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경제 위기 시대 노동자의 삶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포스터 이미지

1_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부의 집중, 하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의 전성기, 노동자 계급과 상류계급 사이에 2.5배 소득 차이가 났다고 전한다. 갤리선을 젓거나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전문기술자가 아닌 노동자 계급의 연간 수입은 280부셸, 자기 재산으로 무장을 갖추고 시민병으로 복무 가능한 오늘날 중산층에 해당하는 계급은 280~420부셸, 상류층은 700부셸 수입이 기준선이었다. 시민 사이에 드러나는 재산 유무는 금은 식기나 망토 정도에 불과했다.

동유럽 붕괴 후 빈곤과 무능의 상징처럼 치부됐지만, 전성기의 소련은 미국의 절반은 되는 경제력과 함께 (그 실질은 차치하고) 주택과 직장, 의료와 교육이 무상으로 지원되는 시스템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대략 1970년대 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훗날 ‘노멘클라투라’라 불리는 고위 당 간부들은 분명 서민 노동자 계층보다 많은 특혜를 누렸지만 임금 격차는 최대 6배 수준이었다.

오늘날 경제성장과 부의 집중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가팔라지는 중이다. 매년 발표되는 세계 부자 순위를 보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 오르내린다. 2021년 11월 세계적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 공개된 재산 규모 1위를 차지한 일론 머스크의 재산은 3,203억 달러, 우리 돈으로 380조에 이른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인 한국 1년 총예산의 절반이 넘는 부가 개인에게 집중된 셈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7년부터 3만 달러를 돌파했다. 환율로 따져보면 성인 1인 기준 연봉이 3600만 원이다. 월 300만 원이 평균값인데 지금 주변의 근로소득자들 급여 상태, 특히 청년세대 취업 현실을 살펴보자. 평균의 저주에 걸린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중간이 없다. 누군가는 최저임금이 임금최고선이고, 그들이 닿을 수 없는 어디인가에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대박을 터뜨렸다는 전설이 유령처럼 떠도는 중이다.

일확천금과 벼락부자의 전설은 주위를 유령처럼 떠돌지만 정작 다수가 느끼는 삶의 질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시절이다. 어딘가엔 유토피아가 있을 거라는 희망 속에서 해외로 탈주하는 이들도 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애초에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한국과 엎치락뒤치락 세계 10위권과 선진국 경계에서 각축을 벌이는 이탈리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제 소개할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를 보고 나면 (‘어디에도 없는’이란 뜻에서 비롯된) 유토피아의 환상은 지우는 게 좋다.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2_ 영화 속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젊은 노동자 줄리오는 아무리 찾아봐도 일자리가 보이지 않는 땅,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에 해당하는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아내 아리안나와 어린 딸 카를로타를 데리고 경기가 그나마 낫다는 중북부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으로 갓 이주해온 상태다. 줄리오가 작은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딸을 전학시킨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하지만 임금이 계속 체불되는 것이다.

붙임성 좋고 성실한 줄리오는 공장 동료이자 동네 토박이 레오나르도와 친해지면서 적응에 노력한다. 하지만 줄리오와 가족이 넘어야 할 산은 한둘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남북문제로 상징되는 뿌리 깊은 지역감정, 불경기에 작은 동네에 출현한 이주자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날 선 눈총은 극복하기 만만치 않다.

공장 동료 프랑코는 사사건건 줄리오에게 시비를 걸어오기 일쑤다. 줄리오의 아내 아리안나가 혹시 마트에서 사람 구하는지 물어보자 직원 세레나는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당한다는 공포로 차갑게 대한다. 가난한 지방에서 온 이주자의 동네 정착 분투기가 이어진다.

