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미군의 육로수송을 열어주기 위해서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오는 5월 14일부터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새벽부터 소성리로 달려와 한판 싸우고 나면 사람들은 출근하기도 하고, 참외 하우스, 딸기 하우스, 과수원, 논밭으로 농사지으러 가야 했다. 새벽부터 열을 내고 땀이 나도록 경찰과 한판 전쟁을 치른 사람들에게 아침밥을 먹여야 했다.

첫날은 사드배치반대김천시민대책위에서 빵과 음료 그리고 김밥 등의 요깃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나눠 먹었다. 하루만 전쟁을 치르고 끝날 줄 알았지만, 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경찰병력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매번 김밥을 사 먹는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소성리 부녀회장님은 김밥 사 먹을 돈으로 회관에서 밥을 짓겠다고 결심한다.

다음 날부터 소성리 마을회관의 부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연대하러 온 사람들이 몇 명 되지 않아서 3~40명 정도의 아침밥을 준비하면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성리의 상황이 알려지고 연대자들은 새벽 시간에도 달려와 주었다. 그러다 보니 3~40명분의 밥은 70명분으로 늘었다. 쇠고깃국을 끓이기도 하고, 국 없이 반찬만 가지고 밥을 먹기도 하고, 매번 밥하고 먹는 일도 전쟁 같았다.

싸우기도 힘든데 밥까지 다 해먹이려고 하면 할머니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우리 동네 일로 그 먼 데서 새벽부터 왔는데 밥도 안 해먹이면 되겠나. 이게 다 우리 동네 위한 일 아니가?”

금연 할머니가 말했다.

 

6월 15일도 1000여 명의 경찰병력을 태운 버스가 소성리로 밀려 들어왔다. 13번째 경찰 침탈이 들어온 날이다.

나는 새벽 4시부터 눈이 뜨였다. 카메라 촬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일찍 집을 나섰다. 소성리로 가는 길에 경찰버스 한두 대는 만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버스 한 대 마주치지 않았고, 소성리로 도착하니까 평소에 얼굴이 익숙한 정보과 형사들만 여럿 나와 있었다. 마을회관 앞 난롯가엔 재영 아제만 부지런히 난롯불을 피우고, 커다란 전기 물통에 물을 끓이면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소성리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박규란 어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한 채 걸어오셨다.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근래 마늘 캐고 밭일이 바빠서 일을 많이 했더니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모습이 안 보여서 마을회관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백광순 할머니는 돼지고기를 썰고, 금연 할머니는 마늘을 씻어서 빻으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하는 규란 엄니는 김치통을 꺼내 들고 도마 위에 김치를 올려서 썰 준비를 하신다.

조금 있으니까 소성리 부녀회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면서 부엌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들이 어쩌다가 다쳤냐고 묻자, 부녀회장님은 마늘 캐고 양파 수확할 철이라, 지난 주말에 양파망을 들어 나르다가 허리를 삐끗했다고 한다.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허리 통증이 심해서 지팡이까지 짚고 길을 나선 모양이었다.

오늘은 대학생들이 스무 명 넘게 서울서 버스를 맞춰 연대를 온다고 했고, 아침부터 싸울 주민들과 연대자를 위해서 할머니들은 돼지김치찌개를 끓여서 아침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새벽 5시 30분의 회관 부엌은 분주했다.

회관 바깥으로 나가보니까 젊고 생기발랄한 대학생들의 통통 튀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경쾌하게 들렸다. 대략 5시 4~50분경에 경찰버스가 하염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우리도 소성리 마을 앞 도로에 집회 대오를 이루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행히 멀리서 연대 온 분들이 있어서 초라하지 않았다.

강형구 장로님이 아침 기도회로 사드기지 건설공사 저지 행동을 시작했다. 6시 20분이 되자 경찰방송이 시작되었다. 집회 대오는 경찰진압에 대응하기 위해서 팔짱을 끼고,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장치를 걸기 시작했다. 원불교 김선명 교무님이 법회를 하는 6시 40분경부터 경찰진압이 시작되었다. 물론 시간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카메라로 촬영을 하는 중이어서 시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시간이 그러했던 거 같다.

그 와중에도 가장 앞자리에 앉은 규란 어머니는 부엌에 밥이 잘 되었는지, 국이 졸지는 않는지 걱정이었고, 가장자리에 앉은 이장님 부인 문영희 어머니에게 부엌을 살펴보라고 일렀다. 문영희 어머니는 회관 부엌을 다녀와서는 밥과 국이 어찌 되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원불교 교무님의 법회와 동시에 시작한 경찰진압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할머니들은 아침밥을 걱정하고, 경찰들은 가장자리에 앉은 남자들부터 무지막지하게 끌어내었다.

집회 대오가 하나씩 끌려 나오기 시작하자, 김선명 교무님을 둘러싼 종교안전팀은 성물함을 들고 와서 종교행사의 물품을 치우려고 했고, 김선명 교무님은 목탁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가장 앞자리에서 교무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 등 뒤로 들려오는 연대자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혹여나 경찰들이 연대자들을 끌고 나가는 과정에 할머니들의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에 교무님은 종교안전팀 경찰들에게 할머니들의 안전을 신신당부하였다. 종교안전팀 경찰들이 교무님을 끌고 나가려고 하자 그 자리에서 교무님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독경을 외기 시작했고, 바로 앞에 할머니들은 두 손을 꼭 모아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올해 13차 침탈이 있던 6월 15일, 소성리 할머니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목탁 소리와 교무님의 독경 외는 목소리는 경찰들의 군홧발 소리에 뒤덮이기도 하고, 연대자들의 비명에 적셔지기도 했지만, 내 카메라의 마이크에는 할머니들의 가냘픈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기도 소리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서 끝날 줄 모르는 소성리의 전쟁 같은 일상을 어찌 기도가 되돌려 놓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오늘의 투쟁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당하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끌려 나와야 하는 우리가 기도라도 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지금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까.

하루는 공사 인부들과 경찰버스가 퇴근하는 오후 시간에 마을에서 평화 행동을 하러 소성리로 올라갔더니 할머니들은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를 잡아서 의자에 앉아계셨다. 진밭교 아래 형광 벌레 같은 경찰들이 우르르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백광순 할머니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옆에 있던 정보과 이 형사가 투쟁가를 부르라며 농담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백광순 할머니가 정색을 하고는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투쟁가를 부르는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냐”고 호통을 치셨다. 이 형사도 할머니께 농담한 게 미안했던가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할머니들이 어떤 심정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사드 가고 평화 오라’를 부르는지, 할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있었던가 반문해보았다.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할머니가 새벽잠을 설치고 일어나서 집을 나서 마을회관으로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쳐들어오는 날이면 새벽 일찍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소성리 부녀회장님과 규란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소성리로 밀려 들어오는 경찰버스를 보는 할머니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사드기지로 올라가서 평화행동을 하고, 진밭을 지키면서 사드기지로 들어가는 차량을 감시하는 할머니들은 어떻게 시간을 견뎌내는지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나는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나 자신에게 되물어보았다.

그러지 못했다. 마치 다 아는 거처럼 생각했지만, 다 알지 못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할머니들이 왜 싸우는지, 어떻게 싸우고 싶은지, 언제까지 싸울 건지, 할머니들의 생각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던 거 같다.

그래서 백광순 할머니가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투쟁가를 부르는지 당신이 아요?”라는 호통은 이 형사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던 게다.



 

글 /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 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 주민이고,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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