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를 쓰다7] 82년 만에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
[소성리를 쓰다7] 82년 만에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
  • 기록노동자 시야
  • 승인 2021.08.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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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마다 소성리 마을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경찰폭력에 부상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소성리 부녀회장님은 반찬이라도 연대를 받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2016년 9월 30일 소성리로 사드 배치가 결정 나고 그해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해를 넘기고도 끊임없이 소성리로 연대자들이 들어왔고, 소성리 부녀회장님은 밥을 지었다.

처음엔 마을 주민들이 먹을 밥을 했지만, 마을에 모여드는 연대자를 외면할 수 없어서 식사시간이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회관으로 들어와서 반찬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한솥밥을 나눠 먹었다. 부녀회원들은 밤마다 마을회관 부엌에서 다음날 먹을 찬거리를 준비하고 국을 끓여댔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부녀회장님도 칠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부엌에서 나물을 무치던 할머니들은 팔순을 넘겼고, 이제 부엌일을 할 사람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7월 1일 18번째 경찰 침탈이 있었다. 울산에서 스님들이 오셨고, 경찰 방송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부엌에서 조은학 님이 고기를 볶고, 나순석 님이 오이채를 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주의 평화여성모임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 일찍 소성리마을회관 부엌으로 들어오신 거다. 조은학 님이 “오늘의 메뉴는 카레라이스입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성주평화여성모임에서 일을 거들러 오셨구나 반색을 했다. 앞으로 한 번씩 짜장밥이나 비빔밥 같은 메뉴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한판 전쟁을 치르고 나서 연대자들에게 따끈한 카레라이스를 대접할 수 있었고, 소성리 부녀회장님과 할머니들의 밥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밥상에 둘러앉은 할머니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시는데 도경임 할머니가 82년 만에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맛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경임 할머니가 맛있다고 만족스러워하셨다. 밥 먹다 말고 할머니들이 ‘평화여성모임 고맙소’하고 인사를 했다.

7월 6일은 미군 육로수송작전 19번째 군경 합동작전이 있는 날이다. 밤새 비가 내려서 촬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결에도 고민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비닐로 카메라를 덮어싸도 장비에 비가 들어가게 되고 고장 나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날 좋을 때만 투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온다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면 이것 또한 기록자의 태도가 아니라서 아주 난감하였다.

다행히 새벽에 비가 그쳤고, 소성리의 자연은 땟물을 다 벗긴 듯이 깨끗하고 말갛다. ‘연두 연두’했다. 앞으로 폭우가 쏟아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카메라 촬영을 하는 자세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싸우는여자들기록팀’의 작업 동료인 희정 님이 소성리로 연대하러 왔다. 하은 님과 혜미 님에 이어서 희정 님까지 노동기록 작업을 함께 하는 팀원들이 소성리의 소식을 듣고 마음을 써줘서 고맙고 위안이 되었다. 무엇보다 소성리에서 고립감을 느끼는 나는, 그들이 오는 날이 설렌다. 하룻밤을 묵으면서 밤새 말동무가 되어주고 교감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사람들은 소성리 마을회관으로 모였고, 6시도 되기 전에 규란 어머니는 주섬주섬 의자를 챙겨 들고 준비하자면서 도로로 나섰다. 나는 카메라에 비닐을 덮어서 부직포로 감쌌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데 조은학 님이 내게 품이 넉넉한 비옷을 입으라고 주셨다. 원래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편이지만 비옷이 마음에 들어서 조은학 님께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조은학 님은 아마도 내가 입고 싶다고 하면 줄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7월 소성리 침탈 현장에서 김천시민.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저 멀리서 연두색 형광색 비옷을 입은 경찰들이 줄지어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집회 참가자를 둘러싸고 시간이 되면 안으로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어낸다. 여자 경찰들이 누군가를 옮겨가면서 내 카메라에 부딪혔는데 갑자기 허리 통증이 밀려와서 나는 한 여자 경찰의 비옷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한 손에는 여자 경찰의 비옷을 움켜잡고, 순간 골반 위 허리가 찌릿하게 아팠다.

일어날 수 있을까. 못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119를 불러야 하나, 생각이 스쳐 가고 나자 통증이 가셨고 괜찮아졌다. 허리가 불편하지만 걷고 움직이기는 하는데, 충격이 조금만 가해지면 순간 통증이 심하게 느껴져서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불에 덴 거처럼 화들짝 놀란다고 해야 할까. 내 주변에 뭔가 물체가 있을 때 괜히 긴장된다.