공장의 임금 체불은 계속된다. 공장장 파비오는 필사적으로 동료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달래가며 공장 가동을 유지하려 애쓴다. 레오나르도, 줄리오, 프랑코, 니콜라 등의 또래 노동자들은 공장을 믿고 일단 일하자는 측과 불신하는 측으로 나뉘어 수시로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리며 다퉈봐야 뾰족한 수는 없다. 그런 와중에 2012년 5월 에밀리아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이 이 작은 마을에도 들이닥친다.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한밤중에 공포에 떨며 뛰쳐나왔던 이들은 여진의 공포 속에서 생계의 유일한 방편인 공장 출근을 놓고 갈등한다. 그 노동자의 가족은 자식이자 남편인 이들에게 출근을 간곡하게 만류한다. 하지만 또다시 내부 갈등 끝에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혹은 집에 가만히 있다가 닥쳐올지 모르는 지진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자 공장으로 향한다. 적어도 그들이 오랜 기간 종사해온 공장 노동에 임할 때는 다른 걸 잊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여진이 그들을 강타한다. 공장은 붕괴하고 누군가는 가족과 동료를 영영 잃어버린다. 재난은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이들, 당장 집세를 내야 하거나 자녀의 수학여행 경비를 내야 하는 이들에게 더 가혹하게 닥치게 마련이다. 출근을 말리지 못했다고, 공장 재가동을 막았어야 했다고, 지진 당시에 동료를 구출했어야 한다고 모두가 피해자인 노동자와 가족들이 서로 욕하고 싸우다 끌어안고 흐느낀다. 슬픔은 나누면 줄어든다는데 여기에선 함께 눈물바다로 떠내려가는 모양새에 가깝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다. 누군가가 등장한다. 그 사람은 그날의 아픔을 기억한 채 옛 공장 터에 안전 대책이 강구된 새 공장 건축을 기획하고 있다. 과거에 이주를 결단하면서 어느 가족이 꿈꿨던 미래의 아주 작은 조각이 실현된 이 장면은 단순한 판타지라기보다는 세상은 이렇게 희생을 기억하며 변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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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3_ 이탈리아 사회적 리얼리즘의 전통에 충실한

 

<에밀리아의 노동자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하지만 유럽의 작가주의 전통, 특히 예술보다 발언을 우선시하는 전통에 서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강세를 띠는 사회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묘사에 충실하다. 극영화 범위에 포함되지만, 영화 속 현실은 실제 우리 삶의 재현 혹은 압축적 묘사에 놀라울 만큼 근접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배우의 프로필엔 본 작품만이 상영작으로 올라와 있다. 해당 경향의 상징 격인 영국의 켄 로치나 프랑스-벨기에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문법을 유추한다면 이들은 대부분 신인이거나 (영화 속 캐릭터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비전문 배우일 테다. 그리고 신파이길 거부하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상징적 묘사가 여러 층위의 알레고리를 묶어내면서 보는 이들에게 사회적 배경에 입각한 서사와 함께 결정적 타이밍에 감정의 고양을 끌어내는 기제로 활용된다.

도입부와 크레디트를 빼면 영화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조급히 끝나거나, 좍좍 늘어지거나 하는 함정을 절묘하게 피하면서 딱 필요한 만큼만 이야기를 쏟아낸다. 줄리오와 프랑코 간에 티격태격 벌어지는 지역감정과 차별, 줄리오의 아내와 레오나르도의 여자친구 사이의 일자리를 둘러싼 신경전, 관리자 파비오와 동료 노동자들 간의 갈등, 레오나르도와 아버지 간의 세대 차이 갈등 같은 풍부한 대립항과 그 이면의 사회적 배경들이 씨줄 날줄로 엮여 2012년 경제 위기 당시의 에밀리아 소도시를 관객의 눈앞에 펼치듯 재현해낸다.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1. 남부 vs 북부 지역갈등

레오나르도가 인심 나쁘지 않은 에밀리아 향토성을 상징한다면 프랑코는 그런 동네조차 피해 갈 수 없었던 이탈리아의 불경기를 반영하는 캐릭터다. 프랑코는 동료보다 냉소적이고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캐릭터이지만 그가 특별히 악인은 아니다. 다만 토박이 특유의 지역적 편견을 두드러지게 드러낼 뿐이다. 그는 줄리오의 출신을 문제 삼으며 거듭 시비를 걸어오는 프랑코에게 줄리오는 남부 칼라브리아 사람이면 전부 은드랑게타 마피아인 줄 아냐며 참다못해 부딪힌다. 둘의 티격태격은 이탈리아의 뿌리 깊은 남북문제 최신판이다.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는 우리의 남북 경제 격차와 비견되는, 다만 위치만 남과 북이 바뀐 꼴이다. 이 격차는 중세 이후부터 축적된 문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르네상스 시기 북부의 베네치아와 제노바, 밀라노 등을 필두로 피렌체나 라구사, 아말피 등 주요 상업 도시들은 모두 로마의 북쪽, 최소한 동일 지역에 있었다. 이곳은 지중해 무역과 중북부 유럽과의 교역을 아우르며 상공업이 번성하고 집약적 농업도 발달한 부유한 지역이었다. 반면에 봉건제에 머무르던 남부는 나폴리를 제외하곤 대도시가 발달하지 못해 낙후한 상태에 머물렀다.

