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20차 오후 평화행동.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7월 8일은 미군 육로수송 20번째 군경합동작전이 있는 날이었다. 마을길에서 경찰들에게 끌려나와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주변 사람들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겠지만, 한 번씩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경찰청인권위원회가 소성리로 찾아왔다. 마을길로 들어설 때부터 성주경찰서장의 관용차로 의전을 받아 들어왔다. 경찰 방송하는 경비작전 계장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고 부드러워졌다. 간곡히 시위대가 스스로 갓길로 이동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우리는 웃음만 났다. 그리고 경찰들의 행동도 느려졌다. 예의를 갖춰서 집회참가자들에게 마을회관 쪽으로 이동하겠냐고 묻는 듯 보였지만, 끌어낼 때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경찰들의 완력으로 떼어내고 팔과 다리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다리를 먼저 들면 안 된다고 했지만, 경찰은 내 다리를 들었고, 경찰이 나를 어떻게 들었는지, 안경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내 안경, 안경 떨어졌잖아. 안경 주워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친절했던 경찰은 내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나를 들어서 마을구판장 앞으로 데리고 가서 땅바닥에 눕혀놓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마을회관 쪽에 갇히고 도로를 향해서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거의 다 끌려 나와서 할머니들과 몇몇 사람들만 남아있는 도로에 119구급차가 올라왔다. 누군가 쓰러졌다고 해서 의자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까 쓰러진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고, 웃옷의 체크무늬가 꼭 백광순 할머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은점 님이 페북 라이브 방송으로 확인을 해보니까 이미경 님이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알려줬다. 백광순 할머니가 아니라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이미경 님이 쓰러졌다고 하니까 또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폭발했나 보다. 폭발하니까 제어가 안 되어서 내가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었다. 그러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졌다.

새벽 일찍 경찰청인권위 사람들이 내려와서 지켜보고 있어도 경찰의 행동은 목소리 톤만 낮아졌을 뿐, 여전히 우리 사람들은 끌려 나오고 다치고 쓰러져서 실려 나간다. 우리가 마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경찰들의 쇼에 소품이 된 기분이었다. 감정 쓰레기가 쌓이고 쌓여서 눈으로 코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수요일은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오는 날이 아니지만, 할머니들은 진밭을 지킨다. 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지난주부터 할머니들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에 연대하러 갈 때 부를 ‘꾸꿍꾸꿍가’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부녀회장님이 ‘꾸꿍꾸꿍가’를 완벽하게 외워서 아사히 투쟁문화제에서 노래 부르면 밥을 사겠다고 약속도 했다. 나는 ‘꾸꿍’트리오 도경임, 여상돌, 도금연 할머니들이 입을 무대복을 준비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노래를 뮤직비디오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집을 나서자 폭우가 쏟아질 조짐이 보여서 부녀회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비가 많이 내리면 내가 진밭 보초를 설 테니까 할머니들과 부녀회장님은 하루 푹 쉬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 전화를 받은 부녀회장님은 내게 진밭을 선뜻 맡기지 않았고, 할머니들과 통화해서 의견을 물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차를 운전해서 소성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부녀회장님이 내게 전한 말은 “할머니들이 비온다고 집에서 놀면 뭐하노, 진밭이나 지키고 있지”라고 하셨다며 아랫마을 상돌 할머니와 경임 할머니를 모시고 소성리마을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경임 할머니 집 앞에 도착하니까, 맞은편에 있는 재영 아저씨네 참외작업장에서 경임 할머니와 상돌 할머니가 나오셨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집에 있는 것보다 진밭에 올라가서 보초 서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내 차에 올라탔다.

