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불평등에 맞서다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포스터 이미지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포스터 이미지

1_ 재난: 천재와 인재 사이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2년째, 여전히 전 세계는 이 ‘역병’의 멍에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채 백신 보급으로 그 파괴력을 약화하는 데 집중하는 중이다. 코로나19의 영향은 순식간에 많은 익숙하던 것들을 과거의 유물로 바꿔버렸지만,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예전 전염병 사례에 비해 그 공포는 많이 줄어들었다. 말라리아나 콜레라, 천연두, 페스트(흑사병)들이 창궐했을 당시에는 ‘신의 징벌’이라고 밖에는 당시 수준에선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참혹한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기근 또한 과거엔 일단 발생해버리면 다른 대안이 나올 게 없었다. 지구권 전체가 소빙하기를 맞았던 시기에 벌어진 경신대기근이나 텐메이 대기근의 공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 기록과 구전으로 해당 지역에 전승되고 있다.

이런 재해와 재난은 과거엔 천재지변에 속한다고 간주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리 알아낼 수도, 방어할 수도 없다는 체념은 신의 존재에 의지하게 유도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이런 재난들은 그 출발은 자연재해에 가까울지언정 참상의 확산은 인간들에 의한 측면이 점점 심화되어갔다. 단일 유행병으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 독감의 경우 1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과 직후의 피폐한 건강 상태와 함께 식량 생산을 위한 집약적 축산이 조류독감에서 변형된 형태로 퍼진 것으로 추측되었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이나 20세기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경우에는 농업생산의 문제로 출발했지만, 사태를 악화시킨 건 ‘보이지 않는 손’을 맹신하던 영국 정부나 식량 공출을 중단하지 않은 소련 정부의 착오가 훨씬 컸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한 결과다.

코로나19의 경우 ‘세계화’가 바이러스의 확산 흐름에 지배적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가 집중된 대도시와 세계 경제 중심부에서 출발한 코로나19는 실시간 속도로 전 세계에 퍼졌고 진정한 ‘판데믹’을 불러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대응은 국가별, 지역별로 꽤 다른 양상을 띠었다. 또한, 자국 내에서도 사회 계층별로 보호 수단과 대책은 상이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점점 옛날 노인들 이야기대로 ‘가난은 나라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구호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21세기이다.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2_ ‘대 공포’ 초반을 복기하다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가?’ 새카만 화면 한복판에 자막이 떠오른다.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는 게 바이러스이지만’

‘혹자는 우리를 일깨우려는 신의 처분이라 믿는다.’

 

인도의 저명한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의 문장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는 시작된다.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올란도 폰 아인지델 감독이 연출한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코로나19에 맞서는 인간들의 전 지구적 대응상황을 소개하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그다음으로는 지구촌을 다루는 보도 영상에서 흔히 등장하듯, 세계 곳곳 사람들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하지만 조금 어색하다. 어느새 코로나19 창궐 2년을 경유한 우리에겐 이미 낯선 과거가 되어버린 축제와 광장의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세계를 벗어나 이제 화면은 ‘현재’ 순간으로 전환된다. 그 출발은 중국 우한이다.

코로나19가 ‘공포의 마왕’처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던 그 순간, 도시 전체가 봉쇄된 우한의 거리가 화면에 펼쳐진다. 거대한 도시에 인적 하나 없는 초현실적 풍경을 잠시 확인하며 전율을 느끼는 순간, 누군가가 등장한다. 현지 상황을 중계하던 자원봉사자는 이윽고 차량을 운전해 누군가를 태우러 간다. 그는 대중교통이 중단된 가운데 방역 활동에 나선 의료진을 픽업하는 봉사활동 중이다. 서로 조심하라는 덕담과 함께 헤어지는 장면에 이어 봉쇄된 도시 내에서 주민들은 고립된 가운데 어떻게든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다시 암전 후 검은 화면에 수치가 자막으로 인쇄된다. “2020년 1월 확진 9,896명×사망 213명”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지금 보면 이 수치는 별로 놀랍지 않다. 아마 전 세계적 공조와 신속한 대응이 이뤄졌다면 어쩌면 위의 숫자에서 많이 늘어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던 순간에도 세계 곳곳은 아직 평화롭다. 마스크를 쓴 이는 드물고 평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거리 풍경이 여기저기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는 우리의 통념을 가뿐하게 초월해버린다. “4월 확진 3,110,786명×사망 229,579명” 3개월 사이에 확진 300배 이상, 사망 1,000배 이상이 증가했다. ‘대 공포’의 본격화 서막이다.