오랜 분열을 벗어나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재통일되었지만, 중심 세력은 북부였고, 남부는 소외되었다. 북부는 오늘날 프랑스나 독일과 가까웠지만, 남부는 유럽의 변방으로 취급받는 지경이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각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들이 신대륙에서 마피아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숱한 갱스터 영화만 봐도 파악 가능한 내용이다. (마리오 푸조의 영화 원작 소설 <대부>를 특히 추천한다)

현재도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소득 격차는 공식적으로 2배가 넘는다. 우리 남북문제가 서로 다른 체제인 데 비해 이탈리아는 같은 국가에 같은 체제임에도 그렇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부는 위쪽 동네(영국, 프랑스, 독일)와 맞먹는데 남부는 동유럽 빈국들과 동급이다. 청년실업률 차이는 처참하다. 북부도 요즘엔 유럽 차원 경기 침체 영향으로 10% 넘는 실업률에 비명을 지른다지만 남부는 기본이 50%에 육박한다. 제대로 된 신규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일자리는 물론 지방정부의 재정 파탄과 마피아와의 유착 등으로 인한 제대로 된 지역사회 기반이 붕괴하는 와중에 줄리오 일가가 어린 자녀 교육 문제 때문이라도 이주를 결심했다는 대목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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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2. 의자 뺏기? 토박이 vs 이민자

하지만 에밀리아 지역이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낙토는 아니다. 우리에겐 북부의 대공업과 금융 중심지, 남부의 1차 산업에 대비되는 중소기업과 협동조합 경제로 알려진 에밀리아지만 장기 침체의 여파는 이미 동네에 깊이 스며든 상태다. 기회와 취업을 위해 젊은 인재들이 외국으로 떠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사회 전반의 고령화가 심화하면서 작은 마을은 생기를 잃어가는 중이다. 자연히 지역 전체의 위기가 찾아온다. 소위 ‘지역 소멸’의 징후다.

줄리오의 아내 아리아나는 이사 과정에서 무리를 한데다 남부보다 물가가 비싼 에밀리아에서 살려면 맞벌이를 해야 한다. 그녀는 시장을 보러 온 마트의 직원에게 사람을 구하는지 묻는다. 하지만 직원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알고 보니 직원은 레오나르도의 여자친구 세레나다. 아리아나가 자신이 마트 직원으로 유용한 학위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세레나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그렇지 않아도 부모에게 얹혀살며 경제적으로 자립하거나 학업으로 동네를 떠나지 못한 자격지심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세레나는 레오나르도에게 울분을 터트린다. 아리아나 역시 동네 인심 팍팍하네! 식으로 불쾌해한다. 사소한 오해와 차이에서 갈등은 잉태되게 마련이다.

세레나의 분노는 대충 이렇다. 자신은 공부를 못해서 700유로짜리 마트 단시간 노동을 하는데 동네 하나뿐인 마트에 느닷없이 외지인이 와서 상업학 학위를 들먹이며 자기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게 옳으냐는 게다. 자신의 설자리는 대체 어디냐는 항변이다. 구조의 문제, 시스템의 결함은 평범한 노동자들에겐 공허한 담론으로 맴돌기 쉽다. 반면 그 작동의 결과로 눈앞에 보이는 변화는 직접적인 피해로 다가오고 낯선 이방인들은 그 첨병/주구로 보이기 딱 맞다.

#3. 노동자 vs 노동자

줄리오와 레오나르도, 프랑코 등 또래 노동자 일이십 명이 일하는 공장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중소기업, 그것도 ‘마찌꼬바’ 수준의 작은 기업이다. 이 공장에서 경영주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사장은 부재한 상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같은 노동자 출신의 관리자 파비오다. 딱 봐도 그의 행색은 공장장이라 하기엔 볼품도 없고 동료들과 비교하면 특별히 더 나아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체불임금 문제를 요구할 상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파비오는 하다못해 항의와 원성의 대상이라도 되어줘야 한다. 하지만 상태를 일시적으로 봉인할 수 있을 뿐, 경영자 축에도 못 끼는 파비오는 그저 어딘가에서 원격으로 지시를 내리는 사장의 전갈을 전하는 것 이상 아무런 재량이 없는 존재다. 그는 동료들에게 불신과 비난의 원흉이기도 하지만 그들 또한 파비오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등쳐먹으려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한다. 급여도 미루면서 야근은 밥 먹듯 시키는 모순을 감당하는 파비오와 툴툴거리면서도 그가 혹시나 급여 지불이라는 동아줄을 물어올지 늘 간절히 기다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수세에 몰린 노동의 위상 그 자체다.