마을회관에는 도금연 할머니와 소성구판장 이옥남 사장님 그리고 부녀회장님이 기다리고 있었고, 모두 함께 진밭 초소로 올라갔다. 강형구 장로님과 조은학 님이 새벽 일찍 사드기지 앞에서 아침 평화행동을 하고 내려오셨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도 했지만, 물길이 막혔는지, 도랑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빗물은 죄다 도로 위로 흘러내려 가는 듯했다. 강형구 장로님은 할머니들께 내려가시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지만, 할머니들은 오히려 강 장로님께 걱정 말고 쉬다 오라고 당부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내가 준비한 꾸꿍무대복, 꽃무늬가 화사한 원피스형 앞치마를 할머니들께 입어보라고 드렸다. 금연 할머니와 상돌 할머니가 꾸꿍옷을 입자마자 절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면서 ‘닐리리야, 닐리리야, 얼쑤 좋다’ 흥얼거렸고, 우리는 모두 즐겁게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할머니들 세 분은 비가 오는 진밭 도로에서 꾸꿍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노래를 불렀다. 빗소리에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잠기긴 했지만, 장관이었다. 조은학 님이 영상을 찍어서 소성리평화마당에 올려주었다. 소성리 할머니들이 비 오는 진밭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할머니들이 ‘비 오는 날이라고 사드가 안 들어오더나’라고 하던, 사드가 들어오던 날, 밤새도록 비가 내렸던 기억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상돌 할머니에게 금요일 아침에 진밭에 보초설 때는 꼭 꾸꿍옷을 입고 오시라고 했다. 이제 할머니들에게 진밭을 지키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꾸꿍가 노래 연습하는 것이고, 나는 할머니들의 노래연습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변변찮은 실력이지만 할머니의 공연하는 모습을 꼭 영상으로 만들어서 보여드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소성리 마을구판장 이옥남 사장님은 공공근로노인일자리를 신청해놓아서 맑은 날은 출근을 해야 하고, 비가 오거나 일이 없는 날은 진밭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보초를 서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금요일은 이옥남 사장님이 출근해서, 부녀회장님과 꾸꿍트리오 할머니들과 진밭초소로 올랐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꾸꿍가’는 구전으로 불려오던 구슬픈 노래인데, 아사히 연대가로 개사해서 부르니까 부르다 보면 고쳐야 할 곳이 생기고, 부르다 보면 고칠 곳이 생겨서 할머니들이 몇 번의 연습 끝에 가사를 여러 번 바꾸고 고쳤다. 커다란 우드락에 큼직한 글씨를 써놓고 앞에서 세워 놓았는데, 개사 내용이 바뀐 부분을 고치지 않아서 부를 때마다 할머니들은 헷갈리고, 틀렸다. A4용지에 써서 한 장씩 나눠드렸더니 할머니들은 종이를 붙들고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번은 도경임 할머니가 한 줄 선창하고 상돌 할머니와 금연 할머니가 따라부르면서 연습을 했다. 경임 할머니는 노래를 다 외웠지만 정작 꾸꿍가를 알려준 금연 할머니가 개사한 가사를 외우지 못한 데다가 따라부를 때도 목소리가 따로 놀아서 계속 엇박자였다. 여러 번 연습하다가 지겨워졌는지, 여상돌 할머니는 예전에 삼동연수원 교무님이 불렀던 아리랑이 듣고 싶다고하셨다. “그 교무님 아리랑 정말 잘 불렀는데” 추억하셨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아리랑’을 검색해서 상돌 할머니께 들려드렸다. ‘진도아리랑’도 ‘정선아리랑’도 아니라고 했다. ‘홀로아리랑’을 듣더니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면서 이 노래가 맞다고 좋아하셨다.

“이 노래는 우리 할마이 셋이서 부르면 되겠다!”

꾸꿍트리오가 부를 노래를 선정했다. 때마침 박형선 교무님이 오셨고, 할머니들은 민들레합창단의 노래지도를 맡은 박형선 교무님께 다시 자문했다.

“우리가 이 노래 부르면 어떻겠는교?”

나는 음원도 구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박형선 교무님이 ‘음원은 무용지물’이고, 할머니들의 음정에 맞춰서 불러야 한다면서 시범을 보였다. 다음부터 보초 설 때는 박형선 교무님에게 노래지도를 해달라고 할머니들이 요청했다. 그리고 노래 연습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그 옆에서 부녀회장님은 꾸꿍가를 아사히연대가로 완성하면 사드 투쟁가로 개사해서 다시 불러야겠다며 또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는 소성리를 글로 써야겠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앞으로 할머니들의 꾸꿍가는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할머니들이 새벽 일찍 일어나서 마을길로 나오는 모습을 촬영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백광순 할머니께 새벽 일찍 찾아가도 괜찮겠냐고 허락을 얻어서 하루는 새벽 5시에 백광순 할머니 댁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마을회관 앞에 어떤 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모이나 안 모이나 훤하게 다 보였다. 백광순 할머니는 나올 채비를 하고 늘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던가 보다.

