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이유, 두려움.

 

군위 우리집에서 경주 ‘나정’까지 고속도로를 타면 한 시간, 국도로 가면 한 시간 사십오 분. 망설임 없이 국도를 탄다. 아이들에게 ‘셋이 합쳐 [한]이라는 글자를 40개 찾으면 편의점에 간다.’는 미션을 주고 출발!

군위의 동쪽으로 달려 부계와 산성면을 지나 영천시 신령면에 닿는 동안 40개가 금방 채워진다. ‘한우 전문’이 왜 이렇게 많은가! 다음에는 더 어려운 음절을 제시해야겠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편의점 고고!’를 외치는데, 드문드문 있던 식당도 없이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가도 가도 영천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한 영천시외버스터미널 옆 편의점에서 아이들이 쇼핑하는 동안, 시원한 박카스를 한 병 먼저 마신다.

‘고속도로를 달렸다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 차가 좀 컸으면 고속도로에 올렸을 텐데…. 언제쯤 고속도로를 달려보게 될까?’

아이들이 과자 먹고 젤리 먹는 동안 조용한 바람에, 자책의 뺑뺑이가 머릿속 한쪽에서 계속 돌아갔다. 출발한 지 한 시간 오십 분 만에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에 도착했다.

 

우물이라는 신비

 

ⓒ내리리 영주

“여기가 바로 하얀 말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거기야!”라고 분위기를 몰아보았으나

매미는 너무 울고, 땡볕은 너무 따갑고, 볼 것은 안내판뿐이었다.

 

살짝 봉긋하게 솟은 언덕이라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있었다. 이 지형이 신라가 아직 신라가 아니었을 때도 이 모습이라면, 저기는 양산촌, 저기는 고허촌, 저기는 대수촌, 진지촌, 가리촌, 고야촌, 여섯 마을이 다 보였겠다. 삼국유사에서는 각 마을에서 보니 이곳에 신비로운 빛이 머물렀다고 했다. 빛으로 촌장들을 모이게 하고, 신성한 하얀 말이 절을 하고 하늘로 날아가 그 자리를 살펴보니 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다. ‘나정’의 ‘정(井)’은 공동수도 ‘우물’이 아니다. 신라라는 나라의 시작점이다. 연맹의 시대에서 왕의 시대로 가는 관문이며, 인간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가 교차하는 정류장이다. 상반되는 시대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우물(井)로 이어져 있다.

“얘들아, 엄마가 내일까지 나정이랑 관련된 퀴즈를 낼 거야. 맞춘 사람은 알지?”

“편의점!”

셋이 입을 모아 크게 외친다.

동네에 마트고 편의점이고 아무것도 없는 게 이럴 때 좋구나. 고마운 편의점!

 

온 누리를 밝은 세상으로.

 

숙소에서 잠깐 쉬고 예약해둔 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어린이 박물관은 신라의 상징물을 활용하여 아이들이 놀이처럼 체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 ‘미래의 경주에게’라는 체험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준비된 도안을 색칠하여 직원에게 전하면, 직원이 스캔을 준다. 그러면 대형 스크린에 아이들 그림이 등장한다. 그냥 나타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크게 나타났다 작아지고 움직이기도 한다. 배경에 옛 신라의 유적 유물들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아이들의 작품이 더해져 완성되니, 아이들 입에서 ‘이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것에 나를 더해 새롭게 만든다.’는 메시지가 기술과 디자인을 만나 찰떡같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내리리 영주
ⓒ내리리 영주

“자, 첫 번째 퀴즈야! 엄마가 박혁거세라는 이름을 ‘온 누리를 밝은 세상으로 만들 지도자’로 보는 의견이 있다고 했지. 옛날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하려면 내가 밝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이걸 재료로 만든 유물이 많아. 지금부터 전시를 둘러보면서 그 재료가 뭔지 생각해 봐!”

신라역사관에 들어서기 전에 아이들에게 임무를 주었다. 작은 재미라도 있길 바라며 던지는 질문이다. 아이들이 황금으로 만든 온갖 장신구를 보며, ‘옛사람들이 황금처럼 빛나고 밝은 존재가 되고 싶었을까?’ 하고 상상해 보길 바랐다. 그런 상상이 실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정말로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이다.