어쩌면 파비오는 물론 공장 경영자 또한 사면초가의 신세일지도 모른다. 파비오의 말에 의하면 사장도 급여를 얼른 주고 싶지만 오랜 거래처들이 대금 결제를 차일피일 미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10년 단위 단골인 거래처에 소송을 걸어봤자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걸리고 그 때문에 거래처가 끊어지면 노동자도 손해라는 것.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닌가? 문제는 이게 단순히 위협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의 전 지구적 경제 위기는 극단적 부의 집중과 나머지의 주변화와 불안정성 심화로 나아간다. 대마불사다. 하청이나 중소기업은 작은 지진에도 금방 고꾸라지기 마련이다. 노동자들은 그저 기약 없는 공수표의 일부라도 실현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4. 고도성장 세대 vs ‘천유로’ 세대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산다. 어머니나 다른 자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부자는 대화를 자주 하지만 그만큼 충돌도 잦다. 아버지는 요즘 세상에 일자리가 없다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이다. 그가 한창 일하던 시절 과거의 좋았던 옛 시절 향수를 늘어놓는다. 그때는 일자리가 넘쳐나 사람이 모자랄 지경이었다고 입버릇처럼 아들에게 설교한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왔을 것이다.

실은 그에겐 감춰둔 아픈 과거가 있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축구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장래를 도전해 볼 기회인 평가전을 앞둔 상황에서 소년은 충격적 사실에 접하게 된다. 이미 판사인 유력자의 아들을 뽑도록 내정된 시합이란 것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폭우로 시합이 중단되었는데도 누구도 속행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서야 소년은 모든 상황의 전말을 파악하고 그는 꿈을 잃었다는 추억이다.

그 기억은 영화 초반부터 뭔지 몰라도 상징적으로 수차례 반복되던 어린 소년의 빗속 홀로 축구 장면과 그 순간 전면 접속해 관객들의 뇌리에 박힌다. 이미 30년 전, 레오나르도의 아버지가 좋았다고 회상하던 시절에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공장 노동자로 고정된 운명을 벗어날 기회란 요행에 가까웠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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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포스터 이미지

4_ 환상의 승리나 행운의 반전이 아닌 의지의 결말

 

아마 영화에서 감독과 제작진의 시선과 처지를 대변하는 캐릭터는 레오나르도일 것이다. 그는 성실하고 편견 없이 자신도 오랜 체불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더 어려운 이주자 동료를 돕는 인물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게 로또가 당첨되거나 거짓말 같은 행운이 거짓말처럼 나타나진 않는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거짓 환상을 그럴싸한 현실로 포장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레오나르도는 가난한 자들만이 가능한, 같은 처지의 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시혜가 아니라 연대의 차원으로 상호 부조하게 되는 과정을 구현한다. 공장이 붕괴하고 이제 집도 무너져 구호 천막에서 기거하는 실업자가 된 레오나르도에게 여자친구 세레나는 정말 어렵게 주선했다며 자신이 고용된 마트 일자리 면접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에게 양보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을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해 정착하기를 권한다.

레오나르도의 순수한 호의, 그 결과는 엔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복지국가 단계에 근접했던 1세계 국가들에서조차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경제 불황과 악순환의 연속이 드러낸 실상이 이 영화에선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뭔가 화끈한 승리나 기적을 바라며 그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에밀리아의 노동자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제목과 달리 음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의 객관적 이해가 모든 해결의 출발임을, 그 고통스러운 진리를 신뢰한다면 이 영화 속에서 개개인이 겪는 빈곤과 불안의 징후들은 우리 주위의 현실로 자연히 전이될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놓아서는 안 될 관용과 연대의식에 대한 보고서로 뇌리에 간직될 만하다. OTT 서비스 ‘왓챠’에서 만날 수 있다.

 

 


작품 정보

 

에밀리아의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Don't Be Afraid for the Night, La notte non fa piu paura

2016년. 이탈리아. 드라마, 노동ㆍ사회

왓챠 스트리밍 공개. 65분. 15세 관람가

감독 / 마르코 카시니

주연 / 스테파노 무로니(레오나르도 역), 월터 코르도파트리(줄리오 역), 조르지오 콜란젤리(레오나르도 아버지 역)

출연 / 이반 알로비시오(파비오 역), 피에로 카르다노(니콜라 역), 로사리오 페틱스(프랑코 역), 발레리아 로마넬리(아리안나 역), 실바나 스피나(세레나 역), 카를로타 베니니(어린 카를로타 역), 발렌티나 임페라토리(카를로타 역)

제작 / 아호라! Srl 필름

수입ㆍ배급 / ㈜씨엠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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