경찰에 의해서 집회는 해산당했고, 사람들은 모두 마을회관으로 끌려나갔다. 나는 도로 위에 있었다. 기름을 싣고 있는 거로 의심되는 ‘음용수’ 차량 또는 ‘음료수’ 차량이 몇 대 들어가고 공사 인부를 태운 승합차들이 들어가고, 작은 굴삭기를 실은 트럭과 속을 알 수 없는 탑차 등이 들어가고 나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차량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서 진밭교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마을 위 옛날에 롯데골프장 기숙사 건물이었던 5층짜리 빌라는 지금은 국방부 숙소가 되어있었다. 건물 마당에는 형광색 비옷을 벗은 경찰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진밭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경찰들 뒤를 따라서 걸었다. 경찰 무리가 올라간 곳에 양쪽으로 커다란 경찰버스가 시동을 켜놓은 채 매연을 내뿜으면서 주차해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경찰버스 사이로 계속 걸었다. 경찰들이 이용하는 화장실 버스 여러 대가 주차하고 있었다. 화장실로 들락날락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삼삼오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담배를 피우는 경찰들, 양치하고 가글하다가 풀숲으로 ‘퉤’ 하면서 입을 헹군 물을 길가의 풀숲이나 개울가에 뱉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한두 명만 보이지만, 소성리로 들어온 1000여 명의 경찰이 진밭으로 가는 이 좁은 도로에서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군 물을 뱉어댄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토할 거 같았다. 소성리가 얼마나 오염될까 싶은 생각에 벌써 오물 썩는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평화 계곡으로 넘어가는 길과 진밭교를 건너 사드 기지로 올라가는 삼거리에 진밭평화교당 몽골 천막이 보인다. 교당 옆에 사무여한단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그 옆에 원평화깃발이 함께 날리고 있다. 진밭교를 넘지 못하게 경찰들이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있다. 진밭교를 넘어가면 부녀회장님네 감나무밭이 있고, 소야훈 님의 어머니 묘가 있는데, 소성리 주민들의 조상을 모신 묘지가 있는 달마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고 서있었다. 진밭의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른데, 땅은 눈물에 젖어 축축하기만 하다. 진밭평화교당에서 철야 기도를 한 지 1579일이 되는 날도 정산종사가 진리를 깨치러 걸었던 구도길을 여전히 걷지 못한다.

마을회관으로 내려왔을 때, 우리 사람들은 ‘십시일반밥묵차’가 준비해놓은 묵밥을 한 그릇씩 먹고 있었다. 십시일반밥묵차 유희 님과 김기 수님, 최성원 님 그리고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아주 오랫동안 농성을 하는 박미희 님, 평등학부모회 조이희 사무국장, 녹색당 성미선 님 그리고 이름을 다 알지 못하는 분들이 십시일반밥묵차를 따라서 소성리로 연대 오셨다. 7월 5일 월요일 밤에 도착해서 6일 화요일 아침부터 8일 목요일 점심 식사까지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소성리 부녀회장님과 할머니들이 오랜만에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 밥걱정 없이 차려주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십시일반밥묵차 활동가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지난 7월 5일 월요일 구미에서 열린 뉴스풀 글쓰기 강좌에서 기록노동자 희정에게서 밀양 할머니들의 구술생애사 작업을 했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곳에서 짧게는 40년에서 길게는 60년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어린 나이에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삶을 꾸려나간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싶다. 사실은 살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군분투했을까. 손톱이 닳도록 호미질을 했던 땅을 지키기 위해 그 험한 산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서 새벽마다 올랐을 밀양의 할머니들,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한전 깡패들한테 온갖 험한 일을 당했던 분들을 나는 삼평리에서 만났고, 싸웠고,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다. 밀양 할머니들의 이야기만 들으면 삼평리 할머니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일주일에 두 번 미군의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군경 합동작전을 펼칠 때 소성리 할머니들은 제일 앞자리에 앉아계셨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들을 도로 한가운데 앉게 해야 할까 싶지만, 할머니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신다. 할머니들에게 사드는 한반도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마을의 일이다. 그러니 남들을 앞장세울 수가 없다.

