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거인들이 쌓아 올린 애증의 대서사시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1. 당대의 풍운아들이 필연적으로 만나다

마틴 루터 킹을 안다면 맬컴 X의 이름도 이제는 상식 수준으로 들어봤을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의 이름은? 굳이 권투 팬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익숙할 테다. 하지만 이 둘의 조합은 어떨까?

사실 두 사람은 접점이 꽤 많다. 나이 차가 꽤 나긴 하지만(X는 1925년생, 알리는 1942년생), 사회적으로 둘 다 격동의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았고, 기독교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했으며 흑인 인권운동은 물론 미국 현대사에 거대한 아이콘으로 남았다. 두 사람은 공신력 있는 미국의 100대 위인이나 20세기 인물 100인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마치 단짝 콤비 같은 관계다. 실제로 둘이 함께 찍은 사진도 꽤 많다. 하지만 둘의 내밀한 관계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서는.

동명의 책을 기반으로 한 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는 현대 미국 역사에서 반란자의 상징으로 격론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제는 역사적 위인으로 승격된 두 거인의 관계를 추적하는 전형적인 인물 다큐다. 하지만 워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둘 사이에 벌어졌던 비화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 익숙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FACT 자체가 뿜어내는 힘만으로도 90여 분 달리기엔 별 어려움이 없다. 잘 뽑혀 나온 위인 버디무비인 셈이다.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2. 맬컴 X × 무하마드 알리

 

대충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이렇다. 19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20대의 유망 복서 캐시어스 클레이는 프로로 전향해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중이다. 그는 미국을 대표해 아마추어 권투에서 정상에 올랐지만, 고향 루이빌에선 흑백 인종분리 정책에 의해 식당 출입도 거부당하는 신세에 분노하며 사회 현실에 눈뜬 상태였다. (이설이 있지만, 그 사건 직후 올림픽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프로 데뷔 후 조깅을 하던 어느 날 그는 블랙 무슬림 운동의 거리 홍보를 보고 평소 자신이 느꼈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각성에 이른다.

그런 그에게 당시 블랙 무슬림 운동의 떠오르는 별 맬컴 X와의 만남이 운명처럼 이뤄진다. 맬컴 X는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범죄에 물들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흑인국가 건설을 표방하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가르침에 귀의하고 출소 후 단체 확장에 돌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조직의 2인자이자 공식 대변인으로 올라섰다. 아무리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갈고닦아도 극복하기 힘든 차별을 몸소 체험한 캐시어스 클레이는 열정적으로 그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둘의 만남은 갈수록 잦아진다.

결정적 시간이 온다. 맬컴 X는 신출내기 도전자 캐시어스 클레이가 7대 1의 도박사 배팅을 깨고 당시 손꼽히던 강자 소니 리스턴을 물리친 첫 세계 타이틀 쟁취 직전, 긴장한 도전자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의지를 북돋워 준다. 그리고 그는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승리한다. 그리고 ‘세계의 왕’이라며 포효한다. 우리가 아는 이름, ‘무하마드 알리’가 탄생한 것이다.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스틸 이미지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알리의 영향력과 명성이 커지면서 둘의 관계는 계속 깊어져 간다. 당시에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나 경찰의 비공식 폭력, 그리고 흑인 인권운동과 좌파 활동을 사찰하던 에드가 후버의 FBI 공작이 횡행하던 시절이다. 맬컴 X는 공식 행사에서 늘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보안에 싸인 활동을 펼쳤지만, 알리는 의외였다. 심지어 그는 알리를 자신의 가족들과 스스럼없이 만나게 할 정도였다. 둘의 관계는 의형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고 영화 속 지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맬컴 X는 사적인 우정을 넘어 공적 활동에서 자신의 주요한 성과로 이 헤비급 세계 챔피언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아마 블랙 무슬림 운동의 선전홍보를 위한 의도적 접근도 일정 부분 작용하지 않았을까 원작과 영화를 만든 이들은 추측한다. 아무튼, 한창 ‘좋은 친구들’의 시절이다.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스틸 이미지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3. 관계의 종말, 그리고