내게 ‘꼬모’를 하나 권한다. 딸이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에 올 때면 ‘우리 엄마는 꼬모를 제일 좋아한다’라면서 사 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년 동안, 집에 올 때면 ‘꼬모’를 사 들고 온다고 한다. 당신이 못 오면 언니나 동생에게 부탁해서 엄마에게 ‘꼬모’를 사다주는 딸의 효심에 눈물이 났다. 나는 어머니께 매년 참외를 보냈다. 내 아버지가 다른 과일은 몰라도 참외는 하루에 한 개씩 꼭꼭 깎아 드신다고 해서 한 박스 보내놓으면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드셨다.

다음에는 도경임 할머니께 허락을 받고 4시 50분경에 할머니 댁을 찾아갔었다. 소성리에서 1킬로미터 정도 아래쪽 동네라서 할머니들 걸음으로 30분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경찰차가 새벽 5시 30분에 들어올 때라서 걸어가다가 경찰버스를 만나는 게 싫어서 남들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선다. 다행히 경임 할머니 바로 이웃에 상돌 할머니가 살고 있어서 두 분이 자매처럼 늘 같이 다닌다.

7월 15일은 여상돌 할머니께 새벽 일찍 댁으로 찾아가겠다고 말씀을 드려놓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는 상돌 할머니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서 몸살이 나서 오늘은 도저히 갈 수가 없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시라고 말씀드리고 경임 할머니 댁으로 건너왔다. 경임 할머니는 벌써 나와서 마당에 앉아 계셨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새벽 일찍이지만, 커피 한 잔 끓여준다길래 잠시 할머니의 집 안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 얻어 마셨다. 상돌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전하니까 경임 할머니는 ‘원래 약골이라서 잘 아프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아프다고 하면서 생전 병원 한번 가는 일이 없다는 걱정 반, 질타 반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까 2017년 사드가 배치될 때부터 사드기지 건설공사를 한다고 경찰병력이 수시로 들어와서 싸울 때 몸살이 난 할머니들 모시고 한의원을 다닐 때도 상돌 할머니는 늘 괜찮다면서 한의원을 가지 않았다. 할머니 중에서 몸이 가장 약한 분인데도 말이다.

도경임 할머니와 새벽 5시 20분이 지나서 소성리로 올라갔다. 휑한 마을회관 앞으로 경찰버스가 올라오기 시작해서 차에서 내려서도 길을 건너지 못했다. 경찰버스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고, 우리 사드 반대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로를 바라보면서 회관으로 모여든 할머니들과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국방부 숙소 쪽에서 경찰 한 무리가 내려오더니, 우리 앞에 주황색 폴리스라인을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내려왔고, 우리는 스프링 튕기듯이 벌떡 일어나서 도로로 나갔는데, 팔순이 넘은 도경임 할머니가 의자를 엉덩이에 댄 채로 도로로 나와서 앉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재빠른지, 팔순 넘은 할머니의 순발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성주경찰서 경비과장이란 자가 마이크를 쥐고 마을 안에서 하는 합법적인 집회는 보장해줄 테니까 도로에서 마을회관 쪽으로 이동하라고 떠들어댔고, 도경임 할머니는 의자에서 내려와 도로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경비과장이란 젊은 경찰이 마을길에 서 있는 할머니들에게 불법을 운운하는 게 조금 가소로웠는지, 그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문영희 어머니는 깔 자리를 가지고 나와서 주섬주섬 나눠주더니 도로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나서부터 우리는 경찰에게 도로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불법 사람’으로 취급당하며 체포될 수 있다는 협박을 계속 들어야 했다. 미국의 요구로 사드기지 육상통행로 확보를 위해 동원된 22번째 경찰침탈이 있던 날이다.

 

 

글 /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 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 주민이고,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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