이제 영화 속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거리에선 갑자기 사람이 픽픽 쓰러져 나간다. 영국 런던과 미국 마이애미, 브라질 상파울루, 이란 테헤란으로 속속 무대가 바뀌면서 각 지역에서 특파원인 마냥 실황을 소개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에 의해 ‘대공포-판데믹’의 현장 스케치가 화면 너머 시청자에게도 전염되어온다. 이미 지난 1년여 넘게 겪은 일들이지만 새삼 다시 확인해 보는 2020년 상반기 풍경은 여전히 전율스럽다.

이제는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게 확실해졌다. “5월 확진 5,950,947명×사망 384,060명” 불과 한 달 사이에 확진과 사망 모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형국이다.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 재난의 공포가 이제 폭발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카메라는 페루, 인도까지 지구촌 곳곳을 조명한다. 바이러스에서 안전한 곳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판데믹 참상을 소개하는 데에서 조금씩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다.

 

3_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장벽과 차별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설전으로 국내 뉴스에도 자주 등장했던 세계보건기구(WHO)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 사무총장이 인터뷰에 등장한다. 그는 ‘바이러스보다 더 두려운 게 국가별 극단적 민족주의와 불평등, 가난’이라 언급한다. 그 발언 직후부터 영화 속에서 각 국가별로 현지 특파원처럼 상황을 중계하던 이들 각자의 대응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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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1. 영국의 사례: 이민자에겐 보험 혜택은 없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영국 무상의료체계 NHS 소속 병원 청소부로 일하게 된 시리아 난민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은 코로나 관련 의료기관 희생자가 늘어나자 영국 정부가 취한 조치를 듣고 경악한다. 동료에게 의견을 묻던 그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며 작은 실천에 나선다. 영국 정부는 의료기관 종사자가 코로나19 관련 희생될 경우 사망자에게 생명보험을 정부 부담으로 가입하고, 유가족에게 영주권을 부여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처음에 그와 동료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왜 그들은 분노하게 되었을까? 영국 정부는 생명보험 가입대상에서 병원의 청소부와 포터, 조리사 등 비정규직은 혜택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이들 역시 똑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데다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으로 일하는데도 말이다. 그는 영국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입장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린다. 이 영상은 하루 만에 5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수만 명이 ‘좋아요’ 표시를 누르며 큰 반향을 일으킨다. 영국 정부는 불과 4시간 만에 제외했던 이들을 적용 범위에 포함한다.

엎드려 절 받기가 된 셈이지만 어쨌건 여론을 움직여 NHS 체계 내의 비정규직 상당수는 그들이 목숨의 위험을 받는 담보로 최소한의 안전핀은 제공받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미 정부의 재정 삭감과 무관심으로 병원 업무의 상당 부분이 비정규직에게 의존하고 있음이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침구와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이들이 후송될 때 책임지는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은 난민이거나 가난한 3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체류 중이거나 영국 사회의 빈곤층에 속하면서 병원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저임금 일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3_2. 미국의 사례: 노숙인은 시민이 아니다?

미국 마이애미 대학병원에서 코로나 관련 대응을 담당하는 의사는 비번일 때는 대도시 외곽에 방치된 노숙인 천막촌에 위생 센터를 운영하며 마스크를 나눠주고 샤워와 세면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이 고된 일정을 지역사회 연대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자체의 대책은 그와는 퍽 다른 방식이었다.

지자체는 노숙인의 천막촌을 강제로 철거하고 이들을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거나, 나름대로 전향적인 정책을 취하는 셈으로 정부기관 쉼터로 강제 수용하는 방법을 취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돌봄 계획 없이 좁은 쉼터에 그들을 밀어 넣는 것은 반발심은 물론 바이러스의 확산에 무방비한 후유증으로 돌아왔다. 더 악질적인 것은 도시 중심부나 중산층 이상 거주구역으로의 위험을 막기 위해 노숙인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강제 철거다. 의사가 노숙인 건강을 체크하러 가보면 천막이 뜯겨 있고 철거에 저항하다 다친 노숙인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 식이다.

하지만 항상 사회 소외계층과 빈곤층이 바이러스 전파 집단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건강과 위생 상태부터 우선적으로 돌봐야 함은 이미 증명된 대책이다. 그저 마이애미 지방정부는 그들을 시민으로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뿐이다.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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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3. 브라질의 사례: 빈민촌은 관리 대상에서 제외?

 

카메라는 브라질의 대도시 상파울루로 향한다. 브라질 대도시라면 반드시 형성되어 있는 ‘달동네’ 격의 빈곤층 밀집 구역 ‘파벨라’를 비춘다. 그곳 주민은 예전부터 자신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던 주 정부가 코로나 관련 대책 또한 그렇게 집행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위생을 위해 수도 공급이 원활해야 함에도 이곳은 제대로 급수가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 하루 중 1/3 이상은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아 비상연락이나 응급조치에 차질이 많음에도 전력난은 여전하고 단전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태다.

