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오해로 출발한 20년간 불장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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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포스터 이미지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포스터 이미지

1_ 때맞춰 등장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년사 다이제스트

 

연일 언론과 방송에서는 8월 31일 미군 완전 철군 전후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현재 벌어지는 난장판을 소개한다. ‘탈레반’이라는 중세 회귀를 꿈꾸는 것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이 재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많은 이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도 잘 모른다.

대체 왜 20년간 미국은 그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지, 탈레반은 무슨 저력으로 세계 최강 미군에 대적할 수 있었는지, 천문학적 군비와 각종 지원을 받고도 아프간 정부는 어떻게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이 또한 극히 드물다. 대체 20년간 끌어온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흘러온 걸까? 이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우리는 20년 전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야만 한다.

2001년 9월 11일, 우리에게 진정한 21세기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년째 세계는 ‘보이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적과 맞서고 있지만, 테러는 잦아들기는커녕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더욱 파괴적 영향을 떨치는 중이다. 이제 전 지구적 화두가 된 난민 문제와 1세계와 3세계 모두를 휩쓰는 극단주의 경향의 득세, 3세계의 내전 심화와 1세계의 인도주의적 개입 위축 같은 부정적 요소들의 기원에는 20년 전 그 사건이 중심에 있다.

넷플릭스에서 9월 초 공개한 5부작 최신 다큐멘터리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은 5시간여에 걸쳐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9/11 테러와 그 배경, 그리고 이후 20년간의 전쟁 경과를 요약 해설한다. 최근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 전후 사정 브리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아마 당분간 이만큼 충실한 가이드는 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겠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에는 거의 처음 공개되는 9/11 테러 당시의 충격적인 영상들, 사건 발생 직후 현장의 비극적 분위기, 초강대국의 위신에 상처 입고 출구 없는 분노를 폭발시키던 미국의 상황이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 이후 20년간 벌어진 일들에 대한 광범위한 증언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미국 내 고위 관계자는 물론 다양한 참전 군인과 각계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서 생생하게 겪었던 경험담과 최초로 소개되는 놀라운 사실들을 전한다. 정보제공자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내 친미 정부 최고위층과 현장의 정부군은 물론, 심지어 탈레반 지도부까지 화면에 등장해 각자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얻는다.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공룡이 활용할 수 있는 방대한 네트워크가 총동원된다. 최신작의 프리미엄이기도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전까지의 상황이 빼곡하게 담겨 있어서 그 현장감은 예상을 초월한다. 다큐멘터리에 담긴 데이터 용량과 시의성 가치가 놀라울 따름이다.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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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 9/11 전‧중‧후로 잘 구분된 5개의 에피소드

 

5개의 개별 에피소드는 각 1시간 전후의 분량을 차지한다. 단발성이 아니라 시즌제를 택한 강점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시청자는 9/11 테러 발생 현장의 충격적 사건을 마치 오늘 있었던 일처럼 간접 체험하는 기회를 얻게 됨은 물론, 그 비극적 사건을 불러온 20년간의 불씨 형성 과정과 사건 후 20년간의 헛된 복수극의 허무함을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_1. 9/11로 가는 길

1부 <시스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9/11 테러 당시의 충격 영상으로 시작한다. 이제는 그저 민간 여객기가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미국 국방성 펜타곤을 직격한 사건으로만 기억에 남지만 참사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 비극적 사태를 지나면 화면은 곧이어 이 사건을 감행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 카에다의 탄생 과정을 설명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동서 냉전이 극을 달리던 1979년이었다. 당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소련의 베트남’을 만들어 주겠다고 결의한다. 소련을 적대하는 모든 세력이 미국의 깃발 아래 결집한다. 사회주의권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던 중국은 소련제 무기의 카피 버전을 무한정으로 찍어내 제공했다. 형제 무슬림인 중동 산유국은 오일 머니를 아낌없이 백지수표로 내놓는다. 미국과 유럽 열강의 정보부와 특수부대가 최신 무기와 군사훈련, 정보제공에 헌신적으로 결합한다. 이 연합세력은 현지의 이슬람 저항군 ‘무자헤딘’을 전면 지원한다. 10년간의 전쟁으로 아프간 인구의 1/3이 전쟁 피해를 겪었고 온 나라가 황폐해진다. 미국의 소망대로 전쟁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소련은 끝내 무너지고 만다. 냉전의 종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과 서방세계는 이제 아프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다. 여전히 공산주의 세력과 무자헤딘 세력 간 내전은 이어졌지만, 소련도 미국도 관심을 끊고 철수해 아프가니스탄은 버려진 땅이 된다. 미국과 서방의 관심은 1991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벌인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 걸프 전쟁으로 향한다. 무자헤딘 중 이슬람 성전 ‘지하드’를 부르짖던 분파는 아랍 세계에 간섭하는 미국을 적으로 규정한다. 바로 알 카에다의 탄생이다. 미국이 소련을 골탕 먹이기 위해 군자금을 지원하고 훈련시킨 무자헤딘의 일부는 이제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 9/11 테러 이전 20여 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짧은 역사와 테러리즘 창궐이 한 번에 요약되는 전개다.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스틸 이미지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스틸 이미지

