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지친 국민에게 감동과 위로, 희망을 주었다는 올림픽이 끝났다. 사람들의 의식을 저당잡았던 올림픽의 광풍은 여느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른 이벤트들에 자리를 내주며 잠잠해졌지만, 그 찌꺼기는 여전히 미디어를 떠도는 듯하다. 전염병 가운데 열리는 올림픽에 대한 개최 전의 수많은 우려와 비판이 무색하게도 막상 올림픽이 시작되자 점수와 승패, 메달에 대한 중계가 모든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올림픽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은 이미 오래전에 퍼진 전염병인지도 모른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은 1964년의 도쿄올림픽을 배경으로 한다. 북녘의 가난한 시골 마을 출신으로 도쿄대에서 마르크스를 공부하던 시마자키 구니오는 올림픽을 인질로 삼아 국가에 몸값을 요구한다. ‘권력자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양(羊)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열댓 살이 되면 어딘가로 팔려가야 하는 동향 사람들처럼 올림픽 인프라 건설현장의 막노동꾼으로 도쿄 근대화의 제물이 되어 서른아홉에 생을 마감한 형의 죽음이 직접적 계기였다. 주부봉사단부터 야쿠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인이 올림픽의 성공을 통해 ‘전후의 피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단합하고 있었지만, 형의 뒤를 따라 육체노동을 하게 된 그에게는 올림픽이 ‘국제사회에의 진출이 아니라 서구적 보편사상에의 영합’이며, 현실을 감추고 망각하게 하는 ‘일시적 사탕’이자, 전쟁을 대신한 경제발전이라는 헛된 구호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미끼라는 사실이 또렷이 보였다. 부의 분배를 통한 평등한 사회를 위해 올림픽 개회식에서 폭탄을 터뜨리려던 그는 가슴에 경찰의 총을 맞고, 그렇게 올림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된다.

경제적 불평등을 중심으로 ‘올림픽의 몸값’을 질문하는 것이 소설의 지배적 메시지지만, 지금의 독해는 어쩐지 전경보다는 배경을 주목하게 만든다. 소설 속에서 올림픽이 대표하는 경제발전을 떠받치는 토대는 ‘눈이 핑핑 돌 만큼’ 빠른 도쿄의 변화다. 맨션이 들어서면서부터 마당을 채우던 휘파람새의 노래가 사라졌지만 끊이지 않는 공사 소음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땅은 파헤쳐지고 강은 메워지고 도로에는 ‘마이카’들이 달리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고 죽순 캐던 자리에는 경기장이 들어섰다. 산을 헐어 메운 바다 매립지는 공장과 발전소가 들어서거나 공사 폐기물로 호황을 누리는 쓰레기 처리장이 되었다. 도쿄 사람들은 이제 붕장어도, 잿방어도, 김도 못 먹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세련되었다. 삶의 사슬을 끊고 올림픽 같은 것을 먹고 살 수 있는 변종이 된 것이다. 전체를 쓰레기장으로 만든 속에서 세계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시민들의 환경미화 운동은 실소를 자아낸다. 비가 내리지 않아 하루의 반이 단수가 되는 절박한 물 부족 상황에서도 ‘도쿄 사막’을 만드는 공사장의 먼지는 그칠 줄 모른다. 2021년이 그러하듯이, 게임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어쨌든 그런 것이니까.

구니오에게도 ‘복을 독차지한’ 도쿄와 비교해 고향에 ‘없는’ 것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포장도로가 없다. 병원도 진료소도 없다. 하수도도 없다. 텔레비전도 없는 집이 더 많다. 전화는 촌장 집에 딱 한 대. 자가용도 한 대도 없는 ‘동물의 삶’이라 그는 분노한다. ‘도쿄의 100분의 1이라도 좋으니’ 그 부를 고향에 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목탄(木炭)보다도 가치 없는 시골의 녹음(綠陰)과 목조 다리가 있던 자리를 ‘거대하고 아름다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차지하는 평등.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이제는 콘크리트와 도로와 차와 전화와 텔레비전 없는 곳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었으니. 탄광에서 손이 얼어 터지도록 땅을 파거나, 게이샤가 되거나, 숯가마 터의 식모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살만이 기다리고 있는 촌구석, 그리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맛있는 케첩 라이스와 똑같은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예쁜 여자들이 있는 도쿄의 두 가지 선택지를 받아든 사람들에게 답은 자명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올림픽마저도 그렇게 호들갑을 떨만 한 일이 못 된다. 소박한 삶과 존재와 장소를 파괴하고 가면 뒤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올림픽’은 이제 모두의 일상이 되었으므로. 레오폴드의 말을 변용하자면 우리는 무엇이 올림픽을 뒷받침하는지는 잊어버리고, 올림픽이 우리를 지탱해 준다고 믿고 있다.

 

2020 도쿄올림픽의 슬로건은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와 관련된 ‘지구와 사람을 위해’였다. 기존 경기장 재활용, 선수촌에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력 공급, 경기장 내 이동수단으로 전기차 이용, 골판지 침대, 알루미늄 폐기물을 재활용한 시상대, 수소 연료를 활용한 성화, 재활용 재료로 만든 메달 등으로 ‘친환경 올림픽’을 지향했다. 장황한 변명 같은 이 ‘친환경’의 외피 뒤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숲 파괴가 있다. 물론 얼마 남지 않은 도쿄의, 일본의, 그리고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곳들의 자연도 함께 파괴되었을 것이다. 평창올림픽의 가리왕산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수많은 올림픽이 없애버린 수많은 장소들이 그러했듯이. 도쿄올림픽의 경기장을 짓기 위한 합판들은 동남아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오랑우탄을 비롯한 거주자들을 몰아내면서, 열대우림 파괴로 악명 높은 한국계 기업 코린도(Korindo)로부터, 왔다.

오랑우탄 같은 멸종위기종이 (이미) 없는 곳에서, ‘합법적으로’, ‘지속가능하게’ 합판을 생산했으면 괜찮았을까. 화석연료를 안 쓰고 탄소 배출을 줄이고 기후가 정상화되면 ‘만사 오케이’일까. 비정상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에 대한 이야기들에 그만 현기증이 난다. 레오폴드는 ‘야생 세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생 세계 없이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광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던 대로 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위드 코로나’의 장밋빛 전망을 바라보며, 텔레비전보다 기러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소중한 사람도 있다는 그의 말이 사무친다. 



글_ 김혜나 대구대학교 연구중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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