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를 쓰다9] 연대로 모인 사람들
[소성리를 쓰다9] 연대로 모인 사람들
  • 기록노동자 시야
  • 승인 2021.08.3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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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과 7월의 소성리는 마늘과 양파, 감자를 수확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농사철이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경찰병력이 들어오는 바람에 마을길을 지키느라 일할 시간을 빼앗겼다. 틈틈이 밭에 나가서 수확하고 빈 땅은 또 깨 모종을 옮겨심느라고 이 집, 저 집 품앗이가 한창이었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들의 일손이 웬만한 장정보다 더 필요한 철이었다.

도금연 할머니가 몸살이 났나 보다. 온몸이 아프다며 생전 빼먹은 적이 없는 소성리 야간시위를 나오지 않으셨다. 소성리 부녀회장님도 몸이 아프면 나올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푹 쉬시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어지간하면 안 나올 분이 아닌데, 정말로 나오지 않아서 부녀회장님도 덜컥 걱정되더란다.

사실 부녀회장님도 며칠 전에 백신을 접종했는데 쉬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팔이 아파서 다음날은 쉬어야 할 판인데도 상돌 할머니와 금연 할머니가 편찮으시니까 경임 할머니만 진밭에서 보초 서면 혼자서 심심해서 안 된다면서 부녀회장님은 쉬는 걸 포기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모두 다 집에서 몸조리 잘하시고 푹 쉬시라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내가 진밭을 지키겠다고 해보지만, 부녀회장님의 생각은 달랐다. 경임 할머니가 못 오시면 몰라도 일부러 오셔서 약속한 지킴이 활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우리가 꺾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모두가 애쓰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연로한 할머니들이 편찮으실까 봐 전전긍긍 애만 태웠던 밤은 걱정만 쌓이는 채로 지나갔다.

다음날 금요일 아침 일찍 경임 할머니 댁으로 차를 몰고 갔다. 할머니는 벌써 집을 나설 채비를 마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돌 할머니가 어떤가? 집으로 찾아가 보았더니 약봉지를 들고 나와서 반겨주셨다. 금연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람도 없는데 나라도 가서 자리를 지켜줘야지 하면서 집을 나설 채비를 하고 계셨다. 아직 완전히 회복이 안 된 거 같아서 말려보지만, 경임 할머니와 약속을 했다면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경임 할머니와 상돌 할머니를 모시고 마을회관 앞으로 올라갔더니 도로 갓길에 부녀회장님과 도금연 할머니 그리고 백광순 할머니가 걸터앉아 있다. 백광순 할머니는 텃밭에 김매다가 나와서 온 얼굴에 땀범벅이었고, 부녀회장님과 금연 할머니는 진밭에 보초 서러 갈 준비를 하고 나오셨다.

 

소성리 도금연 할머니.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부녀회장님은 금연 할머니가 안 오실 거로 생각하고 나왔다고 했다. 금연 할머니는 하루 푹 쉬고 자고 일어나니까 아픈 데가 멀쩡하다면서, 아침 일찍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앞마당도 비질했다고 한다. 상돌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니까 금연 할머니도 진밭을 지킬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게 걱정이었겠지. 아파도 아플 수 없는 부녀회장님과 금연 할머니, 상돌 할머니 그리고 경임 할머니와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마다 진밭을 지키러 올라갔다.

진밭 초소에 올라갔더니 박석민 님이 오셨고, 김상패 감독과 단아 님이 올라왔다. 대구에서 원불교 손법선 교도가 마음먹고 하루 진밭을 지키러 들어오셨다. 할머니들과 평화지킴이들이 북적대면서 진밭을 지켰다.

진밭에 보초 서는 건 사드 기지로 올라가는 미군 통행 차량과 군사 차량이 소성리 마을길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한 활동이다. 확실히 보초를 서고 있으면 미군 차량은 함부로 올라오지 못한다.