2_2. 당시 현장으로 인도하는 기록물

2부 <위험한 장소>와 3부 <어두운 쪽>에선 테러 당시 사건 전개와 희생, 그리고 들끓는 미국 내 복수 여론을 소개한다. 3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그 몇 배가 넘는 부상자, 인명구조를 위해 분투하다 순직한 소방관과 경찰관만 해도 엄청난 숫자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소련의 소멸 후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란 자부심이 팽배했던 미국인들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미국인들의 의문은 출구 없는 분노로 연결된다. 소수의 양식 있는 이들은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고 다양한 세력 간 포용과 화해를 추진한다. 온건 무슬림 지도자들은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 ‘그라운드 제로’ 인근에 화해 협력 센터 건설을 제안한다. 하지만 무슬림 혐오로 치닫던 미국 내 정서를 악용하는 정치인과 극우세력의 선동으로 이 시도는 무산된다. 미국은 스스로 무슬림 세계 전체를 적으로 규정해버린다. 출발부터 뭔가 잘못되어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니 음모이론과 선동이 먹혀들기 최상의 조건이다. 미국인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누가 애국자인지 누가 불만 세력인지 매카시즘의 망령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기본 원리를 침해하는 각종 초법적 조치와 규정이 ‘안보’를 빌미로 무리하게 추진된다. 국토안보부가 신설되고 미국 내 경찰은 중무장 군대로 변신한다. 대체 왜 경찰이 장갑차와 중화기를 장비해야 테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인지 개연성은 무시된다. 방대한 군사비가 군산복합체를 배불리는 데 낭비된다. 사회 시스템이 열악해지자 빈곤과 불만이 팽배한다. 알 카에다 같은 조직적 테러리스트는 찾기 힘든데 ‘외톨이 늑대’는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2부와 3부는 9/11이 미국 사회에 끼친 공포와 그에 편승한 특정 세력의 조직적 공세가 어떻게 세계 초강대국이자 근대 민주주의의 본산이던 국가를 허약하게 만들었는지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다. 선동과 위협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불안을 조장하며, 사람들을 서로 불신하게 만든다. 안전한 나라를 외치는 구호는 오히려 더 위험한 사회로 추락을 앞당겼을 뿐이다.

 

2_3.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흐지부지한 20년 전쟁

이제 선동의 결과가 드러난다. 전쟁이다. 끝나지 않는 전쟁의 시간.

4부 <좋은 전쟁>에서 최강 미군은 9/11 테러 발생 후 불과 3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국의 첨단 군사력에 탈레반은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 일방적 승리에 도취해버린다. 전후 안정화 사업은 무시된다. 당시 미국 정부의 실세이던 극우 강경파 ‘네오콘’은 이참에 눈엣가시 같던 사담 후세인을 무너뜨리고 중동 석유 패권을 장악하고자 이라크 전쟁을 벌이는 폭주가 진행된다.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스틸 이미지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스틸 이미지

그렇게 미국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상황을 안정시키거나 하다못해 연착륙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몇 차례의 분기점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기회는 활용되지 못했다. 정치가들은 대중의 분노를 악용해 미국을 극단화시켰을 뿐 테러리즘을 근절하지도,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지도,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하지도 못했다.

