벼운 몇몇 사람들이 세워진 격자 위로 올라타서 격자를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섰다. 위험천만한 대치 속에 격자는 반듯하게 눕혔고, 나도 사람들도 격자의 구멍 속으로 경찰들의 포위를 뚫고 속속 들어가서 마을길을 열지 않기 위해서 저항했다. 그러나 끌려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5.18인 오늘, 40년이 지났지만, 이 나라는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나라가 말로만 ‘민주주의’ 하고, 말로만 국민을 섬기고 하지만, 달라진 게 없단 말입니다. 5.18을 추모하고 기억하려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광주로 달려가 그날의 아픔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소성리는 40년이 지난 당시의 광주와 똑같습니다. 부당하고 불법적인 군인들이 설치고 다녔던 광주와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소성리는 제2의 광주입니다.”

사드철회성주대책위 이종희 위원장이 새벽을 여는 소성리 마을길 한복판에서 연설했다.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온다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은 정당화되고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은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보지만, 경찰의 물리력에 끌려 나왔다. 먼 길 달려온 연대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소성리를 친정 드나들 듯 다녔던 사람들은 새벽길을 달려왔고, 그 수가 주민들과 합해서 40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40여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경찰병력 1000여 명이 들어오겠다고 선전포고했다.

 

5월 18일 침탈 현장에서.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5월 18일 소성리.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5월 20일 6번째 경찰 침탈이 있었다. 나의 기록작업팀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동료인 하은 님과 혜미 님이 소성리로 연대를 왔다. 새벽 6시부터 소성리로 집결해서 마을길에서 집회를 시작한다. 개신교 기도회를 강형구 장로님이 주관해서 한반도 평화기도문을 함께 읽고, 성경 말씀을 경청한다.

성주대책위의 이종희 위원장님이 열변을 토하고, 원불교 법회로 이어지는데, ‘종교안전팀’이 김선명 교무님을 에워싸고 성물을 뺏을 준비를 한다. 물론 뺏지 않고 보관함에 담아서 안전하게 이동시켜주겠다는 면목이었지만, 우리 눈에는 원불교 법회 도중에 성물과 탁자를 치우는 행위며 교무님을 둘러싸서 대중들과 격리하는 행위는 빼앗는 것이고, 고착시키고 감금시키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침 7시만 되면 우리는 마을회관 앞으로 끌려들어 가서 경찰병력이 쌓은 담벼락 안에 감금당한 채 의자 위로 올라가서 경찰들의 어깨너머로 마을길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면 공사 인부들이 퇴근 시간에 맞춰서 오후 평화행동을 했다.

먼 길 달려온 혜미 님과 하은 님이 온종일 소성리에 연대했다. 아침 싸움이 끝나자 부녀회장님을 따라서 할머니들과 오이하우스로 가서 오이를 따왔고, 원불교 비대위에서 점심을 먹고 소성리에 머물렀다.

오후 4시면 공사 인부들의 퇴근시간대에 맞춰서 마을 앞 도로에서 오후 평화행동을 한다. 항의 행동을 하던 중에 혜미 님이 여자 경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할머니들 곁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경찰이 강제진압을 시도하자, 항의하면 끌어낼까 봐 ‘내 발로 나가겠다’고 경찰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 경찰들은 혜미 님에게 다가가서 끌어내려고 붙잡았는데 한 여자 경찰이 혜미 님의 엉덩이를 손으로 쥐는 일이 벌어졌다.

끌려 나온 혜미 님은 격분했고 곧바로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하던 중이었다. 소성리 미군육로수송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소성리마을길에서 여자경찰에 의해서 성추행이 발생했다고 피해 당사자가 방송했고, 경찰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계속 강제진압만 하고 있었다.

끌려 나온 사람들이 경찰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항의를 하던 중에 평통사 활동가 하랑 님이 넘어졌고, 경찰들의 방패에 짓눌려서 압박을 당해 호흡이 곤란해지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다. 나와 사람들도 119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안 듣는 건지, 경찰들은 계속 우리를 밀어내려고만 했다. 하랑 님은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다행히 응급치료하고 안정을 취한 뒤에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5월 25일 7번째 소성리 마을로 경찰 침탈이 있었다. 마을 앞에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자리를 잡고 집회를 시작하려고 하면서 경찰들의 시선을 뺏고 있을 때, 몇몇 연대자들이 소성리마을회관보다 아래쪽에 격자를 들고뛰어 내려가서 진을 치고 길을 막았다. 소성리보건소에서 소성리 마을로 올라오는 길이다. 우리는 소성리마을회관 앞 도로에서 집회를 시작했으니 길목을 두 겹으로 막은 셈이다. 경찰지휘부가 한자리에 모여서 의논하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동시에 진압 작전을 하기로 한 모양이다.

 

5월 18일, 경찰은 격자를 잡고 버티던 평화활동가를 겹겹이 포위해 끌어냈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마을회관 쪽 대오는 맨몸이라서 금방 끌려 나왔지만, 격자에 들어간 평화활동가들은 치열하게 격자가 치워지지 않도록 날카로운 쇠붙이의 면을 잡고 버티고 견뎠다. 그렇지만, 소수의 저항이었다. 다수 경찰의 물리력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경찰들이 격자에서 끌어낸 남자대학생을 마을회관으로 끌어내고는, 그 자리에서 목을 가격하고 짓누르는 보복성 폭행을 저질렀다. 대학생의 목에 핏발선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한참 동안 구타를 당한 것으로 보였다. 김태령 님은 여경이 빽허그를 할 때마다 가슴뼈가 으스러지도록 눌려서 아프다고 호소했다.

상황이 끝나고 나서 태령 님을 병원으로 데려가서 사진을 찍고 의사와 상담을 했는데, 당장 골절은 아니지만, 골절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서 며칠 동안 지켜보면서 사진을 더 찍어보자고 했다. 소성리로 온 연대자들이 경찰폭력에 가슴뼈가 눌리고, 손목이 비틀리고 다리가 꺾여서 허리와 등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경찰들은 폭력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고, 7시 전에는 도로를 열어놓아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말고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

경찰병력이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소성리로 들어오고 소수의 주민과 평화지킴이들에 대한 폭력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5월 27일 진보연대, 민주노총 등의 운동 세력들이 소성리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100여 명의 사람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병력은 새벽 5시부터 들어와서 마을을 봉쇄해버렸다. 원래 작전 계획은 화요일과 목요일이었지만, 6월 1일 화요일은 원불교 1대 교조이신 소태산이 열반한 육일대재 기념일이라서 하루 앞당겨 5월 30일 경찰병력을 이동시켰다고 변명했다.



 

글 /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 주민이고,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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