코로나19 감염병 유행이 본격화되면서, 소성리에서 늘 있었던 수요 집회가 멈췄고, 토요일 밤마다 즐겼던 촛불문화제도 중단되었다. 마을회관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연대자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나도 자연스럽게 소성리로 올라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내 딸이 아팠다. 그러고 나서 연대투쟁도 예전만큼 활발하게 다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들은 또 한 살 나이를 잡수셨고, 한 해 한 해 기력이 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느 날 문득 할머니들을 모시고 밖으로 다니는 게 불안해졌다. 코로나19 감염병도 걱정이었지만, 연로한 할머니들이 먼 거리를 다녀와서 오는 피로감이 예전과 다를 걸 생각하니까, 이젠 어디 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사히 수요 투쟁문화제를 갈 때도, 부산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문화제 때도 할머니들에게 가보자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드철회성주대책위 이종희 위원장님이 아사히비정규직 투쟁 6주년 결의대회에서 연대 발언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부녀회장님은 같이 가봐야겠다며 할머니들한테 무리하지 말고 갈 수 있는 분만 가자고 했다. 상돌 할머니는 아직 몸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집에서 쉴란다고 했다. 경임 할머니는 “가야지” 한마디로 의사를 밝혔고, 금연 할머니도 “당연히 가야지” 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 난롯가에서 모인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눠서 구판장 이옥남 사장님이 가겠다고 한 거 같고, 짱돌과 소야훈 님 그리고 원불교의 교무님들이 가기로 했다.

우리 평화절박단도 잠시 연극 연습이 중단된 상태라서 오랜만에 구미공단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아사히글라스 공장이 있는 구미공단으로 갔더니 소성리의 주민과 함께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면서 평화를 지켜온 소성리 평화지킴이들이 사드 반대 라인을 만들었다. 이종희 위원장님의 연설은 결의대회가 시작되고 두 번째 순서였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장소에서 위원장님이 발언하는 모습을 남겨두고 싶은데, 촬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택해야 할 때가 아니라 미리 준비했어야 할 시점에 갈팡질팡하다가 뒤늦게 차에 쫓아가서 카메라를 챙겨 나왔다. 카메라를 들고 집회 장소로 오고 있을 때 위원장님은 말씀을 시작하셨고, 나는 제일 뒷자리에서 저 멀리 단상 위에 선 위원장님의 모습을 담았다.

단상에서 내려온 이종희 위원장님 곁으로 갔다. 위원장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내려오자마자 담배를 피웠다. 나는 위원장님께 떨리지 않냐고 물었고, 위원장님은 5000명도 안 되는데 뭐가 떨리냐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우리 위원장님이 박근혜 퇴진 운동할 때 몇만 명이 모인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연설하셨던 분이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사드철회성주대책위 이종희 위원장님.
사드철회성주대책위 이종희 위원장님. 사진=소성리종합상황실

이종희 위원장님은 사드 반대 투쟁을 시작하면서 성주 촛불이 분열될 때 기꺼이 소성리로 올라와서 앞장선 분이다. 원래 농부가 아니었다. 대구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CEO인데 정년퇴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소싯적에 양심적인 회사 경영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다 사드 반대 투쟁하면서 소성리로 찾아온 수많은 노동자를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자신이 상식이라 믿었던 것이 통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사드 반대 투쟁을 하면서 경험하였다. 아마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투쟁 6주년 결의대회에서 그 많은 부당하고 억울한 사연들을 눈으로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할머니들에게 카메라의 눈을 옮겨갔다. 금연 할머니는 ‘노동자들이 불쌍하다. 매일 길거리에서 싸워야 하니까. 그렇지만 여기는 우리처럼 경찰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하신다. 집회 장소에 경찰은 교통경찰뿐이었다. 경찰들이 없는 건 아닐 테고 아마 공장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금연 할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옆에 태령 님과 짱돌 님이 대화하는 모습 뒤로 바라본 공단의 하늘이 너무 맑고 푸르러서 한편의 그림 같았다. 아사히글라스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굴뚝 위의 하늘이 영롱하다. 연기가 없으면 이렇게 맑은 하늘을 공단에서도 만날 수 있구나.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애정을 듬뿍 담아 모인 만큼 반응도 뜨겁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만나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그 사이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염치도 없이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살금살금 다니다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의 표정을 담았다.

소성리 부녀회장님과 할머니들은 부러워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것도, 젊고 건장한 사람들이 모이면 소성리 마을길을 미군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 단 몇 분이라도 버텨볼 수 있을 텐데 하는 부러움도 있겠지만, 그보다 연대로 모인 사람들 그 자체가 부러운 듯 보였다.

궁금했다. 소성리 할머니에게 연대란 어떤 의미였을까. 할머니는 한마디로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그 단어 말고는 더 많은 어휘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그 한마디가 할머니의 마음을 전부 다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성리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 더 언어화해보고 싶다. 무엇이 할머니들에게 ‘측은지심’으로 눈물짓게 하는 걸까.



 

글 /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 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 주민이고,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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