2021년 대한민국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데, 그때 그 황금장식 띠를 두르고 왕관을 쓰던 그이들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었을까? 김희동 선생님(통전교육연구소)의 온통공부를 따라가다 보니 이 땅에 살았던 옛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자꾸 상상하게 된다. 선생님께 듣기로, 박혁거세의 본뜻이 ‘온 누리를 밝은 세상으로 만들 지도자’라고 풀어내는 의견이 있다고 한다. 지명이나 나라 이름에 ‘빛/밝음’을 추구한 흔적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예를 들면 빗살무늬토기가 그냥 빗금이 아니라, 엎어놓고 보면 ‘빛살(햇빛이 방사되는 무늬)’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험에는 안 나오고, 논쟁도 많은 영역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쪽은 ‘빛살’인데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런 내용은 헷갈릴 수 있으니 전하지 않길 권한다 하셨다.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다. 아이들이 황금 왕관, 황금 허리띠, 황금 신발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전시된 빗살무늬토기를 바라보며 혼자 가만히 토기에 ‘빛살’을 새겨 넣는 옛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나정과의 연결고리

 

ⓒ내리리 영주

“두 번째 퀴즈는 나정과 첨성대의 공통점 찾기야!”

 

첨성대를 찾은 때는 마침 노을이 지는 때였다. 아이들은 답을 찾으려고 첨성대를 뱅글뱅글 돌고, 나는 잠시 ‘노을멍’을 즐겼다.

“저기 꼭대기에 井(정)이 있어!”라고 둘째가 답을 맞히자 아이들은 더 궁금한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어서 시원한 데로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주역(周易) ‘정(井)’괘에 따르면, 우물은 나무 안에 수액이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나무가 수액을 끌어올려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우물물을 끌어올려 그것으로 목마름을 풀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 주역, 우리 삶을 말하다, 김기현, 민음사, 357쪽

 

나정에서 끌어 올려진 생명력은 여섯 마을을 하나로 모았고, 첨성대에서 끌어올려진 생명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국사 석굴암 같은 아름다운 문화재를 남겨 오늘에까지 전한다.

 

“마지막 퀴즈다! 천마총과 나정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대릉원에는 잘 정비된 큰 무덤들 사이로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정비되기 전엔 썰매를 탔다는 이야기를 전하니, 아이들이 정말 재미있었겠다며 부러워한다.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어도 아이들은 무덤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인지, 나에게 조롱조롱 달라붙는다. 네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전시물을 구경했다. 두 바퀴를 돌고도 아이들이 답을 찾지 못했다.

‘이름이 천마총’이라는 힌트를 주니, 첫째가 그제야, “아! 나정에 그 하늘로 올라간 하얀 말!” 한다. “옛날 신라 사람들에겐 하얀 말이 수호신 같은 거였나 봐.” 하니, 아이들은 “그럼 우리나라에 하얀 말이 있었겠네?” 한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그런가 보지” 하니, 막내가 “그럼 얼룩말도?” 한다. “유니콘, 페가수스… 다 있었겠지. 없는 걸 어떻게 그렸겠어.” 하니, “그럼 레인보우대쉬도? 트와일라잇도? (애니 ‘마이리틀포니 캐릭터’)”하며 장난을 걸어온다.

 

이제 다시 편의점을 갈 시간이다.

 

ⓒ내리리 영주

돌아보는 이유, 진보(進步)

 

돌아오는 길은 경주나들목에서 동군위나들목까지 한 시간도 안 걸렸다. 월요일 오전이라 차가 거의 없기도 했고, 과연 고속도로는 고속도로였다. 화물차들 사이에 꼈을 때는 쫄려서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 입 밖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 편의점 쇼핑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기쁘게 꿈나라로 건너간 아이들이 나의 긴장을 몰라서 정말 다행이다. 경차라도, 내가 ‘쫄보’라도, 고속도로 운전이 가능했다.

나는 가능하다.

옛사람들의 흔적을 더듬는 일이 나에게 재미 이상의 기운을 준다.

아이들도 또 가자고 하는 걸 보니, 그 무더위에 돌아다니는 것도 견딜만했나 보다.

아이들도 가능하다.

 

코로나만 좀 잠잠해지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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