빈민가 단전단수 문제는 이미 바이러스 이전부터 고질적 문제라지만, 더 심각한 상황은 지역의 응급지원체계 내에서 ‘파벨라’ 동네는 사실상 배제된 것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긴급 상황으로 호출해도 다른 지역보다 이 동네에는 출동 속도나 빈도가 현저하게 낮다. 결국, 사회적으로 만연한 불평등이 시민의 목숨마저 차등화시키는 셈이다. 그는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시위를 계획한다. 코로나19는 갑자기 발생했지만, 전쟁이나 재난이 늘 이미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 난민과 이주노동자, 빈민들에게 더 가혹했던 역사를 충실히 반복하고 있음을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4. 문제는 불평등!

 

이 영화를 통해 코로나19의 공포와 여기에 맞서는 인류의 숭고한 항전을 기대했던 이들이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부터 방향 선회를 시작한 뒤 후반부에선 초반의 분위기와는 어찌 보면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좀 낯설지만 필요한 이야기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은 결국, 건강한 사회가 바이러스를 막는 데 필수적이라는 결론이다.

 

4_1. 코로나 속 시위의 물결은 왜?

마이애미의 의사는 어느 날 집 앞에 주차되어 있던 자신의 자동차가 도둑에게 털린 것을 확인하러 나와 있었다. 그 차는 평소 자신이 노숙인 천막촌에 설치한 위생 센터에 보급할 의료물자가 실린 승합차였다. 상황을 확인하던 중 경찰이 도착한다. 그런데 이 경찰은 의사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동수상자로 단정하고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그를 강제로 체포해 수갑을 채운다. 의사는 그 경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다룰 수 있게끔 의도적인 도발을 취했다고 믿는다. 그 모든 순간은 CCTV에 생생히 담겨 시청자에게 제공된다. 문제는 6살 난 의사의 딸이 그전 과정을 함께 지켜봤다는 것. 딸이 아빠를 구하러 달려 나온 덕분에 의사의 누명은 풀리지만 그날 이후로 어린 딸은 경찰을 보면 두려워하며 피하게 되어버렸다. 알고 보니 그 경찰은 과잉대응과 폭력으로 여러 차례 민원 대상이 된 (그리고도 별 탈 없이 근무 중인) 경찰이었다.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스틸 이미지

한편 마이애미에 허리케인이 몰아치지만, 대부분이 유색인종인 노숙인 천막촌에는 그 어떤 구호 조치나 대피계획도 행해지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피부색을 따지지 않지만, 정부의 조치는 피부색을 가려가며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절규하며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전경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한국에서의 동조 시위도 한 컷 나온다) 노숙인 구호에 헌신하던 의사는 분노에 가득 차 공권력의 어긋난 대응에 항의한다.

한편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도 ‘파벨라’의 주민들이 평화 행진으로 시위를 시작한다. 이들은 다양한 요구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도로로 미어져 나온다. 하지만 주지사에게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전하려는 이들의 대오는 주지사 관저 입구에서 가로막힌다. 무장한 경찰이 대오를 가로막고, 면담을 요청한 시위대에게 주지사 측은 일정상 바빠서 만날 수가 없다며 외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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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_2. 백신 보급의 정치학

 

격렬한 시위 현장을 비추던 화면은 갑자기 전환된다. 이제는 우리가 ‘골라 맞는’ 존재가 되었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개발 여부 자체가 초미의 관심사이던 코로나19 백신 개발과정이 영화 내내 또 다른 주역 격으로 소개된다. 백신의 완성까지 예전에는 가장 빨랐던 게 4년 걸렸다는 설명과 함께 카메라는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이 주도한 (한국에선 외면당하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탄생과 보급 과정을 단계별로 소개한다.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백신의 제작도 문제이지만 보급 절차 또한 그에 못지않은 문제라고 말이다. 어떻게 국가 내 차별과 국제적 불평등을 뛰어넘어 조속히 백신을 보급할 것인가 고민하는 전문가들의 풍경은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 속 전문가의 염원과는 다르게 흘러왔음 또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처음에는 코로나19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며 백신 무용론을 설파하던 트럼프 행정부는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하자 백신을 독점하다시피 매점매석을 일삼는다. 상당수의 부유한 나라들이 이런 행보를 뒤따른다. 그 결과 소수 제약회사는 엄청난 이윤을 얻게 되었고, 이른바 ‘선진국’에는 백신 재고분이 넘쳐나는데도 음모론이나 백신 거부가 횡행하면서 오히려 남아도는 지경이다. 그 반대로 상당수 빈국은 백신을 도입하지 못하거나 아예 기본적인 방역과 응급조치 능력조차 부재한 경우가 속출했다. 그렇게 살릴 수 있는 이들이 죽어 나가고 각국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역시 천재는 인재로 변모해가기 시작해왔음이 진실로 확인된다.