 

이 호시절은 약 3년간 지속한다. 하지만 교단의 가르침을 어기고, 이제 킹 목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당대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어가는 블랙 무슬림 운동의 2인자 맬컴 X를 교단의 일인자인 일라이자 모하마드는 경계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당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내부적으로는 흑인우월주의에 가까운 과격한 교리를 설파했지만, 정부의 탄압을 피하고자 사회운동 참여는 의도적으로 금지했는데 X는 이 방침을 어기고 적극적으로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이제 블랙 무슬림 운동의 프로파간다로서 상징화된 알리는 둘 간의 파워 게임 사이에 놓인다. 맬컴 X엔 갈수록 무하마드 알리가 소중해졌지만, 반대로 일라이자 모하마드는 그와 알리를 분리하는 것의 의미를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조직의 일인자로서 그는 젊은 알리에게 여러 은전과 우대를 제시하며 그를 회유한다. 갈등하던 알리는 ‘친구’를 버리고 ‘조직’을 따른다. 맬컴 X는 블랙 무슬림 운동의 구심 조직이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축출되고, 알리는 이제 조직의 총아로 떠오른다. 이제 알리는 공개적으로 인터뷰에서 맬컴 X를 비난하고 외면한다.

그 직후 맬컴 X는 그의 사상적 전환점이 된 아프리카 순방과 메카 순례를 떠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알리 역시 자신의 위상을 활용한 아프리카 투어를 진행한다. 둘은 호텔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지만, 알리는 끝내 X를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세계를 돌아본 후 X는 미국에서처럼 흑인과 백인이 피부색으로 갈등하지 않고 화합하는 세계를 목격하고, 더 근본적인 사회개혁 추진 및 갈등의 화해를 꾀한다. (신기하게도 온건 VS 과격 구도로 흔히 묘사되는, 마틴 루터 킹은 이 시기에 비폭력 원칙은 고수하면서도 좀 더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반대로 X는 민족 분리는 추진하지만 과격한 선동을 유보하는 노선으로 서로 접근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새롭게 전향적인 운동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곧 암살되고 만다. 한번 결별한 후 둘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것이 역사책에 기록되어 알려진 ‘공식’ 내용이다.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원작 이미지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4. (원작과) 영화가 새롭게 쌓아 올린 ‘정전’

 

원작의 풍부한 자료조사와 두 사람의 다양한 지인 인터뷰를 통해 다큐멘터리는 그 우정이 깨어지는 과정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았던 후일담을 엮어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에는 무하마드 알리의 동생과 자녀, 맬컴 X의 자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간부까지 총출동해 각자의 입장과 당시 상황에 대한 평가를 다채롭게 선보인다. 영화가 거둔 대부분의 성취는 이런 압도적 현실에 힘입은 결과다.

맬컴 X의 죽음 이후 알리는 다사다난한 격동의 시간을 보낸다. 그의 이름을 복서를 넘어 역사에 남기게 된 징병 거부와 타이틀 박탈, 4년간의 공백기를 지나 권투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는 재기 시합들을 거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알리의 단호한 발언, 그로 인한 수난, 그리고 전성기를 사회적 투쟁으로 날려버린 알리가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같은 당대의 라이벌들과 벌였던 격전들은 20세기 현대사에 한 페이지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조금 덜 알려진 이야기가 영화를 통해 소개된다.

맬컴 X과 대립했던 일라이자 모하마드의 죽음 직후인 1975년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나온다. 무하마드 알리와 맬컴 X의 가족들에 의하면 그 직후 알리는 X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후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알리의 딸은 자신이 아버지의 회고록을 작성하기 위해 인터뷰하던 기억을 회상한다. 자신이 던진 X와의 결별 관련 질문에 대해 알리는 한참을 침묵에 잠긴 후 분명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X와의 우정이 깨어진 일에 대해 후회했고, 사실 X의 발언과 입장이 옳았다고 생각했다는 고백을 전한다. 알리의 장례식 때 맬컴 X의 딸은 고인에게 추도사를 전하며 부친의 사후 알리와의 재회 순간을 기억한다. 인터넷에서 금방 검색할 수 있는, 익히 알던 내용이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차원이 다른 감흥을 제공한다.