정치가들의 전략 부재와 권언/군산복합체 유착, 용도 불명의 그릇된 지원책은 아프간의 정상화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산악지대에 은신했던 탈레반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후 천문학적 전비는 미국 경제와 사회를 망가뜨렸다. 이제 전쟁 승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저 수렁에서 빠져나올 궁리가 지상과제가 된다. 전쟁을 시작한 부시에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에 이르기까지 4명의 대통령 모두 그저 필사의 탈출만을 꾀했을 뿐이다.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 대부분은 미국 정부의 ‘전략의 부재’를 꼬집는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전장의 군인과 현지 민간인 피해로 누적된다. 미군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무인 드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최첨단 효율과 안전성을 자랑한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오폭이 증가한다. 영문도 모른 채 한 가족이 단잠을 자다가, 혹은 약혼 잔치를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 황당한 상황이 속출한다. 무고한 희생자들은 복수귀를 낳는다. 이렇게 싸우면 싸울수록 적은 더욱 늘어만 간다.

5부 <제국의 무덤>에서는 출구 전략이랍시고, 자신들이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관타나모에 강제 구금하던 탈레반 지도자들과 평화회담을 벌이는 미국의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0년간 미국의 후견에 기대어 어렵게 싹튼 아프간 변화의 싹은 다시 무너져버린다. 그런 배반의 과정이 반성적으로 소개된다. 그런 책임회피의 결말은 모두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다.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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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 미국의 자기반성으로 끝날 문제인가?

 

본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철저하게 미국의 국내 시선에 맞춰 만들어졌다.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 퇴각한 미국이 마치 오랜 숙취에서 깨어난 듯 지난 시간을 성찰하는 자아비판과 그간의 세부 사정을 알 드문 기회다. 하지만 미국이 버린 그 땅에 남은 이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1화에서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준동을 해설하는 역사 설명 부분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다. 미국의 표적이 된 알 카에다는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작은 선물을 제공한다. 소련에 맞서 가장 헌신적으로 싸웠던 중도 합리주의 저항세력 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암살이었다. 마수드는 무자헤딘 최고의 명장이자 서방세계와 소련 모두 대화가 통하던 합리적인 지도자였다. 탈레반에 맞서던 북부 동맹 연합세력의 구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부터 그가 영어를 못 한다는 간단한 이유로 마수드와 제휴하기보단 영어가 통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 같은 극단주의 세력을 지원해 왔다.

마수드가 알 카에다의 자살폭탄 테러로 비명횡사 후 이틀이 지나 9/11 테러가 터졌다. 마수드가 건재했다면 9/11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 하지만 거대한 아이러니는 종종 발견할 수 있다. 20년간의 헛된 시도 후 부활한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 전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판지시르 반군의 지도자는 그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다. 아버지의 전우부터 지난 20년간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아프간 사람들이 그와 함께 중세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총을 들었다.

하지만 미국은 탈레반과의 공식/비공식 협약으로 그 지위를 인정한 만큼 온건 합리주의 반군을 지원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탈레반의 빠른 승리를 바라는 속내를 드러낼 정도다. 미국의 묵인이 없다면 (탈레반을 육성하고 훈련시킨) 파키스탄의 탈레반을 위한 군사개입은 일어날 수 없다. 사실상 자신들이 분탕질하고 사고를 친 뒤 그 수습 대신에 탈레반에게 아프가니스탄을 넘겨준 꼴인 미국과 동맹세력들은 얼른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최소한의 명분만 세워주면 아프간에 남은 이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태세다.

결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구호는 자신들이 이용해 먹을 용도로만 꺼낼 뿐 미국은 늘 타국의 운명을 자신들의 국내 정치 장기 말처럼 다뤄왔다. 그런 원죄는 여전히 21세기 미국을 감싸고 있다. 그런 감춰진 비밀을 빤히 아는 러시아나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행태를 비아냥거리며 자신들의 치부를 정당화한다. 전 세계에 통용되어야 할 인권과 자유의 가치는 그렇게 땅바닥에 떨어진 채다. 21세기 유일 초강대국의 민낯이 아프가니스탄의 지난 20년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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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정보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Turning Point: 9/11 and the War on Terror

2021, 미국, 다큐멘터리, 5부작, 제작 및 배급 넷플릭스 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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