 

4_3. ‘실패 국가’들의 사례

 

국가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조차 보장하지 못한다면 존재 의의는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BBC 기자 나왈 알 마그하피가 코로나19 판데믹 이후 최초로 내전 중인 예멘 상황을 취재한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한 탐사보도 르포 <코로나 그리고 전쟁>은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염병은 신과 자연의 천벌처럼 인간에게 내려왔으되, 그 피해의 경중은 인간들의 대처에 좌우된다는 단순한 진실을 제대로 확인시켜주는 생생한 사례다.

햇수로 7년째를 맞고 있는 예멘 내전의 뿌리는 깊다. 냉전이 종결되면서 현실사회주의권 영향 아래 있던 북예멘과, 서방 - 아랍 주류와 친밀하던 남예멘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남북한과 함께 세계 ‘유이’의 분단국가를 벗어나 통일을 맞이한다. 하지만 끝내 국가 통합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고질적인 정치 불안과 이질적 요소들이 누적되어가다 내전이 재발했고 북예멘의 영역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남예멘 영역은 사우디 등 아랍 주류국가들(그리고 서방세계)의 지원과 지지를 받는 수니파 계열 기존 정부와 남부 제 세력 분리주의파가 양분해 말 그대로 삼국지 그 자체가 된 형국이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예멘 내전에 직접 개입해 후티 세력과 전쟁 중이다.

 

"코로나 그리고 전쟁" 스틸 이미지
<코로나 그리고 전쟁> 스틸 이미지

경제 봉쇄와 전쟁으로 국가는 붕괴하고 기아가 만성화된 상태에서 코로나19를 맞이한 예멘의 실정을 감독은 여러 난관을 뚫고 알리기 시작한다. 첫 시작은 후티 반군이 지배하는 예멘의 수도 사나다. 전쟁으로 희망을 잃은 군중은 코로나에 대해 무지할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더 나빠질 게 없다는 태도이거나 세상 흐름에 담쌓고 사는 무지의 소산이다. 후티 정부도 공식 통계를 내기를 회피한다. 정보를 공개하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올 것이고, 서방과 사우디 등의 경제 봉쇄와 원조 중단 때문에 방역과 의료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선의 군인들에게는 급여가 지급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옹색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현지 의료진들은 후티 정부가 꺼리는 진실을 조심스레 기자에게 전한다. 진실을 공개하면 해결할 책임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그러는 것이라고. 기자는 후티의 보건부 장관과 어렵게 인터뷰를 잡기도 하고 병원 현장 방문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해 시민들의 솔직한 소리를 담는 데도 성공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너무 친 서방 기조로 후티 반군만 깎아내리지 않나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남부 임시 수도 아덴을 취재하는 부분에선 그저 할 말을 잃게 된다.

임시정부는 사우디에 망명가 있는 상태에서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에 단 한 개 병원만이 코로나 환자를 수용하고 있고, 한 명의 인부가 1,200명의 시신을 매장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소수의 의사가 급여는커녕, 산소통도 부족한 가운데 헌신하지만, 그들을 위한 지원금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했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정부가 코로나 대책을 통째로 국경없는의사회에 위탁하고 나서야 장비와 의료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치 봉건영주처럼 기존 의료 기구를 장악하던 이들은 불만을 품고 가짜 뉴스를 퍼뜨려 혼란을 부추긴다. 그럼에도 유명무실한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국경없는의사회는 철수해 버린다. (북부 후티 반군 장악지역에선 제약은 있어도 국경없는의사회가 활동 중이다)

‘실패 국가’의 전형적 사례를 보면서, 기자는 상황의 본질을 고발하는 결정타를 날린다. 결국, 명분이고 뭐고 떠나서 전쟁을 끝내는 백신은 어디에도 없다. 이백만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발육 미달로 고통받는데도 외세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부으며 대리전쟁을 끝내지 않고, 악어의 눈물처럼 병 주고 약 주는 원조를 줬다 뺏길 거듭하는 중이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보급되는 중이지만 그 수혜는 제1세계와 부국들부터 누리며, 잔칫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이 차례로 다음 서열로 내려오듯 과연 순서가 돌아오긴 할까, 목을 빼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영화 초반 등장하는 사나의 시장 상인들 항변처럼) 당장 먹고 살 방도가 없는데 신이 코로나를 피하게 해주실 거라는 무지의 소치가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5_ 최전선의 의료진과 인류의 미래