이게 이 다큐멘터리의 전부다. 물론 거기에 꼼꼼하고 방대하게 정리된 두 거인의 생애와 격동의 시대가 압축되어 녹아있다. 통속적인 유명 인사들 갈등과 화해의 애증 서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그거다. 68혁명과 베트남 전쟁, 동서 냉전과 신좌파운동, 민족해방투쟁과 인종차별 철폐 투쟁이 소용돌이치던 그 격동의 시기를 국내 독립 다큐멘터리들로선 상상하기 힘든 클래스로 고증하고 재현해 버린다. 특히 맬컴 X 관련해선 준 전기 수준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현재 국내에서 그의 전기가 절판된 상태라 더 소중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무하마드 알리는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 시절을 위주로 소개된다) 파격적이거나 새롭지는 않지만 전형적이고 통속적인 형식과 구성에도 불구하고 본 작품은 엑스의 말처럼, 알리의 펀치처럼 보는 이를 강타하는 묵직함이 있다.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포스터 이미지

5. 보충수업을 원하신다면?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는 만만찮은 내용을 가득 담은 사회파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이 작품 하나만으로 맬컴 X과 무하마드 알리라는, 미국 현대사에 잊히지 않을 족적을 남긴 두 거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득권 세력이 꼭꼭 감춰뒀던 ‘진실’을 끄집어내고 자신을 던져가며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처럼 세상을 밝히고 산화해간 맬컴 X와, 뛰어난 스포츠 선수를 넘어 ‘위인’의 반열에 오른 역대 최고의 운동선수로 손꼽히는 무하마드 알리의 생애는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에 의해 분석되고 정리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입문자를 위한 코스를 소개해 본다면 아래와 같은 가이드를 제시할 수 있겠다.

본 작품을 보고 흥미를 느껴 두 사람에 대해 추가적으로 더 찾는 이들에겐 스파이크 리 감독의 3시간짜리 대작, 덴젤 워싱턴이 실제 인물에 빙의된 수준으로 인생 연기를 펼침은 물론, 넬슨 만델라(!!)가 맬컴 엑스의 가르침을 어린 학생들에게 전하는 교사 역할로 특별출연하는 맬컴 X 전기영화 <맬컴 X Malcolm X, 1992>를 우선 추천한다. 엄청나게 길고 상세하게 주인공의 전 생애를 망라해 놨다. 감독 자신이 반드시 이 작품만은 자신이 연출하고 싶다고 갖은 로비를 한 끝에 부족한 예산을 마이클 잭슨과 마이클 조던 같은 흑인 사회 명사들에게 직접 호소해 완성했다는 일화가 전해올 만큼 진정성이 돋보인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영화는 엄청나게 많다. 본 작품이 다룬 부분 이후부터가 궁금하다면, 알리의 본격적 사회운동과 그 과정에서 겪은 병역거부 소송, 그리고 이후 조지 포먼과의 대결을 중점적으로 다룬 마이클 만 감독, 윌 스미스 주연으로 제작된 영화<알리 Ali, 2001>가 있다. 이 영화 역시 흥미보다는 극화에 집중하는 고집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다룬 <웬 위 워 킹스> 외의 숱한 다큐멘터리들이 대기하고 있다.

 

 


작품 정보

 

블러드 브러더스 -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Blood Brothers: Malcolm X & Muhammad Ali

2021, 미국, 다큐멘터리

2021.09.09. 공개, 95분, 12세 관람가

감독 마커스 A. 클라크

출연 무하마드 알리, 말콤 X

제작 케냐 배리스, 제이슨 페레즈

기획 조나단 친, 사이먼 친, 에린 샘슨

원작 랜디 로버츠, 조니 스미스

배급 넷플릭스 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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