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인이 된 이후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꾸준히 내 나이를 증명해야 했다. 어려 보이면 좋은 거 아니냐고 묻곤 하는데, 상당히 귀찮고 짜증 나는 일에 휘말릴 때가 많다. 담배나 술을 구입해야 할 때면 거의 매번 점원에게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신분증을 놓고 왔을 때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정도는 기분 좋게 넘길 에피소드다. 나는 스트리트 파이터 기질을 갖고 있는데, 특히 중년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주특기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무례함에 대한 응징을 하는 것일 뿐 특별히 중년 남성을 찾아 싸움을 거는 하이에나는 아니다.

1년 전 어느 날, 나는 편도 1차로 골목길을 주행하고 있었는데 차 한 대가 중앙선 위에 정차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정차했던 차는 약간 후진을 하더니 이내 멈췄다. 그 차가 더 빠져줘야 내가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다리고 있으니 운전자는 창문을 열고 지나가라고 내게 손짓을 했다. 그래서 나도 창문을 열고 뒤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랬더니 그 차는 조금 더 후진했고, 나도 천천히 주행했다. 중년 남성이 운전석에서 창문을 내리더니 내가 가까워지자 “아가씨 운전면허 어떻게 땄어요?”라고 말했다. 문장만 봐도 열받을 말인데 그 아저씨는 코웃음을 치며 말해 내 화를 돋우었다. “아저씨 좁은 골목길인데 정차하고 계시면 당연히 빼주셔야죠.”라고 침착하게 말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 아가씨 운전면허 어떻게 땄냐고. 옆으로 그냥 지나가면 되잖아.”였다. “아저씨 도로가 아저씨 개인 주차장 아니잖아요. 비상등도 안 켜놓고 길 한복판에 세워둡니까.”라고 한 번 더 침착하게 말했지만, 아저씨는 언성을 높이며 “사람을 태워야 할 것 아니야! 사람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옆으로 지나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순간 내 이성의 퓨즈가 나갔고 “사람 기다린다고 그렇게 있어도 돼요? 너는 면허 어떻게 땄어요? 왜 반말하세요? 내가 니 새끼에요?”라고 말했다. 써놓고 보니 실감이 안 나는데, 큰 소리로 한 말이었기 때문에 저 말을 들은 아저씨는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이와 성별로 이중 차별을 받는 여성들

사실 중년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쉽다. 그들과의 대화는 패턴이 정해져 있다.

언쟁 중에 중년 남성이 나에게 반말을 한다. → 내가 니 새끼냐고 응수하거나 나도 반말을 한다. → 중년 남성이 할 말을 잃는다.

아저씨들은 자신보다 어린 여성인 내가 반말을 하는 게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어린 여자로 살아온 내게는 상대의 반말과 하대가 일상이었기 때문에,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당황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내가 더 당황스럽다. 작년 말 여당 대표 송영길이 유력한 대선후보의 배우자를 두고 사석에서 남편에게 반말을 한다며 비난했다. 여성은 배우자에게 반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공당의 대표다. 하긴 집권 여당의 대표의 생각도 이런데, 내가 만난 아저씨들은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다.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이런 일을 셀 수 없이 겪은 내가 중년기와 노년기에는 상황이 나아질까? 그럴 리 없다. 애당초 내가 겪은 차별은 어려서 뿐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아줌마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라는 말이 농담처럼 소비되는 것부터 여성 혐오는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린 여성은 어리다고 늙은 여성은 늙었다고 차별받는다. 개념녀, 김 여사, 맘 충이라는 단어는 여성을 존재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또한 세분화된 혐오의 단어는 숭배의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은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성보다 남성의 교통사고율이 높다는 점과, 입사 면접 때 여성에게만 결혼이나 임신 계획에 대해 묻는 등의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혐오와 차별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약한 쪽으로 향한다.

 

한국여성민우회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포스트잇
한국여성민우회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포스트잇

여성 스스로 썅년이 되다

나는 온갖 포비아(Phobia)들이 혐오 발언을 하며 낄낄대는 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한때 SNS 상으로 전파되기도 했던 이른바 빙썅법을 포비아들과 대화할 때 사용한다. 빙썅법은 ‘빙그레’와 ‘썅년’의 합성어인데, 빙그레 웃으며 할 말 다 하는 썅년이라는 뜻이다. 자조적인 용어로 보이기도 하지만 대표적인 여성 혐오 단어인 ‘썅년’을 여성들이 전유하고 그 의미를 전복하여 사용한다는 것이 유의미하다. 사실 나는 빙썅법이라고 명명되기 전부터 이것을 사용했는데, 많은 여성들이 이 방식에 크게 호응하거나 나처럼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빙썅법에 큰 공감했다는 것 자체가 대부분의 여성이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왔음을 방증한다.

순돌이와 산책하던 중에 개새끼가 사람 가는 길을 막는다며 순돌이를 발로 차려고 했던 개보다 못한 아저씨, 제 앞가림도 못 하면서 남한테 훈수질 하던 아저씨,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새치기를 하던 얌체 아저씨, 늙어서 흘러내리는 자기 얼굴은 생각 안 하고 여자 외모 품평하던 아저씨… 내가 이런 아저씨들을 두고 어떻게 빙썅년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몇 해 전부터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스스로 썅년이 되기를 선택했다. 우리의 삶이 바뀌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일상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첫 시작을 ‘썅년 되기'’로 하자. 조신하고 고분고분해야 하는 구시대적 성 역할은 하대와 반말을 일삼는 무례한 사람들 면전에 패대기치며, 금자씨처럼 말해보자. “너나 잘하세요.”

몇 년 사이 나는 빙썅년에서 썅년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무례한 사람에게 굳이 웃으면서 말할 필요조차 못 느끼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웃으면서 말하지 않는다. 이런 내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당신보다 어려서? 내가 여자라서? 그 이유가 무엇이건 사실 관심 없다. 당신의 불편한 그 마음은 나보다 당신이 더 가진 권력과 비례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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