 

다시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로 돌아오면, 세계 곳곳의 코로나 대응상황을 총망라해 소개하다 보니 병원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2년째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에 맞서는 의료진의 고난이 생생하게 수록되어 있다. 페루의 병원 어느 병동에는 입원환자 대부분이 그 병원 의료진이라는 기막힌 상황도 펼쳐진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상태에서도 다른 동료들의 과로를 염려하고 자신의 발병을 자책하는 이들도, 겨우 회복되자마자 병원을 찾는 이들도 아직 인류애가 남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생생한 사례다.

그런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완쾌돼 퇴원하는 환자와 가족의 감격스러운 재회를 지켜보며 함께 눈물짓는 병원 직원들의 뭉클하고 보람 가득한 표정은 인류가 코로나19 정도로 붕괴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을 안겨준다. 좀 더 의료진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픈 이들에게는 2020년 초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소재한 에라스무스 자유대학병원의 일상을 담은 <누가 영웅인가>를 권한다.

 

"누가 영웅인가" 스틸 이미지
<누가 영웅인가> 스틸 이미지

5_1. 누가 영웅인가?

 

이곳 코로나19 격리병동 의료진들을 조명하는 카메라에는 아주 익숙한 풍경과 낯설고 생소한 광경이 교차한다. 전자는 (우리도 겪었던) 딱 1년 전 혼란과 불안이 팽배한 병동 현장이다. 원인도 해결책도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환자들은 손쓸 길 없이 죽어 나간다. 당시 병원 직원들의 일상이 샅샅이 공개되는 부분은 작품 제목과 연결된다. 정부는 약속한 지원금과 장비를 제때 공급하지 않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경각심 약한 이들은 거리를 활보하며 속을 썩인다. 환자 중 일부는 공포로 인해 탈출을 시도한다.

환자들과 같이 격리된 의료진들도 고장 나기 마련이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간호사, 감염 공포를 억누르며 폐기물을 정리하는 직원, 환자를 회복시킬 소명을 못다 한 의사의 괴로움이 실시간 펼쳐진다. 그 와중에도 돌보던 환자가 건강 회복 후 보낸 영상에 웃고, 코로나 격리 병동 폐쇄를 앞두고 기념촬영에 응한다. 영화는 잘 짜인 구성보다는 최전선에서 인명 구호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지금 시대에 영웅이란 아이돌이나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바로 이들이라는 점을 제대로 소개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5_2. 불평등과 빈곤 해결은 의지로 가능하다!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는 두 시간 가까운 여정을 마치며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재난을 극복하자는 캠페인성 합창을 끝으로, 역병의 공포에 가려진 우리 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끄집어내는 임무를 완수한다. 영화 속 시간의 흐름도 어느새 숨 가쁜 1년이 지났다.

“12월 확진 82,654,704명×사망 1,870,924명” 불과 1년 동안의 기록이다.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훨씬 더 수치가 가공할 만큼 증가했을 게 뻔하다. 웬만한 전쟁보다 훨씬 막심한 인명피해, 그것도 지독히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상태의 참상이다. 여전히 세계 곳곳은 보이지 않는 적, 그리고 알지만 외면하고 있던 우리 내부의 적과 투쟁 중이다. 바이러스는 불가항력이지만 불평등과 빈곤은 의지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이들 다큐멘터리들은 생생한 증거자료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작품 정보

 

컨버전스 - 위기 속의 용기 Convergence: Courage in a Crisis

2021, 영국·미국, 다큐멘터리, 113분, 15세 관람가

감독 올란도 폰 아인지델

공동감독 하산 아카드, 린펜 코트어스, 모하마드 레자 에이니, 앰버 파레스, 기에르모 갈도스, 랄리 호턴, 사라 카키, 원하우 린, 마우리시오 몬테이로 필로, 주히 샤르마

제작 및 배급 넷플릭스 오리지널

* 넷플릭스에서 월정액 스트리밍 관람 가능

 

누가 영웅인가 I Am Not A Hero

2021, 벨기에, 다큐멘터리, 73분

감독 파블로 디아즈 크루츤

* EBS D-box에서 월정액 스트리밍 관람 가능

 

코로나 그리고 전쟁 Covid and War

2020, 예멘, 다큐멘터리, 52분

감독 나왈 알 마그하피

* EBS D-box에서 월정액 스트리밍 관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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