그래도 혹시나 경찰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는데, 다행히 정보관들은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이고, 뉘 집 아들이고, 뉘 집 사촌이라서 할머니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거 같았다. 할머니들을 들어내기보단 설득해서 스스로 걸어 나가게 모시는 거처럼 보였다. 부녀회장님도 들려 나가다가 할머니들에게 탈이 생기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시고, 할머니들을 최대한 설득해서 꼭 걸어 나가시게 했다. 연로한 할머니들을 경찰들에게 들려 나가게 할 수는 없다. 사실 나는 할머니들이 가장 늦게 나오시지만, 경찰이 안전을 보장해 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영상 촬영을 시작하면서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있었다. 여자 경찰들이 할머니들 주위로 몰려들면 할머니들은 “내 몸에 손대지 마. 나는 내가 알아서 나갈 거야”를 외친다. 여자 경찰도 할머니가 스스로 나가시라고 회유하지만, 좀처럼 할머니가 금방 일어날 거 같지 않으면 다시 손으로 할머니 팔을 잡고 끌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러다가 한 여자 경찰이 코맹맹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저희는 할머니 몸에 손댈 수가 없잖아요”라고 말하면서 할머니들 스스로 일어나셔서 나가시라고 재촉한다.

할머니들은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사드기지를 건설하러 올라가는 공사 인부들의 차와 기름을 싣고 있을지도 모를 탱크 트럭, 그리고 거대한 탑차가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금방 일어설 수가 없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할머니들 몸에 손댈 수 없다는 여자 경찰들은 금연 할머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할머니는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내가 알아서 나간다”고 역정을 내지만, 여자 경찰은 시간에 쫓기듯이 팔을 잡아당기려고 하다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가 다시 팔을 잡아당기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역정을 내고, 급기야 여자 경찰의 모자를 잡아당겼다. 화가 단단히 나신 거다. 그럴 때 대화 경찰은 입으로는 여자 경찰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적극적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제지를 하지 않으니까 여자 경찰도 행동을 멈추지 않고 할머니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들려고 했다. 할머니는 대로하셔서 여자 경찰의 모자에 붙은 아크릴 마스크를 붙잡고 놓지 않으셨다.

결국, 대화 경찰이 중간에서 말려서 할머니의 분노를 달랬고, 이번에 대화 경찰이 할머니의 팔을 잡아끌어서 일으켜 세운다. 마치 할머니를 부축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조그만 할머니는 커다란 여자 경찰들과 남자 경찰들을 상대하느라고 기운을 다 빼는 일이다. 남자 경찰들이 할머니의 팔을 잡아끄는 것도 엄청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거다.

7월 6일은 비가 왔고, 형광색 비옷을 입은 경찰들이 수없이 내려왔다. 마을길에 나와앉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할머니들만 남겨두고 뒤에 앉았던 집회 참가자들이 다 경찰들에게 끌려나가서 마을회관에 갇히자, 경찰들은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앞을 가로막았던 경찰 병력은 어디로 다 들어가 버리고, 트럭들이 사드기지로 향하면서 도로에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할머니들 한 분 한 분 마을회관으로 나가고 있을 때, 광순 할머니가 줄 서 있는 차들을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버티셨다. 왜 하필 “저것들이 내 눈앞에서 줄을 서 있느냐”면서 호통을 치셨다. “저게 안 보이면 나도 모른 척 들어가지만, 저게 내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데 내가 저걸 어떻게 들여보내느냐”고 언성을 높이셨다. 대화경찰은 잘못했다고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경찰이 정해진 작전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할머니라도 어떤 험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이미 집회 대오는 해산을 당한 상황에서 할머니 몇몇 분만 분통 터지는 현장에 주저앉아 사드기지로 들어가겠다고 트럭과 승합차들이 줄 서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건 또 얼마나 험한 꼴인가. 그걸 막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속상하고 원통한 일인가.

신랑이 사람 좋다는 이야기만 듣고 소성리로 시집와서 60여 년 땅을 일구고 자식 낳아 키우면서 터전을 닦아온 할머니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냥 안 보이게 해줬으면 좋겠다. 사드를 뽑았으면 좋겠고, 사드기지를 만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당장은 눈앞에 안 보였으면 좋겠다. 국방부도 경찰도 할머니들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 /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 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 주민이고,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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